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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읽는 변호사가 세상을 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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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테일
작품등록일 :
2023.09.06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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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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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 사법연수원 (1)

DUMMY

경기 고양시 일산 동구 마두동에 위치한 사법연수원.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고시생에게는 말 그대로 유토피아요, 엘도라도요, 극락정토 같은 곳이다.

나는 2003년 3월 사법연수원 대강당에서 있었던 입소식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900명의 연수생들이 깨끗한 양복, 양장 차림으로 서 있던 모습을.

연수생들 뒤에서 가족들이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 모습들을.

그리고, 현직 판·검사 교수들이 줄지어 입장하면서 단상에 오르고, 사법연수생 선서를 하던 그 순간, 순간들을 말이다.


“일목아! 난 네가 너무나 자랑스럽다!”


입소식을 마치고 같이 사진을 찍던 아버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다 아버지 덕분이죠.”

“아니다. 이 애비가 뭘 해 준 게 있겠냐? 괜히 네 눈이나 그렇게 만들고. 애비는 할 말이 없다.”


눈시울이 붉어진 아버지를 보니 마음이 짠했다.

그리고, 홧김에 이름을 一目으로 바꾼 것이 더욱더 죄송했다.

물론 아버지는 자신이 지어 준 한자 이름이 바뀐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아니에요. 아버지. 저도 아버지께 그동안 불효 많이 했잖아요. 앞으로는 더 좋은 아들이 되겠습니다.”

“그래. 그래. 너무 고맙다.”


그때, 하나의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 강렬한 시선의 발원점은 바로 재혁이었다.

내가 고개를 돌려 재혁을 쳐다보고 있는데도 그는 내 시선을 의식하지 못할 만큼 뭔가에 빠져 있었다.

그 미묘한 눈빛.

난 지금도 녀석의 눈빛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 빛 중 일부가 우리 부자를 부러워한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너 아는 사람이니?”


아버지가 재혁을 보며 물었다.


“아뇨. 잘 모르는 사람이에요.”


사법시험 2차 시험장에서 보고, 연수원에서 다시 보는 사이지만 아직까지 얘기 한마디 나누지 않은 사이였다.

나는 재혁을 알아도 재혁은 내가 누군지 잘 모를 것이다.


- 사법연수생들은 각자 배정된 반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연수원 내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버지. 저는 이만 가 볼게요.”

“그래. 얼른 가라.”


아버지의 붉어진 눈시울을 뒤로 하고 나는 1반 강의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강의실로 가는 동안 아버지의 눈시울처럼 내 눈도 뻐근하게 아려왔다.


사법연수원 34기 1반 강의실.

좌석은 지정석으로 가나다 순으로 정해졌다.

강의실 책상은 세 명이 앉게 되어 있었는데, 내 옆자리는 바로 김재혁이었다.

사법시험 2차를 볼 때부터 이어진 인연이 연수원 바로 옆자리까지 이어지다니 보통 인연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김재혁입니다.”


본인이 나보다 어리다고 생각했는지 재혁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김일목입니다.”


나는 재혁과 반갑게 악수를 하며 재혁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저보다 형님 같은데 말씀 편하게 하시죠’와 같은······

그러나, 녀석은 빙긋 웃기만 할 뿐 내가 원하고 있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악수한 손을 거둬들이며 어색하게 웃고 말았다.

강의실에 모인 연수생들은 나와 재혁이 그런 것처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옅은 웅성거림이 끝나갈 무렵 교수들이 강의실로 들어와 강단에 올랐다.

현직 판사 두 명과 검사 한 명으로 구성된 교수들은 차례로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저는 민사재판 실무와 A조 담당 서종규 교수, 이쪽은 형사재판 실무와 B조 담당 김민정 교수, 저쪽은 검찰실무와 C조 담당 정건국 교수입니다.”


교수들은 한 사람씩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직업적인 특성인 것일까 들릴락말락한 작은 목소리, 단호한 어투가 인상적이었다.

작은 목소리 탓에 교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여러분들 반갑고, 앞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원하는 바를 이루시길 바랍니다. 내일부터 정상적으로 강의가 시작되니까 다들 늦지 말고 나오세요.”


유일한 여자 교수인 김민정 교수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사법연수원은 2년 과정으로 민사, 형사재판 실무, 검찰 실무를 비롯하여 법률 실무를 배우는 곳이다.

형식적으로는 공무원 신분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학원생 정도로 보는 것이 맞다.

매 학기마다 평가가 이뤄지고 받은 점수에 따라 판사, 검사 임용과 유명 로펌으로의 진로가 정해지므로 경쟁은 매우 치열하다.

좀 더 나은 성적을 받기 위해 연수생들은 친분이 있는 사람들끼리 스터디 모임을 조직해 따로 시험을 준비하기도 했다.

고시생을 면했지만 아직까지 완전히 고시생 신분을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교수들이 강의실을 나가자 재혁의 주위로 연수생 몇몇이 모여들었다.


“재혁아! 너 누구랑 스터디하냐?”

“안 하는데.”

“우리랑 같이 할래?”

“됐어. 난 그냥 혼자 할래.”


그들의 간절한 눈빛을 뒤로 하고 재혁은 강의실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연수생들은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재혁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방금 내 눈앞에서 벌어진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고 싶어 그들을 훑어봤다.

그러자 그들 중 하나가 나의 궁금증을 해결해 줬다.


“재혁이가 이번 사법시험에서 차석을 했어요. 그래서 같이 스터디하려고 그런 거예요.”


김재혁이 차석이라고?

사법시험 2차 시험 마지막 날 다른 응시생들은 모르던 문제를 혼자서 알고 있더니 역시 범상치 않은 녀석이구나.

재혁의 뒷모습을 쫓던 그들이 흩어지고 나서야 나는 재혁이 사라진 쪽을 새삼 돌아보았다.


***


사법연수생의 분포는 피라미드 구조로 되어 있다.

먼저 나이는 20대 중반의 젊은 연수생이 가장 많고, 한 살 한 살 많아질수록 그 수가 줄어 40대 초반이나 중반까지 분포한다.

다음으로 대학의 지명도로 따지면 반대로 대한민국의 가장 명문대인 서울대 출신이 가장 많고, 거의 대학 서열 순으로 줄어드는 구조이다.

그러다 보니 사법연수원에서 가장 주류는 서울대 출신의 어린 연수생이 된다.

교수들의 기대도 크고, 다른 연수생들도 이들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김재혁은 그런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하고 있었다.


재혁은 학기 초부터 자신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다른 연수생들이 모르는 심오한 법률이론부터 판례까지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꿰고 있었다.

심지어 교수들조차 모르고 있던 판례를 근거로 제시하면서 교수들을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교수들은 이런 재혁을 좋아하면서도 다른 연수생들 앞에서는 괜히 /재혁을 디스하는 척 까내리기도 했다.

객관식으로만 치러진 1학기 중간고사에서 재혁은 연수생들 중 유일하게 만점을 받았다.

주요 과목을 치르지 않은 전초전 같은 시험이기는 했지만, 교수들은 재혁을 보며 흐뭇해 했고, 연수생들은 그를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정작 재혁 본인은 이런 시선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듯 공부에 열중했다.


“재혁아. 너는 어쩜 그렇게 공부를 잘하냐?”

“잘하긴요. 운이 좋았죠.”


재혁은 내 질문에 피식 웃으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처음 녀석과 인사했을 때만 해도 데면데면한 사이였지만, 여러 번 회식을 하고 체육대회를 같이 치르는 동안 우리는 나름 친해졌다.

강의실에서 옆에 앉는 사이라는 것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친해질 수 있는 조건이 된 것 같았다.

녀석에게 이것저것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내 성적은 줄곧 중상위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대로만 가면 판사는 몰라도 검사는 충분히 임용될 수 있는 성적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난 며칠 후 민사 모의 재판이 열렸다.

민사 모의 사례를 주고 각각 원고와 피고 측 변호인이 되어 재판을 해 보는 것이다.

각 조별로 진행되는데, 재혁은 원고 측 변호인이 되었고, 나는 변호인을 맡지는 않았지만 피고 측이었다.


모의 사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① A가 거래처 B에 7년 전 1억 원의 대여금을 빌려 줌.

② A는 대여금을 지급한 1년 후 B의 부동산을 가압류하고, 가압류한 6개월 후 B의 부동산 소유권을 이전 받음.

③ 하지만, A의 가압류 이전부터 근저당권을 갖고 있던 C가 경매를 신청하여 부동산은 다른 사람에게 이전된 상황.


이 상황에서 A가 대여금 1억 원을 B로부터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이 모의 사례는 여러 가지 쟁점이 포함되어 있었다.

원고 측 변호사로 나선 재혁은 일단 아주 간단한 주장을 펼쳤다.


“대여금은 소멸시효가 10년이므로 B가 대여금 1억 원을 변제해야 합니다.”

“이 사례에서 쌍방 모두 상인이므로 상사시효가 적용되고 결국 5년의 단기 소멸시효가 적용되므로 이미 소멸시효가 완성되었습니다.”


재혁의 주장에 우리 측 변호사가 반론을 펼쳤다.

여기까지는 연수생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쟁점이었다.

재혁이 슬슬 본론으로 돌입했다.


“B의 부동산에 A가 가압류를 하였기 때문에 시효는 중단되었고, 소멸시효는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가압류는 시효중단 사유기 때문에 가압류가 존재하는 동안 소멸시효는 진행되지 않는다.

재혁의 주장에 우리 측 변호사가 한동안 고민하다 입을 열기 시작했다.


“가압류가 있었지만 6개월 후 A가 부동산의 소유권을 이전받았기 때문에 혼동으로 가압류가 소멸되었으므로 이후 시효중단의 효력은 인정될 수 없습니다.”


혼동이란 채권과 채무가 동일인에게 속하면 채권이 소멸한다는 규정이다.

이 사례에서 부동산에 가압류 채권을 갖고 있던 A가 부동산의 소유권을 이전받았으니 혼동으로 소멸한다는 주장.


‘맞네. 혼동. 더 이상은 주장할 게 없겠는데···.’


더 이상 어떤 수가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 재혁을 쳐다봤다.

하지만 재혁은 뭔가 걸리는 게 있는지 오른손으로 펜을 돌리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깊은 정적이 강의실에 감돌고 민사재판 실무 서종규 교수가 막 끼어들려는 찰나 재혁이 입을 열었다.


“부동산 가압류 채권자가 부동산의 소유권을 이전받는다고 해도 채권과 채무가 동일한 자에게 속한다고 볼 수 없어서 혼동으로 가압류가 소멸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부동산등기부등본을 보면 가압류 이후 국세 압류 등기가 되어 있으므로 더더욱 가압류가 소멸될 수 없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연수생들이 모의 자료를 뒤적거렸다.

재혁의 말대로 부동산등기부등본에 국세 압류 등기가 되어 있었다.

제3자의 목적이 된 경우 채권이 혼동으로 소멸하지 않는다는 민법 507조 단서의 규정이 눈앞에 떠올랐다.


‘재혁의 주장에 분명 문제가 있어. 국세 압류 등기가 뒤에 되어 있더라도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뭔가 찜찜한 느낌에 재혁의 주장을 반박할 근거를 찾느라 고심했다.

순간 재혁을 보고 있던 내 귀에 재혁의 마음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 가압류와 국세의 우선순위가 어떻게 결정되더라? 으··· 기억이 안 나!! >


평온하기만 한 재혁의 얼굴과 달리 그의 마음은 초조함으로 가득했다.

나는 재빨리 민사집행법 교재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국세와 가압류의 우선순위를 찾기 시작했다.


“자. 김재혁 연수생의 주장에 대해서 반박할 사람 있나?”


서종규 교수가 피고 측 연수생들을 보며 물었다.

서 교수가 연수생 하나 하나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연수생들은 그의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마침내 서 교수가 모의 재판을 마치려던 순간 내가 번쩍 손을 들며 말했다.


“제가 김재혁 연수생의 주장을 반박해 보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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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012. 하찮은 사건은 없다 +2 23.09.20 2,386 27 12쪽
11 011. 첫 사건 (2) +4 23.09.19 2,402 32 12쪽
10 010. 첫 사건 (1) +4 23.09.18 2,430 29 12쪽
9 009. 개업 +3 23.09.17 2,453 33 12쪽
8 008. 검찰 실무 수습 (3) +4 23.09.16 2,429 37 12쪽
7 007. 검찰 실무 수습 (2) +2 23.09.15 2,469 33 12쪽
6 006. 검찰 실무 수습 (1) +3 23.09.14 2,682 37 12쪽
5 005. 사법연수원 (3) +5 23.09.13 2,785 36 12쪽
4 004. 사법연수원 (2) +2 23.09.12 2,917 39 12쪽
» 003. 사법연수원 (1) +2 23.09.11 3,205 42 12쪽
2 002. 내 이름은 김일목 +6 23.09.11 3,419 46 12쪽
1 001. 내가 누구냐고? +3 23.09.11 4,380 5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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