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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테일 님의 서재입니다.

사람을 읽는 변호사가 세상을 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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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테일
작품등록일 :
2023.09.06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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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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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9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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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011. 첫 사건 (2)

DUMMY

“형. 이것 좀 봐.”


재혁이 프린트물 하나를 쑥 내밀며 말했다.

프린트물에는 약사법 20조가 인쇄되어 있었다.


“약사법이네.”

“응. 그게 보건소에서 약국 개설 불허가 처분을 내린 근거 조항이야.”


어제 봤던 의뢰인 약사의 비쩍 마르고 억울한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이 차린 약국 앞 건물에 병원이 생겼을 때만 해도 의뢰인은 무척 기분이 좋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병원 별관에 약국이 생기자 깜작 놀란 의뢰인이 보건소에 진정을 넣었고, 다행히도 보건소는 법에 따라 약국 개설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근거 조항에 따라 약국 개설 불허가처분을 한 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1심에서는 왜 불허가처분을 취소한 거지?”

“1심 판결문을 보니까 병원의 별관은 원무과 등 행정시설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의료시설 안으로 볼 수 없다는 거야.”


내 질문에 재혁이 곧바로 대답했다.

의료법 제20조 제5항 제2호는 ‘약국을 개설하려는 장소가 의료기관의 시설 안 또는 구내인 경우’ 개설 등록을 받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쟁점은 원무과 등 행정시설을 의료기관의 시설로 볼 수 있느냐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보며 재혁이 말을 이었다.


“진료실이나 수술실은 당연히 의료기관의 시설로 보겠지만, 행정시설도 의료기관의 시설로 볼수 있느냐가 쟁점이겠지.”

“소규모 의원과 달리 규모가 있는 병원이라서 의료와 행정시설이 분리되어 있어서 이런 문제가 발생한 거군.”


내 말에 재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병원 별관에 다른 시설들이 있는지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별관을 병원이 통째로 사용하는지 아니면 다른 업체들이 입주해 있는지도 중요한 포인트인 것 같아.”


재혁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만약 다른 업종의 사무실이나 음식점들이 주를 이루고 병원의 원무과가 건물의 일부만 사용하고 있다면 의료시설로 보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다.


“듣고 보니 그렇네. 그럼 넌 쟁점 정리하고 있어. 난 현장에 가서 조사 좀 하고 올 테니까.”

“알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쇼.”


재혁은 오른손을 이마에 갖다 대며 경례하는 시늉을 하더니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현장으로 출발하기 전 확인해야 할 사항을 다시 한번 체크했다.

고시 공부를 할 때나 연수원에서 다룬 모의 사례가 아닌 실제 사례라는 생각에 부담감이 훅 올라왔다.


***


의뢰인 약국은 나름 깔끔하고 세련됐지만, 병원 별관에 있는 상대방 약국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초라했다.

어저께 봤던 의뢰인의 ‘속상한’ 얼굴이 절로 이해가 갔다.

의뢰인 약국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약사는 어제 그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변호사님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약사님. 저기 앞에 있는 약국이 상대방 약국인 거죠.”


의뢰인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 의뢰인의 마음이 내 귀에 들려왔다.


< 다시 보니 변호사가 좀 그렇네. 아무래도 다른 데를 갔어야 했나? 정 국장한테 속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 >


어제 계약을 하고 갔지만 아직까지 나를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약사님. 1심에서는 병원 별관을 의료시설로 보지 않았던데 별관에는 다른 업체가 입점되어 있나요?”

“다른 업체라면 어떤 업체를 말씀하시는 건지?”

“병원 말고 다른 사무실이나 음식점 같은 거요.”

“약국 말고는 없죠. 병원장실, 원무과, 사무실, 휴게실, 식당. 다 이런 시설이에요.”


내가 구체적인 질문을 하자 의뢰인의 얼굴이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별관 약국에서 근무하는 약사랑 말은 해 보셨어요?”

“아뇨. 인사도 안 오는데 제가 먼저 가서 말을 붙이기도 그래서··· 얼핏 봤는데 젊어 보이더라고요.”


병원 별관에 큰 규모로 약국을 차리려면 꽤 돈이 들어갈 텐데 젊은 약사가 그걸 감당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약사가 뭔 차를 타고 다니는지 보셨어요?”

“얼핏 한번 본 게 전부라니까요. 제가 그걸 어떻게······”


약사는 대답을 다 끝맺지 않고 나를 올려다봤다.

그러다 내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아챈 듯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나이도 얼마 안 된 친구가 그런 약국을 차리려면 돈이 꽤 많이 있어야 할 텐데 말이에요. 근데 겉으로 봐선 그렇게 잘 살아 보이지는 않던데.”

“알겠습니다. 제가 가서 직접 보고 오겠습니다. 별관도 둘러볼 겸 해서요.”

“네. 변호사님.”


내가 걱정과는 다르게 능숙하게 일을 진행하자 의뢰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퍼졌다.

나는 간단히 인사를 하고 약국을 나와 바로 앞에 있는 병원 별관으로 향했다.

병원 별관은 본관의 절반 정도 되는 크기로 5층으로 되어 있었다.

1층은 문제의 약국이었고, 2층은 원무과, 3, 4층은 사무실, 5층은 병원장실 및 임원실이 있었다.

그리고, 2층은 구름다리로 본관과 이어져 있는 구조였다.


‘본관과 구름다리로 이어져 있는데 별개의 시설이라고 보는 게 더 이상해!’


1심에서 이 부분이 주장되었는지 확인이 필요했다.

나는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메모했다.

2층에서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내려오자 젊은 약사가 인부들에게 지시를 하고 있었다.


“약국 개업하셨나 봐요?”

“아··· 예···.”


약사가 ‘이 자식 뭐야’ 하는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젊으신데 성공하셨나 보네요? 이렇게 큰 약국을 다 여시고.”

“성공은 뭘··· 그냥 벌어 둔 것 하고, 대출 받아서 하는 거죠.”


가소롭다는 얼굴로 대답을 한 약사는 바로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냈다.


< 별놈 다 보겠네. 내가 무슨 돈이 있어서 이렇게 큰 약국을 차리냐? 사장님이 차려 주니까 하는 거지. >


‘이 자식 역시 바지 사장이었네.’


가소롭다는 얼굴로 쳐다보는 약사에게 나도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대응했다.

그렇게 두 남자의 어색한 대치가 이어질 무렵 약국 밖으로 검은색 벤츠 S500이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약사는 차를 보자마자 후다닥 나가서 차 옆에 두 손을 모은 자세로 멈춰 섰다.

기사가 내려서 뒷문을 열자 풍채 좋은 초로(初老)의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약사가 90도로 고개를 숙여 남자에 예의를 갖췄다.


‘저 사람이 실제 사장이군.’


나는 재빨리 다이어리에 벤츠의 번호를 적었다.

남자가 뭐라 뭐라 약사에게 얘기를 하자 약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굽신거렸다.

약사는 약국의 대표라기보다는 남자의 부하 직원 같은 모습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좀 더 캐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약국을 떠나 사무실로 돌아갔다.


***


“뭐 좀 알아냈냐?”

“벤츠 차량 번호로 조회를 해 보니 소유자가 회사로 나왔고, 법인등기부등본을 떼 보니까 형이 본 그 사람이 회사 사장인 것 같아.”

“그 사람이 사장 아니면 누가 차 뒷자리에서 내리겠냐? 회사는 어떤 회사야?”

“의약품 도매 회사.”


의약품 도매 회사라는 말에 느낌이 확 와닿았다.

건물을 지어 병원을 유치하고 도매 회사가 의약품을 독점적으로 납품하는 계약을 맺으면 임대료는 문제도 아니었다.

게다가 약국도 자기 사람을 심어 놓는다면 그야 말로 꿩 먹고 알 먹기가 아닌가.


“건물주도 회사야?”

“응. 그리고, 그 약사 말인데······”

“약사가 뭐?”

“약사 프로필을 보니까 그 회사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더라고.”


역시 그런 관계가 있으니 약사가 그렇게 굽신거렸던 것이다.

물론 약사가 회사의 직원이었다는 것이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재판부에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한 일이었다.


“이거면 할 만하겠네.”


내가 회심의 미소를 짓자 재혁은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의약품 도매회사 소유의 건물에 본관과 별관이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고, 별관은 병원 시설 외 약국밖에는 없고, 게다가 약국의 대표자인 약사가 도매회사에서 근무했던 직원이었다? 이것만 해도 충분할 거 같은데.”

“하나 더 있어.”

“뭐가?”


실실 웃던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병원장과 도매회사 대표의 이름이 비슷해. 성과 이름의 첫 번째 글자(字)가 같아.”

“오호!! 정말 그렇네.”


법인등기부 등본을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이다.

서류를 확인한 재혁이 탄성을 내며 말했다.

아주 기본적인 내용을 재혁이 몰랐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녀석을 이겼다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했다.


“기본적인 것도 체크를 안 하고 말이야. 똑바로 안 할 거야?”

“흐흐··· 알겠습니다.”


나의 장난스런 타박에 재혁이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두 사람이 친척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더 조사해 보기로 하고,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정리해서 재판부에 제출하자. 그리고, 약사가 도매회사에서 일했다는 건 지금 내지 말고 나중에 두 사람 친척인 거 밝혀지면 그때 같이 내자고.”

“알았어. 형 말대로 하는 게 맞는 거 같아.”


재혁은 서류를 챙겨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지금까지 있는 증거로도 충분히 1심을 뒤집을 만하지만 병원장과 도매회사 대표가 친척관계였고, 약사가 회사에서 일했다는 걸 나중에 제출하면 완전히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감이 붙자 한시라도 빨리 재판을 하고 싶은 마음까지 생겨났다.


***


약국 사건의 첫 공판일.

행정사건이라 1심은 양재동에 있는 행정법원에서 진행됐지만, 항소심은 서울고등법원 관할이었다.

첫 사건부터 지방법원이 아니라 고등법원이라니 부담이 더했다.

그리고, 실제 재판정에 들어오니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옆에 있는 재혁을 돌아보니 녀석도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떨리냐?”

“떨리긴 뭐가 떨려? 우리가 이렇게 준비했는데, 지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재혁은 말을 하는 중간 침을 꿀꺽 삼켰다.

나는 법정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실제 사건 대리하니까 진짜 변호사가 된 거 같네.”


재혁도 나를 따라 법정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재판장님 입장하십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주십시오.”


법정 경위의 말과 함께 재판장과 배석판사 둘이 법정으로 들어왔다.

법대에 선 그들은 방청석을 향해 인사를 한 뒤 자리에 앉았다.


“오늘 첫 번째 사건은 서초보건소와 다나약국 사건입니다. 당사자, 대리인들 앞으로 나오세요.”


재판장의 말이 끝나고 나와 재혁은 보조참가인의 대리인 자격으로 나갔다.

재판장이 우리를 보며 물었다.


“보조참가인의 대리인으로 법률사무소 일혁에서 나오신 건가요?”

“네. 맞습니다.”

“1심 판결의 취소를 구하는 취지죠? 항소 이유를 간단하게 말씀해 보세요.”

“원심에서 다나약국이 있는 병원 별관 건물이 의료시설이 아니라고 본 것은 부당하며, 그 이유는 병원 본관과 별관이 연결되어 있으며, 비록 별관에 진료실이나 수술실 등이 없기는 하지만 별관과 본관을 합쳐 병원이 전체 건물의 95%를 사용하고 있는 점 등을 볼 때 별관도 의료시설로 봐야 된다는 취지입니다.”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첫 재판이라는 부담감에 떨리는 목소리를 완전히 제어할 수는 없었다.

겨우 말을 마치고 길게 숨을 내쉬고 있던 나를 본 재판장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 제법이긴 한데··· 이거 이기려면 증거를 더 가져와야 될 거야. >


재판장이 마음을 드러낸 순간 걱정과 안도가 교차했다.

지금까지 제출한 증거로는 1심을 뒤집지 못한다는 걱정과 함께 증거가 더 있다면 충분히 이길 수도 있다는 안도였다.

그리고, 우리에겐 사건을 뒤집을 만한 히든카드가 남아 있지 않은가.

나는 옆에 있던 재혁의 귀에다 대고 말했다.


“재혁아! 준비 다 됐냐?”

“응. 알아보니까 형이 말한 대로 병원장하고 도매업체 대표하고 친척이더라고.”


퍼즐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속이 후련해진 나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재판장을 응시했다.

재판장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재빨리 비웃던 표정을 거두었다.

그리고, 그는 재판이 끝날 때까지 다시는 웃지 않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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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012. 하찮은 사건은 없다 +2 23.09.20 2,387 27 12쪽
» 011. 첫 사건 (2) +4 23.09.19 2,403 32 12쪽
10 010. 첫 사건 (1) +4 23.09.18 2,430 29 12쪽
9 009. 개업 +3 23.09.17 2,453 33 12쪽
8 008. 검찰 실무 수습 (3) +4 23.09.16 2,429 37 12쪽
7 007. 검찰 실무 수습 (2) +2 23.09.15 2,469 33 12쪽
6 006. 검찰 실무 수습 (1) +3 23.09.14 2,682 37 12쪽
5 005. 사법연수원 (3) +5 23.09.13 2,785 36 12쪽
4 004. 사법연수원 (2) +2 23.09.12 2,917 39 12쪽
3 003. 사법연수원 (1) +2 23.09.11 3,205 42 12쪽
2 002. 내 이름은 김일목 +6 23.09.11 3,419 46 12쪽
1 001. 내가 누구냐고? +3 23.09.11 4,380 5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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