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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테일 님의 서재입니다.

사람을 읽는 변호사가 세상을 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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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테일
작품등록일 :
2023.09.06 15:27
최근연재일 :
2023.11.2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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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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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93,542

작성
23.09.2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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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012. 하찮은 사건은 없다

DUMMY

“형. 어떻게 된 거예요?”


잠에서 깬 재혁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어떻게 되긴. 펑소처럼 술 먹고 뻗은 거지.”


재혁은 술이 약해서 조금만 먹어도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해서 술을 조심하는 것도 아니어서 녀석과 함께 있다 보면 어제와 같은 일이 종종 발생했다.

그래도 외박은 거의 없었던 터라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형. 죄송합니다.”

“간만에 깍듯하네. 어여 씻고 내 와이셔츠 하나 골라 입어.”


나는 와이셔츠가 걸려 있는 행거 쪽을 가리켰고, 재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욕실로 향했다.

녀석이 씻는 사이 라면을 끓일 준비를 했다.

냄비에 물이 끓는 동안 대파를 반 개 썰어 준비하고, 물이 끓기 시작하자 라면과 스프를 풀고 대파 썬 것과 계란을 넣어 라면을 끓여 냈다.

씻고 나온 재혁이 라면을 보자 얼굴에 미소를 띠며 식탁으로 달려왔다.


“오오. 역시 일목이형 센스가 있으셔.”


재혁은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라면을 후루룩 처먹기 시작했다.

사람과의 관계를 어려워해서 대화도 제대로 나누기 힘들었던 녀석의 성격을 감안하면 이런 행동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그만큼 재혁은 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많이 먹어라.”


대답도 하지 않고 꾸역꾸역 면발을 욱여넣고 있는 녀석을 따라 나도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대파의 향과 함께 매콤한 국물이 숙취를 달래 주었다.


아직도 눈앞에서 어제의 장면이 아른거렸다.

준비해 둔 증거를 냈을 때 판사와 상대 측 변호사의 얼굴,


1심 판결을 취소하고, 우리의 승리를 선언하는 판사의 목소리.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째려보고 퇴장하는 판사의 모습.

그리고, 기뻐서 방방 뛰는 재혁의 얼굴까지도.

눈앞에 생생했다.


어제 법률사무소 첫 사건을, 그것도 최고의 로펌(law firm)인 김앤전을 상대로 이겼다는 것이 아직까지도 실감나지 않았다.

첫 사건을 멋지게 해결했으니 앞으로 맡을 사건도 잘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자신감 또한 밀려왔다.

더구나 지금 내 앞에서 라면을 처먹고 있는 놈은 사법연수원에서도 머리 좋기로 소문났던 놈 아닌가.

재혁과 합을 잘 맞춘다면 서로 윈윈하면서 정말 대한민국 최고의 로펌을 만들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밀려왔다.


“형.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라면 다 불어요!”


금세 라면을 다 먹어치운 재혁이 내 라면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 그래? 이거 더 먹을래?”


분명 빈말이었고, 빈말임을 알 수 있도록 말했다.

하지만, 녀석은 대답도 하지 않고 내 그릇에 있던 라면의 절반을 덜어 갔다.

나는 법률사무소의 비전을 생각하고 있는데, 저놈은 눈앞의 라면에 집착하고 있었다.

좀 전까지 머릿속에 그려졌던 장밋빛 미래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


라면을 다 먹은 우리는 차를 타고 서초동에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

조수석에 앉은 재혁은 졸린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물었다.


“형. 이 차 얼마나 해요? 이거 하나 살까?”

“너는 집이 강남이면서 뭔 차가 필요해?”


재혁의 집은 사무실이 있는 서초동에서 지하철로 두세 정거장 거리여서 굳이 차가 필요 없었다.


“그래도 가끔 어디 가거나 재판 갈 때 쓰면 좋잖아.”

“글쎄다. 뭐 하러 이런 차를 사?”


내 차는 구형 그랜저였다.

그랜저도 충분히 좋은 차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람들한테 크게 어필할 만한 차는 아니었다.

강남에 사는 재혁이라면 벤츠 같은 차를 살 수도 있었다.


“집만 강남에 있지 우리 집 돈 없어. 지금까지 뒷바라지 해준 것도 미안한데 또 손을 어떻게 벌려.”


내 라면을 뺏어 처먹을 때와 달리 의젓한 말을 했다.


“오오. 그런 생각을 다 하고. 안 어울리는데!!”

“안 어울리다니? 나야 말로 효자 중에 효자지. 사법시험도 한 방에 다 붙고. 누구랑은 다르지!!”

“아흑. 이 자식이. 아픈 곳을 찌르네.”


내가 손을 들어 때리려는 시늉을 하자 재혁이 조수석 창문 쪽으로 몸을 피하며 말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제 그만 고정하시죠.”


재혁의 말에 나는 들었던 손을 내렸고 녀석은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잠시 적막이 흐르다 재혁이 나를 보며 물었다.


“형은 왜 개업을 한 거예요? 로펌에 들어갈 수도 있고, 회사에 취직할 수도 있었는데?”

“개업을 왜 하긴? 돈 벌려고 한 거지.”


검사 임용 발표가 나던 날이 다시 떠올랐다.

성적이나 다른 부분에서 전혀 결격이 없었음에도 임용에서 떨어진 이유를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명확하게 말은 안 했지만, 이전 통화 내용을 봤을 때, 다혈질인 아버지가 받은 벌금과 집행유예 전력이 문제였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법조인이 되고, 검사가 되기를 학수고대했던 아버지에게 아버지 때문에 검사 임용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아들의 한쪽 눈을 그렇게 만들어 평생 죄책감을 가지고 사는 아버지에게 또다시 짐을 지워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며칠 방황을 한 끝에 나는 검사 대신 다른 목표를 택했다.

어차피 다른 로펌을 가봐야 거기서 거기인 인생을 살게 될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개업을 해서 김앤전 법률사무소를 넘는 대한민국 최고의 로펌을 만들어 보자.

남들이 보기엔 허황된 꿈 같겠지만 나에게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비장의 무기가 있지 않은가.


“일단 일을 배워야 하는 거 아니에요? 무작정 개업을 하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이 자식이. 지는 꼭 안 그런 것처럼 말하네.”

“듣고 보니 그렇네. 하하!!”


내가 곧바로 개업한 것도 이상한 일이었지만, 재혁이 나와 같이 개업한다고 했을 때 같은 반 동기들은 물론이고 연수원 교수님들까지 경악했었다.

재혁은 마음만 먹으면 판·검사에 대형 로펌까지 골라서 갈 만한 성적과 스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녀석이 나를 찾아와 개업한 이유를 말했을 때 나는 놀라움과 함께 뿌듯한 감정이 들었었다.


“나랑 일해 보니까 어때?”


이전 일을 생각하다가 지금은 재혁이 어떻게 생각할지 문득 궁금해졌다.


“첫 사건도 이기고 뭔가 느낌이 좋네. 돈이나 실컷 벌어야지.”

“돈을 벌려면 김앤전에 가야지. 대한민국에서 돈 많은 사람들은 전부 다 거기로 가는데.”

“아니. 거기보다 형이랑 있으면 더 많이 벌 것 같아. 그리고, 김앤전은 그냥 싫어. 그냥.”


재혁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미소에는 뭔지 모를 비밀 같은 게 숨겨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혹시나 재혁이 마음속으로 무슨 말을 할까 싶어 나는 녀석의 얼굴을 한참 동안 힐끗거렸다.

하지만, 사무실에 도착할 때까지 재혁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


“어서 오십시오.”


나와 재혁이 사무실에 들어서자 먼저 나와 있던 정성식 국장이 반갑게 인사했다.


“일찍 나오셨네요.”

“일찍은요 뭘. 그나저나 어제 사건은 이기셨나 봐요. 약사가 아침부터 전화를 했습니다.”


어제 성공보수를 깎을 수 없나 생각하던 의뢰인 약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전화요? 뭐라고 그래요?”

“좀 이따 오겠다고 그럽니다. 성공보수 때문에 그런 거 같던데.”

“깎아 달라고 그러려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내 말에 정 국장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가 이겨 줘서 그 사람 수입이 얼마나 늘어나는데? 더 주면 더 줬지 그걸 깎아요?”

“화장실 들어갈 때하고 나올 때하고 같나요? 사람이 다 그런 거죠.”

“그건 그렇지만. 깎아 달라고 하면 사람도 아니죠.”

“하여간 저는 의뢰인 안 만날 테니까 국장님이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정 국장은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돈 문제는 내가 직접 얘기하는 것보다 정 국장이 하는 게 훨씬 효과가 있었다.

약사가 처음 사무실에 왔을 때도 비용을 깎으려는 그를 정 국장이 나서서 착수금과 성공보수를 올려놓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그의 활약을 기대하면서 나와 재혁은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약국 사건 파일을 실행했다.

어제 판결에서 우리가 제출한 증거들을 근거로 해서 우리 쪽의 승소로 판결했기 때문에 상대방이 대법원에 상고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상고심은 사실 확정 문제는 다루지 않고 법률 문제만을 다루므로 약국 사건과 같이 사실 확정이 문제 되는 사건은 여지없이 기각된다.

새내기인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을 김앤전이 모를 리 없었다.

마지막으로 법률적인 쟁점 문제가 없는지 검토한 뒤 파일 실행을 종료했다.


‘걱정 안 해도 되겠어.’


그때, 바깥에서 정 국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변호사님이 저한테 맡기셨다니까요. 상담실로 가시죠.”

“그래도 난 변호사님이랑 말하고 싶은데······”


이어서 약사의 볼멘소리가 들리더니 두 사람의 목소리는 한동안 들리지 않았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두 사람의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십시오.”


내 말이 끝나자 정 국장과 의뢰인 약사가 같이 들어왔다.

약사는 불만과 미안함이 뒤섞인 묘한 얼굴로 꾸벅 인사를 하며 말했다.


“변호사님. 이번 재판 이겨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성공보수를 좀 더 드려야 되는데, 제가 요즘 사정이 좋지 않아서.”

“그럼 어떻게···?”


정 국장이 설득을 못 했나 싶어 말꼬리를 흐리는데, 정 국장이 끼어들었다.


“약사님이 계약한 대로 성공보수를 주시겠답니다. 제가 더 주는 게 맞다고 했는데, 그건 정말 힘들다고 하셔서 그렇게 하시라고 했습니다.”


정 국장은 못마땅한 얼굴로 약사를 노려보며 말했다.

계약 금액대로 주는 게 잘못된 것도 아닌데 약사는 정 국장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저 수줍게 웃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는 벙찐 표정으로 정 국장을 바라봤다.

정 국장은 별거 아니라는 듯 살짝 거만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변호사님. 약국 가서 바로 송금하겠습니다.”


약사는 내게 목례를 하고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냥 제가 지랄 좀 했습니다. 우리 변호사님들처럼 실력 있는 분들한테 소송을 맡겼으면 알아서 보답해야지. 계약한 금액도 깎는 게 뭐냐고 호통을 쳤죠. 이걸로 당신네 약국이 얼마나 더 벌지 생각이나 해 봤냐고 했더니 바로 꼬랑지 내리더라고요.”


역시 검찰 수사관 20년 짬밥은 위력이 있었다.

사람을 어르고 달래서 원하는 걸 얻는 게 검찰수사관의 일이 아니던가.

사회생활이라고 해 봐야 약국에서 환자만 만나던 약사로서는 정 국장이 감당 안 됐을 것이다.


“국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뭘. 제가 할 일 했을 뿐인데요.”


나의 환한 얼굴을 보며 정 국장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법률사무소 일혁의 첫 사건은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끝났다.

그때,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국장님!! 뭐하세요? 제 사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웃고 있던 정 국장과 나는 사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20대 중반쯤 되는 남자가 심각한 얼굴로 마주 보고 있었다.

정 국장이 남자를 보며 소리쳤다.


“안 된다니까 왜 그래!!”

“뭐가 안 된다는 겁니까? 이게 얼마나 억울한 일인데 안 된다고 그러세요!!”

“그래도 이놈이. 여기가 어디라고!!”


정 국장이 손가락질 하는 남자는 억울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때 정 국장을 보고 있던 남자의 마음이 내 귓가에 들려왔다.


< 이 새끼를 찾아온 내가 미친놈이지! >


작가의말

12화는 1화의 재판 선고 다음날 이어지는 에피소드입니다.
2화부터 11화까지는 주인공의 회상이니 이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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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013. 게임 아이템 사기 (1) +1 23.09.21 2,327 35 11쪽
» 012. 하찮은 사건은 없다 +2 23.09.20 2,387 27 12쪽
11 011. 첫 사건 (2) +4 23.09.19 2,402 32 12쪽
10 010. 첫 사건 (1) +4 23.09.18 2,430 29 12쪽
9 009. 개업 +3 23.09.17 2,453 33 12쪽
8 008. 검찰 실무 수습 (3) +4 23.09.16 2,429 37 12쪽
7 007. 검찰 실무 수습 (2) +2 23.09.15 2,469 33 12쪽
6 006. 검찰 실무 수습 (1) +3 23.09.14 2,682 37 12쪽
5 005. 사법연수원 (3) +5 23.09.13 2,785 36 12쪽
4 004. 사법연수원 (2) +2 23.09.12 2,917 39 12쪽
3 003. 사법연수원 (1) +2 23.09.11 3,205 42 12쪽
2 002. 내 이름은 김일목 +6 23.09.11 3,419 46 12쪽
1 001. 내가 누구냐고? +3 23.09.11 4,380 5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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