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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話者)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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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화자(話者)
작품등록일 :
2018.04.09 10:01
최근연재일 :
2018.10.11 15:10
연재수 :
210 회
조회수 :
1,08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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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
글자수 :
904,559

작성
18.04.14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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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24
추천
176
글자
10쪽

< #3. 상경회령부 1 >

DUMMY

배는 파도 하나 없이 고요한 바다를 미끄러지듯 스쳐 지나간다.


선실 안에 조용히 누운 산원은 편안한 느낌에 눈을 감고 있었다. 지혈해도 계속 넘쳐흐르는 피가 바닥에 그득하다. 멈추지 않는다.


생명이 몸에서 사라져갈수록 오히려 편안했다.


"아무 말 안 남길 거요?"


겸이가 퉁명스럽지만, 걱정스러운 말투로 묻는다. 녀석은 사랑을 저런 식으로밖에 표현 못 하는 바보지.


"아직 안 죽었다. 도련님 좀 모셔 오너라."


"쳇, 그딴 말종 새끼를···."


투덜대며 나서는 겸이가 문을 거칠게 닫는다. 몹쓸 녀석. 이 평화를 깨지 마라.


감긴 눈을 뜨지도 않았다. 그냥 이렇게 편안한 느낌이 너무 좋았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이젠 잘 기억도 안 나는 어머니의 품속에 안겨있는 듯 아련하다.


"모셔왔소이다. 어서 들어가시죠. 도련님."


험상궂은 말투와 다시 벌컥 열리는 문이 겸이의 마음을 대변했다. 겸이의 억센 힘에 밀려버린 창이가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 불쾌감이 얼굴에 스쳐 지나갔지만, 곧 사라졌다.


"산원, 좀 괜찮은가?"


어정쩡히 선 채 말을 꺼내는 창이는 불편해 보였다. 아니 자신을 지키려 몸을 던졌지만 그래도 오라 가라 하는 것 자체가 싫어 보였다. 창이는 그런 녀석이었다.


침상 옆에 정좌한 채 앉은 류는 그 모습을 하나하나 보고 있었다. 아마도 이빨을 씹고 있을 것이다.


류의 등에는 아직도 연이를 대신해 생긴 상처가 벌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울먹이며 붕대를 감아주던 연이와 눈앞의 버릇없는 저 철부지가 같은 핏줄이라니 어이가 없다.


산원의 눈짓에 겸이가 다가와 부축해 일으켰다. 산원은 침상에 겨우 앉은 채 등을 벽에 기대고서야 버틸 수 있었다.


"몸이 성하지 않으니 무례는 용서하십시오."


"......"


건방진 녀석은 말없이 조용히 서서 고개만 까닥거렸다. 용납하는 것만 해도 만족하라는 듯한 몸동작이었다. 이게 귀족이란 녀석인가? 얼굴이 새빨개진 겸이가 나서려다 산원의 눈총에 제지받았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도련님. 금으로 가시고 싶습니까?"


산원은 단도직입적으로 창이에 물었다. 창이는 그 말에 눈빛이 번득였다.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눈빛만으로도 답을 알 수 있었다.


산원은 아무 말 없이 창이를 한참을 바라봤다.


"가십시오. 쉽지는 않겠지만 남자가 원하는 일을 해야겠지요."


산원은 결심했다.


"다만 저희 가문이 모시는 건 금에 도착할 때까지입니다. 제가 충성을 맹세한 건 유수 님뿐이었고, 부인의 부탁도 금으로 데려다 달라고만 하셨지. 그 이상은 말씀이 없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못난 아비의 족쇄를 씌울 순 없다. 원하는 세상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살게 해줘야지. 창이의 당황한 표정이 그나마 기분을 풀어주니 못된 사람이구나. 이 김인식이란 녀석은 말이다.


"그···. 그래도, 난 계속 충성을 하길 원한다."


겸이는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류는 녀석의 뻔뻔한 당당함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제가 아이들에게 어찌하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못난 아비거든요. 그런 어려운 부탁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산원은 꼭 집어 '부탁'이라는 말에 힘을 줘서 말했다. 그제야 창이는 상황을 인식한 듯 풀죽은 모습으로 인사도 받지 않고 나가버렸다.


"쯧쯧, 어른이 얘기하시는데···. 귀족이란 것들은 예의범절을 쌈 싸서 먹었나 봅니다."


"겸이랑 류야. 내가 도련님에게 그리 말한 건 앞으로 살아가려면 좌절도 겪어봐야 한다는 의미로 말한 거다. 말을 그리 인정머리 없이 했지만, 한 일 년만······. 그래 길지 않게 일 년만 도련님과 아기씨를 봐다오."


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겸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산원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겸이는 투덜대면서도 못난 아비의 부탁을 들어줄 거라는 걸 알아서다.


한참의 정적이 지나고 겸이는 힘들게 한마디를 뱉었다.


"일 년입니다. 그 후에는 류 녀석만 데리고 이리저리 다닐 거예요. 뭐 상인 경호나 하던지···. 사냥꾼이나 되던지···. 아니면 강도질이나 하던지···. 뭐 그럴 겁니다."




***



"아이고······. 산원······."


장 씨는 더 말을 잇지 못한다. 산원의 무르팍에 얼굴을 파묻고는 훌쩍거리고 있었다. 산적 같은 사람이 눈물이 많아 우습다.


"시간······. 시간이 없네······. 내가 부탁 하나 하지."


"마···. 말씀하십쇼···."


"우리가 만난 지 오래되었지? 아이들도 잘 알고···. 뭐 둘이서 술 대작하는 모습만 보였지만 말이야."


"오래됐습죠. 처음 군역 나갔을 때 모셨으니······. 벌써 십 년 가까이 됩니다."


산원은 잠시 눈을 감고 그때를 생각했다. 여진이라고 부르던 녀석들이 나라를 세운 지 반백 년 만에 그리 커질지는 몰랐다. 북방은 금의 군대와 여러 번 충돌했었고 그때 끌려왔던 젊은이가 장 씨였다.


정찰을 나갔다 금의 기병에게 습격당해 포로가 된 것을 산원이 결사대를 끌고 달려가 구해냈었다. 스무 명의 병사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게 이 장 씨였다.


그 이후로는 언제나 함께였다. 개경에 부임했을 때도 같이 갔었고, 서경으로 왔을 때도 같이 왔었다. 이름도 모를 먼 친척보다는 믿을만한 이다.


"아이들의 대부가 돼주게. 녀석들. 어서 와서 절을 올려라."


어찌할 줄 몰라 손을 저으며 사양하는 장 씨에게 겸이는 성큼성큼 다가와 절을 올렸다. 어리둥절한 류의 머리를 잡고 강제로 눌러 같이 말이다.


"어···. 어···. 산원···."


"내가 죽은 뒤에는 날 대신해 아비처럼 생각하고 모셔라. 인수. 자네도 친자식처럼 여겨주게."


그렇게 산원은 아이들에게 아비 없는 몹쓸 처지는 면하게 해주고 한껏 웃었다. 마지막으로 장 씨와 술 한잔을 나눠마시고는 할 일은 다 했다는 듯이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다시 편안히 잠을 자기 시작했다.


참으로 재미없었던 인생이었다. 잠시 후회를 했지만 부질없다는 생각에 쓴웃음만 지었다.


노곤했던지 살짝 콧소리를 내며 자던 그는 조용히···. 조용히 생을 마쳤다.




***



침울한 표정으로 겸이와 류는 갑판으로 나섰다.


조용히 자듯이 돌아가신 아비에게 흰 이불을 덮어드렸다. 땅에 도착하면 양지바른 곳에 묻어드릴 것이다.


착잡한 마음에 바람을 쐬러 나선 그들의 눈에 창이가 거만히 서 있고 그 앞에 누군가 무릎을 꿇고 이야기하는 게 보였다.


선창에 숨어있던 이 중의 하나인 듯했다. 무언가 흥미로운 얘기를 듣는지 창이의 표정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돌아간 아비에게 마지막 인사도 올리지 않은 채 뭐 하는 짓이냐는 힐난이었다. 거친 발걸음으로 다가서는 겸이의 귀에 둘의 대화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냐? 한 번에 금의 황제를 보기는 힘드니···. 돌아서 가자?"


"네, 맞습죠. 연줄이 없는데···. 뵙고 싶습니다. 그래서 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죠. 그러니 무턱대고 중도대흥부로 가는 게 아니라, 옛 수도인 상경으로 가는 겁니다."


"상경? 그곳에 남은 게 뭐가 있다고?"


"아닙니다. 수도가 바뀐 지 겨우 이십몇 년입니다. 귀족이나 중신들의 원래 집이 대부분이 상경에 있고 별장처럼 왔다 갔다 하지요. 그곳에서 수소문해보면 쉬러 온 중신 중 몇을 몰래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럴 바에는 그냥 중도대흥부로 가는 게···."


"아이. 중도대흥부에 있는 거처들은 한군데 모여있습니다. 병사들도 많고···. 서로 간의 알력도 심해서 서로 감시도 많이 한답니다. 그런 데선 부탁을 하는 사람도 힘들고 받는 사람도 힘듭니다."


"....그렇군. 자네. 아주 박식하군. 이런 건 어찌 알았나?"


"헤헤, 소개가 늦었습니다. 제 이름은 유달봉이라 하옵고 원래는 역관이었는데 서경에서 발이 묶인 다음에는.....“


”그냥 얘기해라.“


창이는 주저하는 달봉이란 사내를 채근했다. 그러자 사내는 고개를 떨구고는 조용히 아뢨다.


”그냥 금나라하고 사적으로 거래를 좀 터고 했지요."


중죄인이구먼. 나라에서 금하는 밀무역을 하던 자라. 게다가 눈매가 야릇하고 가는 것이 심성이 굳은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상경으로 가도···. 좀 힘들죠. 원래 이런 일은 좀 기름칠이 돼야 잘 흘러가는데···."


달봉이라는 사내는 손가락을 붙여 돈이 필요하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러자 창이는 가슴팍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내 안을 열어 보여줬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거느린 식솔이 있어 다 쓰지는 못해도 반절 정도는 쓸 수 있을 거야."


비단 주머니 안의 진주가 반짝거렸다. 최상급의 진주가 한 움큼이 들어있었다. 잘만 흥정한다면 꽤 부자 소리를 들을 양이었다.


"헤···. 그 정도면···."


달봉의 눈이 탐욕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말을 잇지 못한다. 주변에서 살짝 지켜보던 다른 이들의 눈에도 어두운 기운이 스민다.


"이 정도면 됐어. 넣어."


다가간 겸이가 창이의 손을 잡아 비단 주머니를 품에 밀어 넣어주었다.


"감···. 감히···. 마음대로 내 몸에 손을 대다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인사라도 한번 해라. 그게 예의지."


겸이는 차갑게 말한 후 창이의 귀에 입을 갖다 대고 소곤댔다.


"그렇게 막 내보이다가는 한밤중에 누군가 네놈 목에 칼을 꽂을 거야. 그리고 난 절대 슬퍼하지 않겠지."


겸이의 말에 그제야 주위를 둘러본 창이는 자신이 성급했음을 알았다. 사람의 흉흉한 눈빛이라는 게 멀리서도 잘 보인다는 것도 말이다.


"선주! 북으로 갑시다. 상경으로 가신답니다."


달봉은 그렇게 외치고 흉흉한 겸이를 피해 사라져갔다. 창이에 잘 보이려는 듯 눈인사는 잊지 않고 말이다.


그렇게 배는 북으로 방향으로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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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상경회령부 1 > +7 18.04.14 9,925 176 10쪽
15 < #2. 서경 14 > +17 18.04.14 9,695 172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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