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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온실 공주님의, 북부에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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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작은별
작품등록일 :
2024.01.16 10:26
최근연재일 :
2024.02.15 23:00
연재수 :
2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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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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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글자수 :
126,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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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30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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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두 번 다시 내 눈에 띄지 마

DUMMY

깨달았을 때는 이미 입술이 맞닿아있었다. 입술에 와닿은 생경한 감촉에 몸이 굳었다. 


짧은 순간 수십가지의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 너는 사랑같은거 하지 말거라 에스트렐라

- 정식으로 교제할 마음은 없지만 놓치기는 싫을때

- 돌아가셔야죠. 

- 대답하고싶지 않습니다. 

- 루나... 너도 나를 거절하는 거냐? 


온갖 생각이 뒤섞인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그를 밀쳤다. 


 “하아, 하아...” 


 “이게... 무슨 짓이죠, 시엘로 알베르토 백작?” 


당황이 가라앉고 나자 명백한 사실관계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는, 좋아하냐는 물음에는 답하지 않았고.

그 상태로 내 몸을 취하려 했다.


수도에서 마음 없이 몸을 주는 여자는 단 한 종류밖에 없다. 


창녀.  


뭐라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점차 치밀어올랐다. 수치심. 놀람. 서러움. 모든 것이 뒤섞인 그 감정은 종내에 분노의 형태를 띄었다. 서릿발같은 분노가 이성을 잠식한다. 


 “내가 그리 가벼워보였던가.” 


너는 다를 줄 알았는데. 


 “일국의 공주에게, 감히.” 


왜 니가 상처받은 것처럼 나를 봐? 

상처받은건 나야. 


 “제가.. 착각했나봅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길.” 


착각? 


짧은 순간이지만 오빠에게 소개할 생각까지 하고 있던 스스로가 천하에 둘도 없을 바보처럼 느껴졌다. 

제시는 가벼운 마음일거라고, 쉽게 마음 주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그가 언젠가 답하겠다던 예쁜 날을 기다렸다. 

그러면 오빠를 설득해서 약혼을 하고, 혼인을 하고, 더 깊은 관계까지도 맺으려 했는데 


너에게 나는 그저, 쉽게 꺾일 꽃이었구나. 



루이스처럼. 



마지막 한줄기 남은 이성으로 목구멍까지 올라온 울분을 참아냈다. 


나는 대신 명령했다.

 

 “두번 다시 내 눈에 띄지 마.”

 

.

.

.

 

 

기분이 심란하다고 해서 일이 줄어들진 않는다. 그날 이후 시엘로와의 교류는 완전히라고 해도 좋을만큼 끊겼다. 함께 상의해서 문제를 처리하는 일도 없었고, 간혹 업무적으로 꼭 필요한 일은 서류를 통했다.


어쩌다 복도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는 예법에 맞게 깊숙히 인사만 했다. 본인이 피해자인척 상처받은 얼굴이라 그게 더 부아가 치밀었다. 


 화가 나서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고 싶었다가도, 비어있는 옆자리의 책상을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허해지는, 그런 기분이었다. 


 성안의 분위기는 삭막하게 얼어붙었고,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저조한 기분으로 업무를 처리해나갔다. 군대에 편입된 이리스족의 정착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이모님을 찾은 것도 그 일환이었다.



“너 무슨 일이 있군?” 


솔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예리하게 물었다. 


 “아무 일 없어요.”


 “그 녀석 관련된 문제냐? 그 회색머리녀석.”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나는 숨겨도 소용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일이지?”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실토했다.  며칠째 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내게는 상담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최소한 들어줄 사람이라도. 그동안 나는 시엘로와의 일을 차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나는 최대한 차분하려고 노력하며 이모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분기탱천하여 당장 찢어죽이겠다고 하면 어떻게 말려야하나 고민했는데, 이야기를 들은이모는 뜻밖에 재미있다는 기색이었다. 


 “그러니까 요는, 남편도 아니고 약혼자도 아니고 하다못해 정식으로 교제하는 사이도 아닌데, 그 회색머리 자식이 너한테 주둥이부터 들이밀었다는 거지?” 


 “네에···. 요약하자면 그렇죠.” 


 “그래서 너는 며칠째 이모양 이지경인거고?” 


 “말하자면···맞아요.” 


거기까지 말을 들은 그녀는 큭큭 웃었다. 


 “이모 저 심각해요.” 


 “아아, 미안미안. 미안하구나. 그저, 루나가 처음 루이스 그 개자식을 만났을 때가 떠올라서.” 


 “네?” 


엄마의 이야기가 나오자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했다. 


 “루나도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 남녀가 바뀐건 달랐다만.” 


 “네?!?!?!!”


 “아, 첫만남이었다는 것도 달랐구나.” 


그러니까 우리 엄마가, 루이스를 처음 만났을 때 다짜고짜 입맞춤부터 했다고···? 


내가 뭘 들은거지···.?


나는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그런 나를 두고 솔라는 배를 잡고 웃었다. 



.

.

.


한참 웃고 난 솔라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여기는 순서가 중부와 반대란다. 이 곳에서는 관계의 시작이 스킨십이지. 중부에서는 관계의 끝이 스킨십인 것처럼.”


 “관계의 시작이 스킨십..?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스킨십을 해서 마음을 표현하고, 그렇게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함께 살고, 그러다가 이 사람이 내 영혼의 동반자라는 생각이 들면 그 때 하는게 고백이야.” 


어질어질했다. 


 “수도는.. 수도는 달라요...” 


 “알아. 중부는 훨씬 지지부진하지. 따져야 할 것도 많고. 뭐라더라···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데이트를 하고, 교제 신청을 하고, 사랑 고백을 하고, 약혼에 결혼에 온갖 허례허식을 한 다음 스킨십을 하지 않니? 북부와 중부의 문화 차이인 것 같구나.”


 최근 20년간 수도의 문화도 개방적으로 바뀌었다. 솔라가 알고 있는 것만큼 보수적이지는 않았다. 약혼을 한 사이에는 둘만의 시간도 암묵적으로 허용되니까. 


 하지만 그것조차 최근의 일이고, 기본적으로 수도는 결혼을 생각하지 않는 가벼운 관계에는 맨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 조차 실례였다.


 나는 이해해보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상식이 송두리째 뽑혀나가는 느낌이었다. 


어느정도냐면.. 어머니를 ‘야만인’이라 불렀던 수도의 귀족들이 아주 조금 이해가 될 정도로. 


어머니가 루이스를 처음 만난건 휴전을 제의하는 어느 연회였다고 들었다. 그 연회에서 무려 왕에게 먼저 입을 맞추었다면, 솔직히 말해서 죽지 않은게 용할 정도다. 아니? 그때 멸족을 당했어도 수도에서는 당연한 처사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갔을걸. 


 “어떻게 교제를 하지도 않는 사이에 스킨십을 할 수 있어요? 심지어 일국의 공주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고 예의도 갖추지 않고, 마음을 나누는 과정 없이 몸만 탐하는 관계?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어떻게 스킨십도 하지 않고 마음을 확인할 수 있지? 그 사람의 눈빛과 호흡 움직임 손길.. 그런 게 아니면 어떻게 이사람이 나를 원하는지 알 수 있느냔 말이다. 쉽게 생각하렴. 보다.. 직접적인 대화일 뿐이야. 더 솔직하고, 더 간절한 의사소통 방식일 뿐이라고. 텅 빈 말보다야 이쪽이 더 확실하지 않으냐?” 


 “문란해요.” 


 “고리타분하다.” 


나는 애써 이해하려 해보았다.


  “북부는 험해. 날도 춥고 몬스터의 침략도 많지. 먹을게 적다보니 사람들간의 전쟁도 흔해. 중부처럼 격식 따지고 예법 갖추고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뜻이다.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데. 오늘 최선을 다해야지. 그 녀석 요새 죽상을 하고 다니지 않든? 루나도 며칠째 방 안에 틀어박혀있었거든. 자기를 거절한 사람은 처음이라며.” 


그녀 말대로였다. 그녀의 설명대로라면, 그는 내게 좋아한다고 말하고 나는 그를 찬 셈이 되었다. 

머리로는 그녀의 말이 어렴풋이 이해갔다. 하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는건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 안다. 그게 바로 문화차이라는 거지. 너는 그녀석이 좋으냐?”


그를, 좋아하냐고?

그와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기분이 좋았다. 가끔씩은 마음이 간질간질 했던것 같기도 하다. 


그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한꺼번에 스쳐지나갔다. 


나를 보며 부드럽게 웃던 시엘로, 나를 꼼꼼하게 챙겨주던 시엘로, 밤새 곁을 지켜주던 시엘로. 도란도란 나누었던 대화들과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던 포근한 비누향까지도. 나는 자신없이 대답했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그 놈팽이가 네게 정식으로 고백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모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 심술궂게 웃었다. 


 “···....무척 기쁘고 설렜겠죠.”   


나는 인정했다. 


좋아하는구나. 


그를 좋아해. 좋아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쉽게 보는것 같아서, 나를 함부로 대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화가 났던거야. 


그래서 이모님의 말을 듣고 어느정도 마음이 풀린거다. 문화차이였다면, 나를 함부로 희롱하려 했던 건 아니라는 뜻이니까.  


 “개인적으로 나는 수도 놈들의 허례허식을 좋아하지 않아. 그 겉치레가 거창하다고 해서 수도의 귀족들이 이곳보다 더 정절을 지킨다고 할 수 있더냐?” 


당연히 아니었다.


늑대를 숭상하여 평생 단 한명의 반려만 들여 살아가는 이리스족과 달리, 정략혼이 성행하는 수도에서는 애인을 두거나 후처를 들이는 게 흠조차 되지 않았다.

어느 쪽이 더 배우자에게 신실하냐고 묻는다면 답은 정해져있었다. 


 “진심이 없으니 포장이 과한거야.”


 “마음이 있다면 형식은 중요하지 않고, 형식이 있다고 마음을 강제할 수는 없지. 그리고, 얘기 들어보니 좋아한다 말 빼고 다 한것 같더만. 그 말이 그렇게 중요하더냐?”


 “.. 제게는 중요해요.” 


어머니와 루이스의 관계를 보고 자란 내게는 더더욱. 


문화차이. 그건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다.


새장 속의 새처럼 하루하루 말라가던 어머니를 기억한다. 


일평생 함께할 반려를 찾았다며 가족들조차 등지고 수도에 왔는데, 루이스에게는 이미 왕비가 있었다. 크게 당황한 어머니는 북부로 돌아가려 했으나, 이미 루이스에게 잡힌 후였다. 내 기억속 어머니는 한평생 왕비에게 죄인이었다. 


 “어머니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어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 하고 되물었다. 


 “글쎄, 그건 내가 물어보고싶은데. 어때, 그 아이가 문화차이를 해결 한 것 같더냐?” 


 나는 그녀에게 답할 수 없었다. 정답은 아니다 였다. 중부에서 어머니가 어떻게 지냈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지, 그녀는 씁쓸하게 되뇌었다. 


 “너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렴. 같은 비극을 반복할 필요는 없지 않니.” 


.

.

.



이모의 말이 옳았다. 어머니는 야만족으로 치부받으며 평생을 수치속에 살다 갔다. 수도에 온 것을 후회했고 끝내 북부를 그리워하며 죽었다. 결국 불행해질것이다. 


나는 상처받고싶지 않았다. 눈에 빤히 보이는 가시밭길을 걸어가고 싶지 않았다. 


비겁하지만, 그래서 그에게 더이상 마음을 주지 않기로 했다. 


조용히 일만 하자. 


조용히 머물다가 조용히 돌아가자. 그렇게 몇번이나 다짐했다 .


그 계획은 꽤 잘 지켜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좁은 성 안에서 그를 영원히 피할 수는 없었다.



“수도와의 연락이 끊겼어요.”


제시가 수심에 가득찬 얼굴로 보고했다. 


 “뭐?”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전서구가 벌써 사흘 전이에요. 수도쪽 동료에게 각각 세 마리째 전서조를 날렸는데도 답신이 없는걸 보면, 아무래도 무슨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갈까마귀는 에스테반의 권력과 미카엘의 재력으로 움직이는 왕국 최고의 정보집단이다. 

전국 곳곳에 퍼진 정보원들끼리 갈까마귀를 이용해 정보를 교류하기때문에, 가장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 갈까마귀 내에서도 상당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제시가 아무 연락을 받지 못한다는건, 심각한 일이었다. 


가장 최근에 받은 연락을 떠올렸다. 


비앙카 비는 자결하고, 시온만 남았다고.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제시. 수도에 가서 직접 상황을 알아봐줘. 네가 가장 믿음직하구나. 혹시 필요하다면 자의적인 판단으로 수도에 체류하는 것을 허한다.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몇가지를 더 지시했다. 

그녀위 표정이 심각해졌다.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두어서 나쁠건 없겠지.” 


 “분부대로.” 


나는 심호흡을 하고 오랜만에 옷을 갖추어입었다.

시엘로를 대면할 때였다.


작가의말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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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뭐긴, 반격 시작이다 24.02.13 58 0 12쪽
19 가지 마십시오. 제발 24.02.01 40 0 12쪽
18 항전한다 24.01.31 28 0 12쪽
» 두 번 다시 내 눈에 띄지 마 24.01.30 98 0 12쪽
16 그렇게 웃으시니 꼭 별(estrella) 같아서 24.01.29 63 0 13쪽
15 내 얘기는 절대 아니고 내 친구 얘긴데... 24.01.29 52 0 13쪽
14 나를 좋아해요? 24.01.28 82 0 12쪽
13 들키기 전에 돌아오면 되지 24.01.27 27 0 11쪽
12 폭동 24.01.26 63 0 12쪽
11 형편없는 환자 무서운 의사 24.01.25 30 0 12쪽
10 협상을 시작하지 24.01.24 64 0 12쪽
9 하면, 이 자리에서 저를 죽이세요 24.01.23 71 0 12쪽
8 어떻게든 살아만계십시오 24.01.22 58 0 13쪽
7 해야 하는 일, 할 수 있는 일 24.01.21 77 1 12쪽
6 가장 깊은 악몽 24.01.20 53 1 12쪽
5 늑대 일족의 습격 +1 24.01.19 72 3 12쪽
4 무엇을 하실 수 있습니까? 24.01.18 76 3 12쪽
3 한겨울에 찬물 목욕 24.01.17 90 3 11쪽
2 쥐고기를... 먹으라고...? 24.01.16 87 2 11쪽
1 프롤로그 +1 24.01.16 159 3 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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