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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벽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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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okkoma
작품등록일 :
2023.11.21 15:32
최근연재일 :
2024.01.31 19:00
연재수 :
222 회
조회수 :
7,144
추천수 :
253
글자수 :
1,186,938

작성
23.12.19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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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챕터8-134. 전생- 전생의 기억 (3)

DUMMY

계순과 상순은 동네 빨래터로 쓰이는 냇가를 지나고 저수지 둑길을 지나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작은 산들까지 건너 어느새 어미산에 도착했다.


계순은 바람이 드세지 않고 양지쪽이라 햇빛이 잘 드는 묏등으로 향했다. 분명 그곳에 쑥이 지천으로 숨겨져 있으리라 생각하며 계순은 환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계순이 칼과 바구니를 든 채, 아무리 양지 쪽을 훑어봐도 쑥은 커녕 쑥 같은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뽕나무 밑에 우북우북 자라있는 달래, 냉이 뿐이었다.


계순은 아버지가 봄에 처음 나오는 쑥으로 쑥국으로 끓여먹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나마 밥이 없을 땐, 쑥버무래기를 먹는 것조차 얼마나 행복해 하시던가.


계순은 아버지를 위해 눈에 불을 키고, 봄쑥을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상순 언니 역시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을까, 쑥을 찾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계순이 살며시 웃으며 언니를 부르려는 순간 갑자기 자신의 등뒤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덮쳤다.


계순은 점점 숨이 가빠오는 느낌에 비명을 지르려했지만 두 손으로 강하게 계순의 입을 틀어막은 낯선 침입자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더욱이 서늘한 무언가가 목에 와 닿았을 때 계순은 움찔 놀랐다. 그것은 분명 칼이었다.


“육시랄 아바즈레! 조용히 해! 칼날이 날카롭다."


음산하고 낮게 들리는 서툰 목소리는 일본인의 것이었다.


더군다나 여자를 낮잡아 부르는 비속한 일본어와 한국말이 뒤섞인 어눌한 말투는 계순의 온몸에 소름을 돋게 만들었다.


겁에 질려 고개를 끄덕인 그녀의 손과 발을 포박하고 가뿐히 등에 들쳐 업은 그는 조심스럽게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계순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금 자신을 납치하는 일본인의 위협이 너무나도 무서워서 전신이 마비될 것 같은 공포심에 휩싸여버렸다.



***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계순은 차디찬 동굴 바닥에 눕혀져 있었다.


계순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올려 자신을 납치한 사람의 얼굴을 보려했지만 어둠 속이라 그런지 잘 보이지 않았다.


계순의 두 눈이 이윽고 어둠에 익숙해지자 자신을 납치한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탄광의 감찰 관리인인 일본인 '세이지'였다.


온몸이 욱씬거리도록 아팠고, 양손을 포함해 발목까지 포박 당한 계순은 팔다리를 꼼짝할 수 없었다.


“네 년이 이 마을에서 그렇게나 유명하다던 년이야? 진짜 남자 새끼 홀릴 만큼 반반하구만. 근본이 글러먹었으니 사내 새끼나 홀리고 살지.”


계순은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세이지의 거친 손이 계순의 얼굴을 잡고 이리저리 돌리며 자세히 살폈다.


“이 년아! 네 동포들은 전쟁터에 끌려가서 총알받이에 밑받이까지 하는데 넌 뭐하나 없는 집안 식구들을 위해 몸이라도 파는 게 어때?"


비열하게 웃으며 입가에 혀를 날름거리는 세이지는 계순을 향해 침을 내뱉으며 말했다.


계순은 평생을 살면서 얼굴에 침 맞을 일이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했다.


비열하게 웃으며 이런 모욕을 당하는 지금 상황은 놀랍고도 비참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무서웠다.


계순이 지금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원돈'이었다.


계순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러나왔다.


계순에게 원돈은 오랜 친구이자 그녀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원돈은 그녀에게 있어 때왈나무를 알려주는 존재였다.


산딸기가 열리는 때왈나무가 어디 있는지는 자신의 가장 절친에게만 알려주는 것이었다. 원돈은 그녀에게 자신이 땔감을 떼러 나무를 베러가면서 발견한 때왈나무가 있는 장소를 매번 알려주었다. 계순 역시 원돈과 같은 마음이었다.


계순과 원돈은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다.


세이지가 눈물범벅이 된 계순의 얼굴을 거칠게 쥐고선, 그의 바지를 내리려 허리에 찬 벨트를 푸르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세이지가 ‘헉’소리를 내고 그대로 계순의 몸 위로 쓰러졌다.


놀란 계순이 세이지를 바라보았지만 옴싹달싹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누군가가 거칠게 세이지를 밀쳐내고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계순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의 언니 상순이 날카로운 돌덩어리를 가지고 세이지의 등 뒤에 서있는 모습이었다.


상순이 들고 있는 커다란 돌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고, 세이지의 눈은 하얗게 뒤집혀져 입에는 개거품을 물며 의식을 잃은 것만 같았다.


“어..어...언니!”


계순이 왈칵 눈물을 쏟아내자 상순이 재빨리 계순의 팔과 다리에 묶인 노끈을 풀고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일단 나가자! 나가야 해!”


상순은 재빨리 세이지의 눈을 뒤집어 까보고, 콧구멍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확인했다.


“죽었어! 얼른 가야 해!”


그녀의 말에 계순은 상순의 손에 이끌려 동굴 밖을 막 나가려고 했다.


그녀들이 등을 돌려 동굴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몸을 반쯤 일으킨 세이지가 상순의 발목을 낚아챘다.


“으악!”


깜짝 놀란 상순의 날카로운 비명이 동굴을 울려 퍼졌고, 상순은 계순을 향해 소리쳤다.


“도망가! 도망가서 아버지랑 마을 사람들을 불러!”


언니 상순의 말에 계순을 정신없이 동굴 밖을 달려 마을로 뛰어갔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초계댁 아주머니를 만난 계순을 그녀에게 어미산의 동굴로 가야 한다는 소리만 내지른 채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고야 말았다.



***



반나절 뒤에 어둠이 짙게 내린 밤이 돼서야 정신이 돌아온 계순이었다. 하지만 계순은 자신의 하나 뿐인 언니 상순이 일본인들에게 무참히 도륙당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대로 또다시 혼절했다.


일어났다 기절했다를 반복한 지 이틀 째 되던 날, 그의 아버지 강식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평온한 얼굴로 탄광 일을 하러 장비를 챙겨 집을 나섰다.


계순 자신이 의식을 잃고 기절해 있던 이틀동안 상순 언니의 시신은 무덤도 없이 화장을 해 장례를 치렀다고 했다.


계순은 자신의 뺨을 연거푸 내리쳤다.


스스로 자해하다시피 연신 스스로 뺨을 후려갈리며 얼굴이 새빨개진 계순은 입술을 앙다물고 결심했다. 남은 가족만큼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키기로 말이다.


하염없이 울고만 있는 할머니와 경호를 책임지기 위해 계순은 미친 듯이 바느질일과 탄광마을 내 허드렛일을 하면서 상순 언니의 죽음을 잊으려 애썼다.


이제 산속에 나물을 캐거나, 땔감을 주우러 갈 때면 계순은 작은 은장도를 품에 넣고 절대로 방심하지 않았다.


또 다시 무기력하게 당할 수만은 없었다.


계순은 자신이 강해져야한다고 생각했다.


녹음이 짙어진 한 여름, 계순은 또다시 나물을 캐러 어미산으로 향했다.


그녀는 깊은 산속에서 나물들을 찾다가 이윽고 ‘끙끙’거리며 신음하는 낯선 목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계순이 조심스럽게 품속에서 꺼낸 은장도를 들고 다가간 곳에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 '소우타'가 있었다.


그 은장도는 아버지 강식이 자신에게 준 은장도였다.


계순이 손에 쥔 손잡이 부분에는 배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언제든 또다시 위기가 닥쳐오면 그 칼로 일본인이든 조선인이든 당하고만 있지 말라며 아버지가 직접 준 소중한 은장도였다.


아버지 강식은 은장도를 계순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었다.


- 꽃이야 지고 말면 그 뿐이다만... 이 은장도의 배꽃은 계속해서 널 지켜 줄게다. 소중히 품에 넣고 다녀라!


아버지가 자신에게 어떤 마음으로 은장도를 쥐어준 것인지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하고 있는 계순이었다.


계순은 자신이 은장도를 어떻게 휘두를지 몰랐지만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은장도를 앞으로 내민 채 소우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소우타는 '끙끙'거리고 신음소리를 내며 산속 한가운데 흙바닥에 누워있었는데, 그의 다리는 바지를 걷은 채 하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계순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의 다리를 보니 뱀에 물린 뱀 이빨 자국 두 개가 선명하게 보였다.


마침 여름 소나기가 한 줄금 훑고 지나가려는지 날이 어둑어둑해져 가고 있었다.


소우타가 입에 흰 거품을 물며 기침을 쿨럭이기 시작했다.


계순은 공포로 입과 머리가 굳어갔다.


문득 계순의 시선 저 너머로 때왈나무 하나가 요염하게 빛나고 있었다.


원돈이 일전에 계순에게 일러주었던 때왈나무 산딸기가 왜 하필 그곳에 있었을까.


계순은 잠시 그 붉은 산딸기를 쳐다보다가 자신의 발 아래 누워 고통스러워하는 일본인 남자를 쳐다보았다.


소우타가 물린 다리는 점점 퉁퉁 붓기 시작해 색이 보랏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계순은 망설일 수 없었다.


결국 계순은 자신의 오른손에 쥔 은장도로 소우타가 뱀에게 물린 자리를 조금 베어내고 자신의 입을 가져다 댔다.


계순은 허겁지겁 독을 빨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둘러 자신의 옷고름을 찢어 상처 조금 윗부분을 있는 힘껏 묶고, 주변에 보이는 방아잎을 짓이겨 상처 부위에 가져다 댔다.


소우타는 탄광마을을 쥐락펴락하는 아서그룹 회장의 외아들이었다.


분명 마을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은 마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으며 맹비난을 받을 것이다.


계순은 뱀에 물린 소우타를 모른 척 하고 산을 내려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계순은 멀찍이서 영롱하게 빛나는 때왈나무에 대롱대롱 맺힌 산딸기를 본 순간 소우타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 때 생각이 왜 하필 지금 나는 것일까.


계순은 자신의 옷이 하나둘씩 벗겨져 거의 전라가 되었음을 느끼며 자신의 눈앞에서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는 소우타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소우타의 탄탄한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그의 허리춤에 반쯤 걸쳐진 다후다 속옷은 반들반들 빛에 반짝이고 있었다.


처음 시작은 소우타의 강제적인 호출이었다.


폐광산으로 부른 그의 명령을 어겼다가는 마을에서 자신의 가족은 하루아침에 일본순사들의 칼에 목을 베이는 참수를 당할지도 몰랐다.


고민할 때마다 나오는 자신의 습관인 입술을 질겅이며 계순은 소우타를 구해준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소우타가 폐광산에 계순을 부른 것은 자신을 구해준 그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계순은 탄광마을에서 나고 자란 아이였다. 다른 지역은 커녕 옆마을도 가본 적 없는 탄광마을 촌뜨기 소녀였다.


계순은 지금껏 쌀같이 귀한 것이 세상에는 없는 줄 알았다. 귀하고 또 귀한 것이 쌀이었다.


곡식을 보관하는 도장방은 언제나 서늘했고, 단지에는 쌀보다는 고구마나 조, 보리 같은 것들이 들어있기 마련이었다.


그래서일까. 계순은 하루 삼시 세끼를 모두 쌀밥을 먹는다면,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나마 다른 집은 사정이 더 여의치 않았다. 고구마라도 있는 집조차 흔치 않았던 시절이었다.


계순은 밤새 바느질거리로 고생해 번 돈으로 고구마를 구해놓았다. 그렇게 안방 아랫목께 귀퉁이에 있는 고구마 뒤주가 고구마 몇 알로 차 있으면 천군만마라도 얻은 양, 계순의 마음은 든든했다.


맛없이 뭉실뭉실한 무같이 생긴 고구마를 쪄낼 수밖에 없는 계순은 할머니와 경호에게 그마저도 넉넉히 줄 수 없어 매번 눈물이 흘러나오곤 했던 계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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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챕터9-161. 화마 봉인- 탄광 속으로 (2) 24.01.01 19 2 12쪽
160 챕터9-160. 화마 봉인- 탄광 속으로 (1) 24.01.01 20 2 11쪽
159 챕터9-159. 화마 봉인- 불막이제의 진실 (2) 23.12.31 21 2 11쪽
158 챕터9-158. 화마 봉인- 불막이제의 진실 (1) 23.12.31 18 2 12쪽
157 챕터9-157. 화마 봉인- 각시탈의 전설 (3) 23.12.30 17 2 12쪽
156 챕터9-156. 화마 봉인- 각시탈의 전설 (2) 23.12.30 22 2 11쪽
155 챕터9-155. 화마 봉인- 각시탈의 전설 (1) 23.12.29 20 2 11쪽
154 챕터9-154. 화마 봉인- 함평 천지시장 (2) 23.12.29 18 2 11쪽
153 챕터9-153. 화마 봉인- 함평 천지시장 (1) 23.12.28 19 2 11쪽
152 챕터9-152. 화마 봉인- 양물단지 23.12.28 16 2 11쪽
151 챕터9-151. 화마 봉인- 초안산 내시들의 무덤 (2) 23.12.27 18 1 11쪽
150 챕터9-150. 화마 봉인- 초안산 내시들의 무덤 (1) 23.12.27 20 1 11쪽
149 챕터8-149(완). 전생- 이별의 기억 (4) 23.12.26 18 1 12쪽
148 챕터8-148. 전생- 이별의 기억 (3) 23.12.26 16 1 12쪽
147 챕터8-147. 전생- 이별의 기억 (2) 23.12.25 16 1 12쪽
146 챕터8-146. 전생- 이별의 기억 (1) 23.12.25 16 1 11쪽
145 챕터8-145. 전생- 거사의 기억 (3) 23.12.24 15 1 12쪽
144 챕터8-144. 전생- 거사의 기억 (2) 23.12.24 16 1 11쪽
143 챕터8-143. 전생- 거사의 기억 (1) 23.12.23 16 1 12쪽
142 챕터8-142. 전생- 유린의 기억 (3) 23.12.23 15 1 11쪽
141 챕터8-141. 전생- 유린의 기억 (2) 23.12.22 19 1 11쪽
140 챕터8-140. 전생- 유린의 기억 (1) 23.12.22 23 1 11쪽
139 챕터8-139. 전생- 철암 마을의 기억 (3) 23.12.21 19 1 11쪽
138 챕터8-138. 전생- 철암 마을의 기억 (2) 23.12.21 17 1 11쪽
137 챕터8-137. 전생- 철암 마을의 기억 (1) 23.12.20 17 1 12쪽
136 챕터8-136. 전생- 만주의 기억 (2) 23.12.20 17 1 11쪽
135 챕터8-135. 전생- 만주의 기억 (1) 23.12.19 19 1 11쪽
» 챕터8-134. 전생- 전생의 기억 (3) 23.12.19 25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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