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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라. 님의 서재입니다.

쓰레기처리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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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라.
작품등록일 :
2023.05.11 13:26
최근연재일 :
2023.05.23 22:36
연재수 :
1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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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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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글자수 :
54,304

작성
23.05.22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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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11. 무원화 프로젝트 4

DUMMY

무원화는 방바닥에 쓰러졌다.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천 번의 절을 했다고 믿었지만 과연 천 번이 맞았는지는 확신이 서진 않았다. 혹시 한두 번 빠지지 않았을까 싶어 몇 번 더 절을 했다.


그 사자가 나타나고부터 제정신이었던 적은 없었다. 사자는 구효범 교수에 대해 이야기했다. 떠나려던 구 교수를 곁에 두기 위해 무고했던 것은 씻을 수 없는 잘못의 시작이었다.


한 맺힌 이들을 신령으로 모시는 무당이 누군가를 한 맺히게 한 건 천벌을 받을 일이었다. 무원화의 마음속 응어리진 그 무엇인가는 그때부터 만들어졌다.


처음부터 무고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떠나려던 구 교수에게 자신의 마음을 이야기했을 때만 해도 사태가 이렇게 진행될 거라고는 전혀 짐작치 못했다. 그저 함께 하고픈 마음뿐이었다. 일이 끝났으니 그만 떠나겠다는 구 교수의 말에 처음엔 상심했고 나중엔 분노했다. 그동안 함께 했던 시간들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 같은 상실감을 보상받고 싶었다. 잠시 여학생회와 함께 하는 것이 상황을 반전시킬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걷잡을 수 없게 일이 커져 버린 걸 깨달은 건 법정에 선 뒤였다.


원하지 않던 지루한 법정 공방을 이어가면서 무원화는 자신의 손을 떠나 커져 버린 사태에 대해 또 한 번 상실감을 느꼈다. 구효범 교수를 만나려 몇 번 마음을 먹었으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판결을 받으면서 그렇게 사건은 종결되는 것 같았으나 구 교수의 죽음 앞에서 무원화는 다시 무너졌다.


어쩌면 오늘 사자가 다녀간 것은 운명인 것 같았다. 늘 부족하다고 느꼈던 지난날들은 아쉬움이었다. 비로소 오늘 그 아쉬움이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살며시 눈을 떴다. 울어서인지 오랫동안 눈을 질끈 감고 있어서인지 눈꺼풀이 달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도 없었다. 사자는 왔던 것처럼 그렇게 소리 없이 사라졌다.


무원화는 그냥 쓰러져 잤다. 그리고 새벽 일찍 깨어났다.


천 배를 한 탓에 이전부터 좋지 않았던 관절이 화끈거리고 닳아 없어질 듯 아팠지만 앞으로 남은 여든 번의 천 배를 끝까지 해내리라 다짐했다. 왠지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무원화는 가끔 흐릿하게 누군가의 옛일이나 앞날을 본 적이 있었다. 스스로도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그리 높지 않은 확률로 맞힐 때마다 사람들은 열광했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다음 질문을 던졌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할 땐 임기응변으로 둘러댔고 그럴 때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해 회의가 일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무기력감에 빠지지 않아도 되었다. 분명히 사자를 보았고, 말을 주고받았다.

세상 그 어느 무당도 하지 못했을 만남을 가진 것이다.






준혁은 방으로 돌아왔다. 저승사자 노릇까지 하리라곤 전혀 예상 못했지만 어쨌든 이번 프로젝트도 잘 해낸 것 같았다. 왠지 삼단봉 대신 명아주 지팡이를 갖고 가고 싶었던 것이나, 헬멧 대신 밀짚모자를 쓰고 싶었던 것이 마치 그렇게 했어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무당을 만나서 그런가? 왠지 기분이 묘하네.’


준혁은 운명이란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없지. 운명은 내가 만들어가는 거니까.’


준혁은 얼빠진 듯한 무원화의 표정을 다시 떠올렸다. 무원화가 구효범 교수에게 참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기회가 없었다. 그저 사자에 대한 두려움에 가득찬 한 인간의 평범한 모습만 보았을 뿐이었다.


81번의 천배를 선뜻 받아들였던 걸 보면 분명 참회하는 마음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혹시 아니라면?’


아무리 갑자기 나타나는 기이한 존재일지라도 말을 섞어본 이상, 사람이라는 걸 알아챘을지도 몰랐다.


‘더 확인해봐야겠어. 오히려 날 갖고 논 거라면........그냥 둘 순 없지. 사람 다루는데 익숙한 무당이니까 나 같은 젊은 풋내기가 쉽게 상대할 사람은 아닐 거야.’


잠을 설치다 새벽 일찍 깨어난 준혁은 서둘러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려다 참았다. 무원화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보고 싶었지만 굿은 내일이었다.


준혁은 회사에 출근할 준비를 했다.






다음날, 준혁은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갔던 길을 다시 되짚어가고 있었다. 같은 풍경이 흘러가고 몇 번을 깜빡 졸다 깨어났을 즈음 현장에 도착했다.


준혁은 그저께 갔던 그 호텔 주변에 이르는 동안 굿이 벌어질 장소와 굿판에 대해 안내하는 플래카드를 여러 곳에서 확인했다. 무당인 무원화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 바닥에서 알려진 인물인 것 같았다. 신기가 강하거나 일을 해결하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대학 교수라는 타이틀의 후광효과가 훨씬 더 큰 것처럼 보였다.


준혁은 오전을 그냥 서성이다 오후가 되자 굿판이 열릴 현장으로 갔다. 벌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전원주택의 너른 마당 안에서 굿판이 벌어질 예정인지 벌써 금줄이 쳐지고 황토가 곳곳에 뿌려져 있었다. 담 안에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고 미처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멀리서나마 볼 수 있도록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준혁은 담 바깥에서 별 관심 없는 듯 서성이며 주인공이 등장하길 기다렸다. 잠시 후,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마치 연예인처럼 박수를 받으며 무원화가 등장하고 있었다.


준혁은 담에 바짝 붙어 무원화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걷는 모습이 불편했다. 왼쪽 다리를 살짝 저는 것처럼 보였다.


그저께에 이어 어제까지 두 번이나 천 배를 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중년의 여성이 아니라 젊은 준혁이라도 연이어 천 배를 한다는 건 상당히 가혹한 처벌이었다.


무당 옷을 입은 무원화가 자리에 서더니 고수의 북 장단에 맞춰 장구를 치며 부정거리를 시작했다. 굿판에 기웃거리는 잡귀들을 쫓아내는 굿거리였다.


무원화는 장구를 울리면서 금줄 안쪽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길고 긴 무가를 읊었고 부채로 땅을 짚었다. 저 긴 내용이 머릿속에 들어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하기야 판소리 대가들은 몇 시간짜리 통 대본을 꼼짝하지 않은 채 한 자리에서 읊기도 하니 그에 비하면 그리 신기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벌써 무당의 그런 모습에 푹 빠져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긴 무가의 낯선 단어들 한가운데서 준혁은 익숙한 소릴 들었다.


“사자를 영접하옵시고..........죄를 뉘우치고............아홉에 아홉의 천 배를 하야.............그러지 아니하면 온몸의 쉰아홉 구멍에서 피를 쏟고 객사할 것이니...........”


무원화가 준혁이 했던 말을 거의 그대로 읊고 있었다. 당연히 원래의 축문에는 존재하지 않던 말이었을 것이다. 준혁의 말이 축문에 오를 정도라면 무원화에겐 엄청나게 큰일이었다는 이야기였다.


무원화는 다음 순서로 짚단에 불을 붙여 하늘로 올려보내기 시작했다. 불이 손안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하늘로 하나씩 솟구쳐 오르며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는 재로 변해 바람에 흩날려 사라져갔다.


익숙한 듯 한치의 흐트러짐도 동요도 없이 차례대로 굿판을 넘겨 가던 무원화는 어느새 말명거리 굿으로 접어들었다. 높고 빨라지는 북과 아쟁, 장구 장단이 이어졌고 무원화는 거기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수천 년을 내려온 전통적인 무가의 춤은 무당이 영과 만나기 위한 장치였다. 점점 호흡이 빨라지고 얼굴이 붉게 상기되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는 건 거의 영에 가까워져 가고 있다는 표시였다.


지금의 무원화는 무당 그 자체였다. 나올 때의 그 절뚝거림 같은 건 온데간데 없었다. 마치 날아갈 듯 발걸음은 가벼웠고 고통스런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얼굴엔 지금의 이 굿판에 대한 자신감이 가득했고, 더할 나위없이 스스로에게 충만한 상태인 것 같았다.


준혁은 더 보지 않았다. 더 이상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전의 굿판에서 어땠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의 모습만으로도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무원화는 정말로 사자를 만났던 것이다. 백일기도를 비롯해, 어려운 과정들을 숱하게 거쳤어도 단 한 번도 접할 수 없었던 초자연적인 존재를 드디어 만난 것이다.


그 초자연적인 존재는 그동안 응어리졌던 마음속의 죄를 알아보고 꾸짖은 뒤 벌을 내림으로써 그녀가 속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었던 죄에 대해 사자가 해결책을 제시해 준 것이다.






굿을 하던 무원화 무당의 모습을 본 후 준혁은 앓아누웠다. 굿을 보아서 그런 것도, 호텔 방에서 사자 노릇을 하느라 그런 것도 아니었으련만 몸이 예전 같지 않게 피곤했다.


가끔 영이 떠돌아다니다 낯선 사람에게 붙는다며 무당들은 사람들을 굿판으로 끌어들였고, 궁지에 몰린 사람들은 무당에게 자신을 의탁하곤 했다.


하지만 준혁은 물리학도였다. 사람의 약한 마음에 기댄 여러 기법들은 논리적으로 모두 파악 가능하고 분석할 수 있다고 믿었다.


무당이나 주술사, 영매와 같은 인간의 심리에 기생해 돈을 벌어들이는 사람들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사라질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준혁은 그냥 쉬고 싶어졌다. 준혁이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단 하나는 시간이었다. 준혁은 시간에게 자신을 맡기기로 했다. 신령이나 사자 같은 전혀 검증되지 못한 존재에 신경쓰는 것보다는 명확한 존재인 시간이 준혁에겐 신이었다.


‘그래. 좀 아프자. 다른 누군가를 아프게 했다면 나도 좀 아파도 된다.’


작가의말

두 번째 프로젝트가 끝났습니다.

다음은 말 많고 탈 많은 성범죄 저지른 의사를 다룹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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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2. 이성동 프로젝트 1 23.05.23 16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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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0. 무원화 프로젝트 3 23.05.19 18 1 9쪽
9 9. 무원화 프로젝트 2 +1 23.05.18 22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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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7. 첫 번째 프로젝트 5 +3 23.05.16 23 2 9쪽
6 6. 첫 번째 프로젝트 4 +1 23.05.16 23 1 10쪽
5 5. 첫 번째 프로젝트 3 +2 23.05.15 23 2 9쪽
4 4. 첫 번째 프로젝트 2 +1 23.05.12 26 1 9쪽
3 3. 첫 번째 프로젝트 1 23.05.12 31 2 11쪽
2 2. 사건의 시작 23.05.12 44 2 12쪽
1 1. 시작 +1 23.05.11 63 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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