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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읽는 변호사가 세상을 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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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테일
작품등록일 :
2023.09.06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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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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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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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004. 사법연수원 (2)

DUMMY

“그··· 그래? 김일목 연수생. 한번 말해 봐.”


서종규 교수가 놀랐는지 말을 살짝 더듬었다.

연수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렸는데, 특히 재혁이 뚫어져라 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고 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압류 이후 국세 압류 등기가 있지만 가압류 채권과 우선순위는 국세의 성립 시기와 비교하여 결정되므로 이 사건에서는 국세의 성립 시기가 가압류 채권보다 앞선다고 보아야 합니다. 결국 혼동의 예외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가압류는 혼동으로 소멸되어야 합니다.”


내 말이 끝난 후 10초 정도 강의실에 정적이 흘렀다.

연수생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와 서종규 교수를 번갈아 쳐다봤고, 재혁은 고개를 떨궜다.

표정의 변화가 없던 서 교수가 밝게 웃으며 연수생들을 향해 말했다.


“와! 정말 대단한 모의재판입니다. 교수들이 굉장히 심혈을 기울여 만든 모의 사례를 완벽하게 맞췄어요. 김일목 연수생이 말한 것처럼 가압류와 국세의 우선순위는 국세 압류일이 아니라 국세의 성립 시기를 기준으로 합니다. 그래서 이 사례에서는 혼동의 예외로 보기 어렵습니다. 실제 재판에서는 어떻게 적용될지 모르지만 아주 잘했습니다.”


서 교수가 박수를 치자 연수생들이 ‘오오’ 소리를 내며 따라서 박수를 쳤다.

재혁만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박수를 치고 있었다.

박수 소리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서 교수가 나에게 물었다.


“김일목. 가압류하고 국세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하는지 어떻게 알았냐?”

“아··· 그건···”

“아직 배우지도 않았을 텐데 어떻게 안 거지? 어서 말해 봐!”

“그게··· 저희 아버지가 장사 하시다가 부가세를 못 내신 적이 있는데··· 그때 경매가 들어가서 경험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방금 전 재혁의 마음을 읽고 책을 찾아 봐서 알게 된 것이기는 하지만, 아버지가 장사를 하다가 부가세 체납됐던 것도 사실은 사실이니까.

내 말을 들은 서 교수는 의외의 대답에 당황하며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서 교수를 보고 있던 연수생들 또한 내 대답을 듣고는.. 키득거렸다.

내가 자기들을 웃기기 위해 일부러 얘기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연수생들과는 달리 재혁은 모의재판을 마칠 때까지 심각한 얼굴을 풀지 않고 있었다.


***


“형.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민사 모의재판이 끝난 며칠 후 재혁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밑도 끝도 없는 뜬금포.


“뭘?”

“모의재판 말이에요.”

“모의재판? 그거 지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그걸···.”


모의재판 때 재혁의 심각했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날 재혁이 굉장히 분해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며칠이 지났는데도 잊지 않고 있다니 새삼 놀라웠다.


“저도 그때 그 생각 했었거든요. 가압류 국세 우선순위 그게 기억이 안 나서 말하고 나서 아차 싶었는데, 형이 그걸 지적해서 정말 놀랐어요..”


재혁이 나를 존경스런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연수원 생활을 하면서 녀석에게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눈빛.

나는 이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재혁아. 내가 시험 괜히 늦게 된 줄 아냐. 풍파가 말도 못 했다. 세상은 말이야.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만만한 게 아니야.”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형은······”


재혁의 눈에 담겨 있는 존경의 레벨이 더욱 상승했다.

나는 녀석의 시선을 최대한 즐기며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하자. 우리 둘이 머리를 맞대면 못할 일이 뭐 있겠냐. 하하하!!!”


이건 뭐 말도 안 되는 B급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재혁은 상황에 취해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했다.


“알았어. 형. 앞으로도 잘 지내자.”

“그래. 나는 바빠서 이만 가 볼게.”


물론 바쁜 일은 없었다.

더 이상 이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뿐.

그렇게 우리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다.


***


한 학기를 보낸 연수생들은 크게 둘로 나뉜다.

판·검사 임용이나 주요 로펌에 컨펌이 가능한 사람.

그리고 임용이나 주요 로펌에 가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로.

전자의 경우 더욱 공부에 집중해 등수를 올리고자 하고, 후자의 경우 적당히 즐기면서 수료 후 진로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나는 검사 임용이 가능한 정도의 성적이기에 오랜 수험생활로 억눌린 심신을 달래고자 적당히 즐기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내게는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도 있었다.


그 숙제는 바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는 능력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

두 번의 결정적인 순간에 재혁의 마음을 읽음으로써 나에게 유리한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그 두 번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읽느냐 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재혁 외 다른 사람의 마음이 전혀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간간히 다른 사람의 마음이 들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재혁의 경우처럼 완벽하게 문장으로 구사되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뚝 끊기기도 하고, 막상 들으려고 의식하다 보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 내가 타인의 마음을 읽지 못해서 그러는 것인지 아니면 그 사람이 마음속으로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은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2학기가 시작하자마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나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 뿐 전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아주 우연한 기회에 문제 해결의 기회가 찾아왔다.


2학기 중간 평가가 끝난 어느 날.

강의를 들으러 사법연수원으로 가던 길에 재혁을 만났다.

재혁은 나를 보자마자 대뜸 물었다.


“형. 나랑 모의 배심재판 보러 가실래요?”


배심재판이라면 미국에서 배심원을 두고 하는 재판을 의미했다.

주로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교수들을 중심으로 배심제 도입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도입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배심재판? 우리나라는 배심재판을 안 하잖아.”

“요즘에 배심제 도입을 주장하는 교수들이 많잖아요. 특히 세연대 이윤후 교수가 엄청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 같던데···.”


세연대는 나의 모교였다.

이윤후 교수는 내가 대학 졸업반일 때 교수로 임용됐었다.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갓 귀국해 심하게 혀를 굴리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생각에 잠겨 말을 하지 않는 나를 보다가 다시 재혁이 말을 이었다.


“참. 형 세연대 나오셨잖아요?”

“어. 맞아.”

“이윤후 교수님 잘 아시겠네요.”

“얼굴만 알지 한 마디도 안 해봤어.”


이윤후 교수가 가르친 과목은 영미법 개론이었다.

당시 법학과 학생들은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이 교수가 가르치는 과목을 신청하는 학생은 소수였다.

나는 그 소수 중 하나였지만 미국 본토 발음을 지나치게 구사하는 이 교수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강의를 설렁설렁 들었고, 그 대가는 ‘C’라는 학점으로 돌아왔었다.

나에게 이 교수에 대한 기억은 그것뿐이었다.


“바로 옆 고양지원 대법정에서 한데요.”

“나는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이 교수에 대한 안 좋은 기억 때문에 재혁의 제안이 꺼려졌다.

하지만, 불굴의 의지를 가진 녀석은 내가 갈 수밖에 없는 미끼를 던졌다.


“형. 주은혜도 온대요.”

“무어··· 주은혜가?”


34기 연수생 중 군계일학, 단연 최고의 미녀였다.

연수생이라는 집단으로 한정하지 않고, 대한민국 전체로 범위를 넓혀도 주은혜는 대단한 미녀였다.

그녀는 미스코리아 본선에서 입상까지 한 경력이 있었고, 사법시험을 합격했을 때 신문에 기사까지 났었다.

그녀가 모의 배심재판에 온다는 것은 이 교수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을 덮어 버리기 충분한 일이었다.


“그래도 안 가실래요?”

“네가 정 그렇게 원한다면 가 볼까.”


재혁은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고, 나는 황급히 강의실로 들어갔다.

책상에 앉아서 교재를 펴는데, 주은혜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


토요일임에도 불구하고 고양지원 대강당에는 사람들이 가득 들어찼다.

주최 측인 세연대 학생들은 물론이고 평소 배심제 도입에 찬성하는 교수와 법조인, 기회다 싶어 얼굴을 내비치려는 정치인, 취재를 하려는 기자, 그리고 재혁과 나 같은 연수생들까지.

그리고, 법정에는 재혁의 말처럼 주은혜도 와 있었다.

방청석 중간에 앉은 그녀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처럼 번쩍번쩍 빛이 났다.

남자들은 입을 헤 벌리며 그녀를 흘끔거렸고, 여자들은 질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돌아봤다.


“주은혜가 그렇게 좋은가?”


재혁은 무심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다들 좋아하잖아. 너는 안 좋냐?”

“예쁘기는 하죠. 그래도 난 그 정도는 아니던데.”

“각자 좋아하는 스타일이 다르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그래도 주은혜 정도면 대다수 남자들이 좋아할 만한 자격이 있지.”


내 말에 재혁은 이해를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제로 본 주은혜는 예쁜 외모였지만 소문처럼 ‘경국지색’급은 아니었기에 재혁의 반응이 완전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주은혜로 인한 작은 소란은 이윤후 교수가 재판장석에 앉으면서 사라졌다.


“토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자리를 빛내 주신 옥주환 자유대한당 국회의원님 이하 내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먼저 옥주환 의원님의 축사를 듣고 모의재판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옥주환 자유대한당 의원은 대한민국 보수의 떠오르는 신성(新星)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차기 자유대한당 대표와 대권의 유력주자 중 가장 유력한 인물이었다.


“안녕하세요. 자유대한당 옥주환 의원입니다. 오늘 이렇게 모의 배심재판에 참여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 대한민국 사법부도 더욱 알차고 충실하게 재판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


유력한 정치인답게 옥주환 의원은 노련하게 연설을 끝낸 뒤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하지만, 그는 다음 순서로 넘어가자 수행원들과 함께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법정을 빠져나가기 전 나는 우연히 그와 눈이 마주쳤는데, 뭔가 알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는지 법정을 나가는 내내 그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전에 본 것과 같은 기시감과 함께 끈끈한 유대감 같은 느낌.

하지만, 그와 나는 이전에 만난 적도, 잠깐 마주친 적도 없는 완벽하게 모르는 사이였다.

그런 이상한 감정은 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까지 나를 괴롭혔다.


“이제 재판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배심원으로 수고해 주실 분들을 호명하겠습니다.”


이윤후 교수가 방청객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바구니에서 꺼내 호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두 명이 배심원으로 지명되었다.


“······ 주은혜, 그리고, 마지막으로 김재혁씨가 배심원으로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얼떨결에 지명받은 재혁이 배심원석으로 걸어 나갔고, 먼저 배심원석에 앉아 있던 주은혜가 재혁을 보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녀석은 정말로 주은혜에게 관심이 없었는지 덤덤한 얼굴로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이윤후 교수가 방청석을 향해 소리쳤다.


“오늘 재판의 주제는 이태원 살인 사건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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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011. 첫 사건 (2) +4 23.09.19 2,403 32 12쪽
10 010. 첫 사건 (1) +4 23.09.18 2,430 29 12쪽
9 009. 개업 +3 23.09.17 2,453 33 12쪽
8 008. 검찰 실무 수습 (3) +4 23.09.16 2,429 37 12쪽
7 007. 검찰 실무 수습 (2) +2 23.09.15 2,469 33 12쪽
6 006. 검찰 실무 수습 (1) +3 23.09.14 2,682 37 12쪽
5 005. 사법연수원 (3) +5 23.09.13 2,785 36 12쪽
» 004. 사법연수원 (2) +2 23.09.12 2,918 39 12쪽
3 003. 사법연수원 (1) +2 23.09.11 3,205 42 12쪽
2 002. 내 이름은 김일목 +6 23.09.11 3,420 46 12쪽
1 001. 내가 누구냐고? +3 23.09.11 4,380 54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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