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 8 진성 스토커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평소엔 당황한 기색조차 별로 안보이던 슈트님이었지만, 프로포즈의 거절은 상당한 충격이었던 듯 싶다. 얼굴이 붉게 변했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이 되었다. 왠지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음…아…그러니까, 누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는거냐?”
“그럴리가. 롤, 너한텐 있냐?”
“나도 ‘그럴리가.’겠지.”
롤 역시 선뜻 답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이 바퀴벌레와 사랑에 빠지는 쪽이 내가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롤은 나보다 더하면 더했지, 약하진 않을 것이다.
난 적어도 인간을 상대로 죽이는 쾌감이라도 얻지만, 그녀는 아예 다가오는 것 자체가 불쾌하게 여기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프로포즈 하기엔 장소나 분위기가 좀 안좋았지?”
슈트님이 잠시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생각에 잠기더니 어렵게 말을 꺼냈다. 늘 사랑스러웠지만, 저 표정은 왠지 더 귀여워 보였다. 자신감을 상실하고 소심하게 물어보는 모습은 참 이례적이었다.
“아닌데요.”
우리가 낭만을 찾는 소녀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아실텐데, 참으로 안이한 질문을 날렸다. 또 고민에 빠졌다. 꽤 오랜 세월 추억이 될 모습이었다.
“혹시, 나 안좋아하는 거냐?”
이번에도 오답이로군요. 슈트님. 나는 롤과 잠시 시선을 교환했다. 이렇게 나누는 대화도 재미있긴 하지만, 확실히 장소나 상황은 그리 좋지는 않았다.
“’너무’ 좋아해서 그래요.”
“그게 무슨 소리냐?”
솔찍히 말하면, 나와 롤, 우리는 이미 망가져 버린 상태였다. 사랑이 뭔지는 알지만, 결코 가능하지는 않은 것이다.
망가져 버린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믿는 것은 보통, 집착과 독점욕이었다. 나와 롤은 보통 사람들의 흉내를 냈다. 한때는 보통 사람들처럼 되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기도 하고 짜증나는 일이다. 보통 사람처럼 사랑을 하면, 슈트님과 행복한 인생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물론 아주 옛날에 포기한 것이기도 했다. 보통 사람이 된다고 행복해질 것 같지는 않았고, 나답게 사는게 최고라고 생각했다.
“가정을 꾸미는 것, 특히 자녀를 낳는 것이 맘에 안들어요. 슈트님 외의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을지, 아니 혐오하지 않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거든요.”
슈트님의 얼굴에 다양한 감정이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후회, 죄책감 같은 것이 주된 감정이었다.
미안해 하실 필요 없답니다. 슈트님이 주우셨을 때는 이미 망가질대로 망가져 있었으니까 말이지요.
“그래도, 난 너희가 낳은 아이라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내가 아껴주면 되지 않을까?”
“슈트님도 참, 그걸 저희가 원할 것 같아요? 슈트님이 다른 무엇을 사랑하는 걸?”
릴이 사심없는 미소로 태연하게 말했다.
슈트님은 순간적으로 오한을 느낀 듯 했다. 어쩔 수 없다.
“이런 소리를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너희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다고 해도, 너희를 여전히 사랑할 거다.”
“그렇다고 슈트님을 일부러 나눠줄 필요는 없지요.”
난 딱 잘라서 말했다. 내 말에 담긴 의지를 읽은 듯, 슈트님은 할 말을 잃었다.
우리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스토커’다. 어쩔 수 없이 스토킹을 택하는 나약한 녀석들과는 다르다.
어린 시절 내가 바랐던 것은 어딘가에 슈트님을 가둬놓고, 롤과 함께 사는 것이었다. 사실 롤의 경우엔 조금 망설였다. 롤이 좋아서가 아니라, 없으면 불편하니까.
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결국 이뤄질 수 없는, 아니 이뤄져서는 안되는 꿈이라는 것은 곧 알 수 있었다. 슈트님이 망가져 버릴 테니까.
닮은 누군가로 대체할 수 있다면 그것도 감수할 만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린 슈트님을 ‘너무 지나치게’ 좋아하고 있었다.
우리가 미스티아를 용인한 것도 그때문이었다. 외로움이라고 할까, 대화상대의 부족 탓에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고있던 슈트님에게 도움이 되었으니까.
게다가 미스티아와의 관계는 상당히 담백하게 흘러간 것도 다행이었다. 그녀와의 관계가 우정이 아니라, 사랑이 되었다면 아마도 슈트님은 좀 못 볼 꼴을 봤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다고 미스티아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슈트님 역시 정신적으로 상당히 불안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같은 세계를 공유한 미스티아 덕분에 안정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이 좋은 친구가 된 것은 내게는 다행스러운 면이 있다. 아니, 슈트님에게 다행스러운 일이다. 난 사실 별 상관없다.
미스티아가 종종 우리에게 ‘너희 너무 그러다 스토커된다’며 말을 해온 덕분에 우리는 스토커라는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와 슈트님의 설명을 토대로 우리는 스토커란 존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사랑을 하고 싶어서, 스토킹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저 스토킹이 하고 싶어서 스토킹을 하는 이들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존재이기도 했다. 스토커를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스토커와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스토킹(광기어린 집착)이니까.
“아이를 낳고 싶으시다면, 라스안이나 미스티아 언니를 이용하세요.”
롤의 상냥하다고할지 냉담한 말에 슈트님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반쯤 넋이 나간 듯 했다. 슈트님의 경우 정체성의 문제가 걸려 있었다. 정신과 육체의 괴리감이라고 할까.
미스티아도 같은 문제를 갖고 있었다. 그녀는 객관적으로 봐도 눈이 부실만한 미인이었다. 내가 봐도 이쁘긴 이쁘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자각이 없다. 아니 가질 수가 없었다. 미스티아의 육체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묘한 느낌 때문이었다.
슈트님도 마찬가지라서 동양인의 평범한 젊은이를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제법 잘생긴 라이엔 가문의 청년은 자신이면서도 자신이 아닌 것 같다고 느꼈다. 그래서 태어나는 아이에 대해서 정말 자신의 자식처럼 받아들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래서 마법사가 될 생각도 아니면서 순결(?)을 지키고 있는 듯 했다. 우리야 슈트님이 원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지만, 혹여 아이가 생기는 일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일단 슈트님의 분신이랄지 배설물인데 죽이고 싶을 테니까.
슈트님 충격이 큰 것 같으니, 조금은 위로해 드리는게 좋을려나.
“결혼 문제는 별로 관심 없어요. 그냥 귀찮을 뿐인데, 꼭 원하신다면 날 잡아요.”
아, 결정타인가. 당장이라도 거품을 물 것 같다.
-------------------------------------
과감하게 1인칭을 시도해 봤습니다....^^;
좀 엽기적인 내용이로군요....
반응이 안좋으면 삭제에 들어갈 지도....
책에는 넣기 좀 그렇지요?
Comment '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