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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수호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퓨전

함영(含英)
작품등록일 :
2013.12.07 04:07
최근연재일 :
2014.05.05 10:57
연재수 :
4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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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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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84,284

작성
14.04.10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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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15장. 비령서고

DUMMY

“벌써 점심 때 인가.”

혁진은 천보서고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식당으로 달려갔다. 때 마침 식사를 시작하고 있는 아현을 비롯한 조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현 소저!”

“추 소협!”

다른 조원들도 혁진을 반겼지만 아현은 혁진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숨이 찰 정도로 뛰어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혁진을 몇 번이나 살펴보았다.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신 거 에요?”

“네, 그럼요.”

“죄송해요. 진명각주께서 그렇게 강하고 무서운 분인 줄 알았다면 포기했을 텐데…. 일의 성패를 떠나서 추 소협께서 무사하신 것 같아 다행이에요.”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제 일이기도 했는걸요. 그래도 하늘이 도우셨어요. 우리, 있다 얘기해요.”

혁진의 말에 아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식사를 마친 혁진은 조원들과 함께 천보서고로 돌아왔다. 입구 쪽에 여러 사람들이 몰려 있기에 보니 천월화와 정유, 대규 등이 아닌가.

“무단으로 서고를 이탈하더니, 이게 무슨 꼴이냐.”

“죄송합니다.”

혁진은 천월화의 시선을 따라 바닥을 보았다. 거기에 진일이 인상을 찡그린 채 주저 앉아있었다. 신란은 진일을 반쯤 안 듯이 부축한 채 천월화를 향해 억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교관님, 이제 용서해주시지요. 진일이도 무슨 사정이 있지 않겠습니까.”

“사정? 그래, 당연히 있겠지. 너희들의 지위와 세가의 힘을 고려하여 사정을 봐준 것이 한 두 번이더냐?”

“그럼….”

“서고를 나가서 하루의 공부할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이야 이해한다. 너희는 이 곳이 처음이 아니니까. 하지만 다치고 오지는 말아야지. 이게 무슨 꼴이냐?”

천월화는 혀를 차며 피투성이가 된 진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애써 안쓰러운 기색을 감추더니 손을 내저었다.

“상태가 중하니 당분간 쉬도록 해. 너희가 진일을 데리고 내려가거라.”

“예, 교관님. 감사합니다.”

대규와 호관이 진일을 양쪽에서 부축해 올렸다. 신란은 자신에게 기대어 있던 진일이 아무 미련도 없이 떨어짐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고맙다는 말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도 자신을 한 번쯤은 쳐다봐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혹시나 자신을 돌아봐줄까 싶어 망연히 진일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그때.

진일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였다.

신란의 얼굴이 점점 기대와 환희로 가득한 웃음꽃이 만발하려던 찰나.

“아….”

진일의 시선이 왼쪽을 향했다가 그대로 앞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신란은 저도 모르게 왼쪽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진일을 보며 걱정스러운 빛을 담은 아현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가증스러운 것. 저 따위의 표정을 짓다니.’

으득-

이가 절로 갈렸다. 진일이 아현의 걱정스런 얼굴을 보고 기뻐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신란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쏟아져 흐르는 앞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옆에 서 있던 정유는 흠칫 놀라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신란의 몸에서 뿜어져 오는 살기, 투기 등이 이토록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드, 들어가시지요, 아가씨.”

천월화와 혁진네 조가 천보서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정유의 말에 신란은 쌀쌀맞은 눈으로 쏘아볼 뿐.

“네 놈이나 들어가.”

붉은 치맛자락이 펄럭이도록 땅을 박찬 신란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정유는 한 숨을 내쉬며 혁진의 조 뒤를 따라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천월화는 진일네 조에서 정유만이 들어오는 것을 보며 혁진에게 물었다.

“갔던 일은 잘 되었나?”

“예, 운이 좋았습니다.”

혁진이 담담하게 말한 것과는 달리 천월화의 눈은 찢어질 듯이 커졌다.

상대가 누군가. 경천군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청로군의 의제이자 진법의 대가다. 그 괴물 같은 노인네에게 비령서고의 열쇠를 받아왔다고?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무위관의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것을 이 젊은 청년이 해내었다. 천월화는 몇 번이고 속으로 감탄하며 혁진을 다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티내지 않고 혁진의 어깨를 툭 쳐줄 뿐.

“그 안에 원하는 게 있었으면 좋겠군.”

천월화는 혁진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무심코 천보서고를 나가려다가 입구 앞에서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서 기다렸다가 혁진이 나오면 비령서고의 안에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자 하나를 빼내어 기대어 앉아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혁진은 천월화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채, 품에서 검은 수정을 꺼내들었다.

“이거에요. 진명각주님께 얻어온 비령서고의 열쇠.”

“그런 게 열쇠라니…정말 괜찮을 까요…?”

“네, 소저는 여기서 기다리세요.”

“알겠어요.”

아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위험한 기운이 가득한 입구였다. 혁진은 자신의 옷소매를 붙잡은 아현의 손이 차가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혁진은 아현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봐주었다. 기대에 부응하듯 그녀의 눈빛에 긴장 대신 신뢰의 빛이 들어찼다. 혁진은 검은 수정을 손에 꽉 쥐고 앞으로 한발 내딛었다.

화악-

순간 혁진은 자신을 중심으로 무언가 아지랑이 같은 것이 쫙 퍼져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 놀라 아현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

혁진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전의 묘한 울림 같은 것이 퍼짐과 동시에 위협적으로 느껴지던 진법의 무서움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들어가 볼게요. 여기서 기다려요.”

“조심하세요. 위험 할 것 같으면 바로 나오셔야 해요.”

“네.”

혁진은 입구 안으로 한발 들어섰다. 찌릿한 감각이 밀려들기는 했지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두어 걸음 더 들어와 비령서고 안으로 완벽히 들어선 순간.

“어?”

혁진은 비령서고 안이 천보서고 만큼이나 밝다는 것을 깨달았다. 밖에서 볼 때는 빛 하나 보이지 않았기에 이상하다 싶어 뒤를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엔 천보서고 쪽이 어두워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빛을 차단하는 진법인가. 이런 것도 가능하다니….”

상상을 초월하는 진법의 효능에 혁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명각 앞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진일이 그토록 박살난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혁진은 천천히 비령서고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천보서고에 비하면 좁디좁은 창고 같은 느낌.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혁진은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비급의 제목부터 경악하고 말았다.

[진천군의 급]

개관조사 진천군의 비급이라니. 대체 얼마만큼 대단한 무공이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일검에 산을 깎아내리고 무위관의 터를 잡은 자의 것이니, 절세의 신공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혁진은 저도 모르게 진천군의 급을 빼내었다. 나무 상자에 정리되어 있는 책들 중 하나를 들고 읽기 시작했다.

“응? 이건….”

혁진은 저도 모르게 한 숨을 내쉬고 말았다. 절세의 비급일거라고 생각했던 것은 안타깝게도 진천군의 삶에 대한 기록이었다.

인간 진천군으로 살아온 유년 시절의 기억, 청년시절 삶을 살아가면서 어쩌다 무위관을 개관하게 되었는지의 이야기가 일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전해 듣기로는 너무 엄청난 힘이라, 막연히 신이 아닐까 했던 사내는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었다. 그랬기 때문인지 더 친근감이 다가왔다. 무공에 대한 언급은 단 한글자도 없었지만 혁진은 책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손으로 다음 장을 넘기며 정신없이 읽어나갔다.

-…마수들이 인간에게 미치는 해는 해가 갈수록 더해졌다. 죽이고 또 죽여도 끝이 없었다. 대체 어디서 이 놈들이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바다를 건너오지 않았다면 이리 생겨날 수는 없으리란 생각이 들 뿐. 너무 많은 개체 수에 혼자의 힘으론 역부족이라고 생각했다. 뜻이 맞는 동지 일곱이 있어 그들의 재력을 빌려 함께 무위관을 세웠다. 흉포한 마수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보고자 한 것이다….

“아차.”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지. 깜짝 놀란 혁진은 어쩔 수 없이 책을 덮었다. 밖에서 아현이 기다리고 있을 게 생각이 났다.

옆으로 시선을 돌려 ‘군(君)’으로 끝나는 다른 무위관주들의 이름을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몇 번이나 관주들의 이름을 살펴보았지만 어디에도 청로군의 이름은 없었다.

“이상한데.”

혁진은 관주들의 급이 모여 있는 서가를 벗어나 다른 곳을 둘러보았다. 천보서고 보다 한층 더 비밀스러운 곳이니 만큼, 예상한대로 이른 바 절세의 신공들이 모여 있었다. 혁진은 그 것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몸이 달아 오는 것을 느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몇 번이고 스쳐 지나간 비급들에 눈이 돌아가는 것을 되돌리며 찾기를 한참.

‘설마 여기엔 없는 걸까?’

혁진은 생각에 잠겼다.

따지고 보면 아현이 어디서, 누구한테 들은 건지도 확실치 않은 것을 믿고 들어온 것이기도 했다.

너무 섣부르게 움직인 것일까?

혁진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이면 몰라도 아현이 한 얘기라면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겪어 본 그녀는 함부로 말하고 움직일 여자는 아니었으니까.

그녀가 자신을 믿어주었던 만큼, 자신도 그녀를 믿는다.

혁진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 번 비령서고를 뒤졌다.

그러길 잠시, 문득 잘 보이지도 않는 구석에 나무 상자 하나가 있는 것이 보였다.

“설마.”

저벅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간 혁진은 상자 앞에 쭈그려 앉았다. 먼지를 걷어내니 청로군의 이름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찾았다!”

역시 아현의 생각이 맞았다는 사실에 혁진은 기뻐하며 얼른 뚜껑을 열었다.

“뭐야, 이것 밖에 없나?”

상자 안이 꽉꽉 들어차있던 진천군의 급과는 달리 여기엔 얇은 책자가 한 권 있을 뿐이었다.

혁진은 일단 한 권 뿐인 책자를 펴들었다. 여기에 청로군이 관주직을 버리고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자신의 부모와 마을이 마수들에게 처참히 도륙될 수밖에 없던 당위성이 설명되어 있다고 했으니까.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읽고 외워주겠다고 마음 먹었다.

눈에 불을 켠 혁진이 첫 장을 넘긴 순간.

“비령서고에 들어간 놈이 있다 해서 와봤더니….”

“!!”

“네 놈, 지금 무엇을 보는 것이냐.”

사방을 짓누르는 투기에 혁진은 흠칫 놀라고 말았다.

뒷목이 찌릿하더니 등허리에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자신 외에 비령서고에 누가 또 들어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 압도적인 투기는?

단순한 투기가 아니었다. 이 것은 분명 내공의 힘.

비령서고 역시 내공을 사용할 수 없는 진법이 쳐져 있었다. 헌데 진법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내공을 사용하는 상상 외의 존재가 등 뒤에 있었다. 혁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묵색 비단 옷에 허리띠와 옷깃이 금빛으로 번쩍였다. 큰 키에 우람한 체구, 젊은이의 패기가 뿜어져 나오는 건장한 몸 위로는 주름진 노인의 얼굴이 있었다. 반백의 머리칼은 단정하게 빗어 묶은 노인은 형형한 안광을 뿜어내며 혁진을 쏘아보았다.

“무엇을 보고 있느냐 물었다.”

“비급을…보고 있었습니다.”

혁진은 자신의 긴장한 모습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목소리나, 눈빛. 그 어느 것에도 상대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비록 자신은 내공을 쓸 수 없고, 상대는 지금까지 본 무인들과 비교 할 수도 없을 만큼 압도적인 내공을 가진 소유자라 할지라도.

노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말장난을 하는 군.”

쿠궁-

“큭.”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이 어깨를 부술 듯이 짓눌렀다. 쭈그려 앉아 있던 혁진의 무릎이 수초를 버티지 못하고 퍽 소리를 내며 땅에 부딪쳤다.

혁진은 본능적으로 상대가 누군지 파악할 수 있었다.

“…인사가 늦었음을 용서해주시길. 하령성의 추혁진이 경천군(驚天君)을 뵙습니다.”

“눈 까지 썩은 놈은 아니로군.”

혁진은 경천군의 비아냥거림이 묘하게 누군가랑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화려한 붉은 색의 옷에 북매(北梅)라 불리는 어황신가의 금지옥엽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던 차.

휙-

혁진은 자신의 손에 들린 비급이 뺏기듯 날아가 경천군의 손에 잡히는 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직접 손을 대지 않고 내공으로 멀리 떨어진 물건을 잡아끌어 당기는 신기(神技), 허공섭물(虛空攝物).

사부인 한진도 못하는 것이었기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청로군의 비급을 훑어보고 있음에도 입도 벙긋 할 수 없을 만큼 놀라던 차.

“그 아이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어이가 없군. 배덕자의 급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니.”

화르륵-

“아…!”

경천군의 손에서 푸른 불꽃이 일어나는 가 싶더니 삽시간에 청로군의 비급을 말끔히 태워버렸다. 잿가루 하나 흩날리지 않는 완벽한 전소(全燒).

혁진은 앞으로 손을 뻗은 채 망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경천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왜, 아쉬우냐?”

“아닙니다.”

“그렇겠지. 굳이 이 배덕자의 것이 아니더라도, 전대 관주들의 비급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뭐, 내 것을 봐도 좋다.”

“…예. 신경써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혁진이 무겁게 고개를 숙여보이자 경천군은 몸을 돌려 나가려다가 고개를 돌렸다.

“두 번째에 용서는 없을 것이다.”

경천군의 모습이 비령서고 바깥으로 사라졌다.

혁진은 한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불과 잠시 마주친 것 뿐 인데도 그의 엄한 눈빛, 무거운 음성이 여전히 곁에 남아 자신을 옥죄이는 것 같았다.

“제길.”

혁진은 고개를 흔들어 그의 압박을 털어내려고 애썼다.

입구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현이 걱정되었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그녀의 예상대로 이 곳에 청로군의 비급이 있었고, 그 것을 찾아 바로 읽기 직전이었건만. 세상의 수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경천군이 나타날 줄이야!

혁진은 천천히 걸어가 비령서고의 출구 앞에 섰다.

이 어두운 장막 뒤에 아현의 얼굴이 있을 터였다. 이 곳에 경천군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을 테니, 걱정하는 얼굴을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기쁘게 해주지는 못할망정….’

혁진은 마음이 무거웠다. 저절로 나오는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어두운 문 속으로 한 발 내딛었다.

화악-

순간 비령서고 보다 훨씬 밝은 빛이 혁진을 감쌌다.

똑바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아니, 빛 때문이 아니었다. 환해봐야 서고 안인 것을. 그저 실망한 얼굴로 서 있을 그녀를 똑바로 쳐다 볼 수 없었을 뿐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팔을 천천히 내리며 조금씩 눈을 떴다. 어차피 마주쳐야 할 일이라면 지나쳐 가야만 했기에. 아현이 슬퍼하고, 실망하고 있다면 달래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앞에 서 있는 아현의 모습에 혁진은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두 손을 다소곳이 모은 채 혁진을 향한 부드러운 미소를 한 가득 짓고 있었으니까.

“다녀오셨어요.”

“아현 소저.”

“비령서고 안엔, 제가 찾던 것은 없었죠?”

“그게….”

“죄송해요.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었나 봐요. 오래 전에 들은 일이라…괜히 추 소협만 고생시켜드린 것 같아요.”

반달로 예쁘게 휜 아현의 눈웃음에 혁진은 쓰게 웃었다.

그녀의 마음씀씀이가 미안할 정도로 안타까웠다.

자신이 진천군의 비급에 눈이 팔리지만 않았어도, 조금만 시간을 아꼈다면 하다못해 한 장이라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 한 장에 자신도, 아현도 궁금해 했던 진실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아현은 청로군의 비급을 보기 위해 무위관에 왔다고 했다.

그 와중에 전혁을 비롯한 이백 여 명의 호위무사들의 떼죽음을 당했다. 그녀로서는 모든 것을 잃는 절망을 맛본 것이나 마찬가지. 진망성에 와서는 평생 한번 당해본 적 없었을 사내들에게 희롱도 당했다. 마구간에서 잔 것은 또 어떠한가?

무위관 내에서도 남들의 깔보는 시선과 여인으로서 참기 힘든 굴욕적인 언사들을 들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꾹 참으며 힘들게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런 그녀가 이토록 간절히 원하던 것이었는데. 그 꿈을, 희망을, 소원을 바보 같이 눈앞에서 놓쳐버리고 말았다.

혁진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그녀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어 고개를 떨어트렸다.

“미안…해요.”

“그런 말씀 마세요.”

“그래도….”

“추 소협이 제 옆에 안계셨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텐데요. 정말 진실을 알 수 있는 운명이라면, 또 기회가 있을 테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우리 같이 힘내요. 네?”

수줍은 듯 살짝 올려다보는 아현의 미소엔, 그 어디에도 실망한 기색은 없었다. 오로지 혁진을 걱정하는 따스함만이 가득할 뿐.

혁진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아현이 원하는 것을 찾도록 해주겠다고 마음먹었다.

“네, 힘 낼 게요.”


***


천보서고의 입구 바깥.

천월화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처음으로 혁진을 기다린답시고 입구에 앉아 있었는데 이런 날벼락을 맞을 줄이야.

묵색 도포를 입은 노인은 평소와 달리 연신 허허 하고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려대고 있었다. 하기사, 도도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외손녀 신란이 암고양이처럼 옆에 찰싹 붙어서 갖은 애교를 부리니 천하의 경천군이라고 별 수 있을까.

“할아버님. 제 말이 맞죠?”

“그래, 네 말대로 청로군의 비급 하나가 거기에 숨어 있더구나. 갈근 녀석이 숨겨 놓은 것 일 테지. 기특한 것. 너는 어찌 알았느냐?”

“호호, 그냥 일전에 우연찮게 본 것 뿐 이랍니다. 할아버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었다니 너무 기쁜 걸요.”

천상 여자다운 웃음을 흘리는 신란의 모습에 천월화는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 적어도 경천군을 옆에 끼고 있는 신란에게 뭐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으니까.

“빙륜. 암천동(暗天洞)의 개문(開門)까지 얼마나 남았느냐.”

조손(祖孫)간의 웃음소리가 살짝 멎는다 싶더니 갑작스런 질문이 들려왔다. 천월화는 경천군의 등을 보며 말했다.

“달포 정도입니다.”

“달포라…. 이번에는 가능성이 있겠나?”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일이 녀석들도 벌써 세 번째 도전인데다가, 이번엔 새로운 아이들도 있으니….”

“끌끌, 그러고 보니 추혁진이라 했던가? 그 놈이 내 전건감곤(轉乾撼坤)을 한 순간이나마 버티더군. 제법이야.”

경천군은 재롱떠는 손주 얘기 하듯 중얼거렸지만 천월화는 깜짝 놀랐다.

전건감곤이 어떤 힘인가!

지금의 경천군이 천하제일인이 되게 만든 성명절기였다.

그 것에 저항하며 버틸 수 있는 이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 원리는 알 수 없지만 사람과 사물 자체를 짓눌러버리는 절대적인 힘이라고 했다.

그 것을 혁진이 한 순간이나마 버텼다고? 그 것만으로도 남에게 자랑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것이거늘.

‘잠깐만, 설마….’

천월화는 혁진이 경천군을 만났던 곳이 비령서고임을 깨닫고 아연실색했다. 내공을 쓸 수 없는 곳에서 전건감곤을 한 순간이나마 버텨냈다니.

경천군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을 터인데, 그렇다면 혁진은 내공의 힘이 없이 경천군의 전건감곤을 버틸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다는 말인가?

‘말도 안 돼….’

옆에서 듣던 신란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두 여인이 속으로 경악을 쓸어 담고 있는 사이, 경천군은 하늘을 보며 연신 끌끌 웃음을 흘렸다.

“한 달 뒤가…기대 되는 군.”




감사합니다. 좋은 글 많이 읽으시고 늘 행복하세요.


작가의말

어제 올리려했는데..한번 더 퇴고한다는게 늦었네요^^;;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덧글과 추천 덕에 하루 종일 글 써도 힘들지 않아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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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12장. 천보서고(天寶書庫)(2) +18 14.03.31 4,087 120 18쪽
28 12장. 천보서고(天寶書庫)(1) +8 14.03.30 3,834 131 11쪽
27 11장. 두번째 과제(2) +10 14.03.29 3,623 123 15쪽
26 11장. 두번째 과제(1). +10 14.03.28 3,415 123 20쪽
25 10장. 첫번째 과제(4). +14 14.03.27 3,737 133 13쪽
24 10장. 첫번째 과제(3) +12 14.03.26 4,329 146 17쪽
23 10장. 첫번째 과제(2) +8 14.03.25 3,946 131 13쪽
22 10장. 첫번째 과제(1) +10 14.03.24 3,840 131 11쪽
21 9장. 결성, 그리고 견제(2) +12 14.03.23 4,049 120 11쪽
20 9장. 결성, 그리고 견제(1) +10 14.03.22 4,293 136 20쪽
19 8장. 조별편성(組別編成)(2) +12 14.03.21 3,981 134 20쪽
18 8장. 조별편성(組別編成)(1) +12 14.03.20 4,143 145 19쪽
17 7장. 천하수호관(天下守護官)(4) +11 14.03.19 3,788 129 14쪽
16 7장. 천하수호관(天下守護官)(3) +10 14.03.18 4,147 115 14쪽
15 7장. 천하수호관(天下守護官)(2) +6 14.03.17 5,267 184 14쪽
14 7장. 천하수호관(天下守護官)(1) +6 14.03.16 3,983 119 11쪽
13 6장. 진망성(塵網城)(2) +13 14.03.15 5,283 121 14쪽
12 6장. 진망성(塵網城)(1) +6 14.03.14 4,435 127 12쪽
11 5장. 아현(娥賢)(2) +14 14.03.13 4,941 135 11쪽
10 5장. 아현(娥賢)(1) +10 14.03.12 4,655 135 17쪽
9 4장. 사부(師父)(2) +12 14.03.11 4,811 136 20쪽
8 4장. 사부(師父)(1) +4 14.03.10 5,591 136 18쪽
7 3장. 장권박투(掌拳搏鬪)(2) +4 14.03.09 5,358 148 18쪽
6 3장. 장권박투(掌拳搏鬪)(1) +5 14.03.08 5,262 143 18쪽
5 2장. 하령민가(河靈閔家)(2) +4 14.03.07 5,921 160 19쪽
4 2장. 하령민가(河靈閔家)(1) +7 14.03.06 6,140 174 10쪽
3 1장. 하령성의 약초꾼(2) +5 14.03.05 6,295 179 15쪽
2 1장. 하령성의 약초꾼(1) +12 14.03.04 7,725 186 12쪽
1 서장. 놈. +9 14.03.03 7,767 203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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