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邪道)
상상의 나래를 펴다.
그워어어억!
머리끝이 쭈뼛 설 정도로 난폭한 흉성(凶聲)이 숲을 뒤흔들었다.
컴컴한 숲을 쏜살같이 빠져나온 진월은 헝클어진 가사의 자락을 재빨리 수습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미친 듯이 쫒아오던 군웅들의 그림자는 어느새 홀린 듯 숲 안쪽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뭉글거리는 사기에 잠식당하는 숲은 마치 딴 세상처럼 보였고 살아 움직이는 듯 하여 주춤 물러서던 진월의 안면이 붉게 물들었다.
이십년을 넘게 길러왔던 금정의 불심이 이리 허무하게 무너지다니, 사부께서 항시 경계하라던 사도(邪道)의 사술이 틀림없었다.
자신을 보내며 뒤를 막아선 옥성에게 부끄럽고 죄스러운 심정에 다시 숲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불가항력이라 해도 옥성의 곁에서 싸우다 죽고 싶었다.
흔들리는 눈망울로 번뇌에 빠지려는 진월의 정수리로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곧이어 천지를 진동하는 뇌성을 동반한 소나기가 진월의 온 몸을 세차게 두드렸다.
불현듯 미망에서 깨어 난 진월은 얼굴을 들어 어두운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으르렁 거리는 뇌성이 마치 가루라의 노성처럼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머리를 흔들어 숲과의 경계를 단절한 진월이 수풀을 헤치며 비탈길을 달려 내려갔다.
‘꼭 살아계셔야 합니다. 옥성도장님.’
슈아아악!
.......................
최고라 할 수 있는 팔 할의 공력이 실린 옥성의 송문고검이 헛되이 암공(暗空)을 갈랐다.
목아자와 철주(鐵柱)가 사라지고 사방이 칠흑같이 변해버린 건 한 순간이었다.
암흑천지에 검과 합일한 옥성이 둥실 떠올랐다.
옥성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알기에 선공이 실패했어도 부동심은 흔들리지 않았고 검신에 주입한 내력을 고르게 유지하였다.
사도이결을 상대하려면 견정불굴의 정신은 필수였다.
호언장담과 다르게 기척을 지운 목아자는 암흑진공 속에서 은은한 검광을 흘리며 떠 있는 검신에 시선을 두고 생각에 잠겼다.
‘킁, 비루먹었던 망아지새끼가 많이도 컸구만. 당년의 옥허 못지 않은걸? 그렇다면...킬킬킬’
목아자의 두건 속에서 사도이결의 환영밀주(幻影密呪)가 소리도 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직후, 서릿발처럼 차가운 귀화(鬼火)가 점점이 떠올라 진월이 들었던 그악한 흉성을 토하며 숲을 사기로 가득 채워버렸고 옥성의 검신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거세게 흔들렸다.
앞이 보이지 않는 옥성의 주변을 그물처럼 에워싼 수십 개의 불덩어리가 전혀 상반된 빙냉(氷冷)의 살기를 머금고 하나씩 검신을 향해 날아들었다.
‘사음사뢰(邪音射雷), 상잔의 고통을 실컷 맛보다 네 사형 곁으로 가려무나. 킬킬킬...‘
옥성의 의식이 깃든 검신이 시간을 두고 날아드는 귀화를 상대로 사투를 벌이는 사이, 목아자는 숲에서 씻은 듯이 자취를 감춰버렸다.
목아자가 사라지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쿵!
지면을 울리는 둔중한 충격파와 함께 암흑이 걷힌 숲속으로 한동안 비정한 정적이 흘렀다.
자욱하던 사기도 폭우에 씻긴 듯 사라져버린 숲은 대신 비릿하고 쌉싸래한 혈향이 넘실거렸고 조각난 사체들 속에 반 토막 난 송문검을 꽉 쥔 옥성이 누워있었다.
성한데라곤 굳게 감겨 있는 눈두덩이 뿐, 반신이 핏구덩이 속에 누워있는 옥성의 상태는 조각나 있지만 않았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비를 뿌리고 난 먹구름이 상류 쪽으로 몰려가버리고 난 후, 숲으로 수상한 그림자가 하나 스며들었다.
엉망으로 파괴된 나무들과 바위조각들을 피해 사체를 뒤지며 가끔 손에 묻은 선혈을 맛보던 작은 그림자의 입에서 한숨 섞인 넋두리가 새어나왔다.
“에효효, 무정한 오라버닌 나처럼 앙증맞고 귀여운 동생을 썩은 나무둥치에 쳐 박아 놓고 도대체 어딜 간 거야? 깨어 보니 사방에 수상쩍은 놈들 투성이더만, 내가 깨어나기 전에는 절대 어디로 가지 말고 지키라고 그렇게 신신당부 해놨는데, 이건 뭐 완전히 소귀에 경 읽기였어! 아무튼 만나기만 해봐라. 어? 저건 멀쩡하네.”
투덜거리다 옥성을 발견하고 거침없이 핏 구덩이 속으로 발을 담그며 쪼그려 앉는 소녀는 바로 기면증으로 인해 불시에 잠들어 당가위가 고목에 숨겨두었던 쌍아였다.
어두컴컴하고 무시무시한 참사의 현장에서도 쌍아는 일체의 두려움이나 거리낌이 전혀 없는 모습이었다.
쪼그리고 앉아 옥성의 이곳저곳을 손가락으로 찔러보던 쌍아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우와! 오라버니 덕에 횡재했는걸. 도사처럼 보이는데, 순양지기가 가득한 정혈(精血)이라면 내 병도 얼마쯤 호전될 거야. 이야~신난다!”
쌍아는 눈에서 반짝반짝 빛을 발하며 양 갈래로 땋아 올린 머리에 앉아있던 호접을 떼어내, 날개를 옥성의 목덜미에 갖다 대려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손을 움츠리고 고개를 숙였다.
“도사님! 죽어서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벌써 혼백은 승천하셨겠지만 부디 극락왕생 하시길 빌어 드릴게요!”
쌍아가 잠시 눈을 내리깔고 망자를 위해 신나게 예를 올릴 때였다.
컥!
심하게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누워있던 옥성의 반신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고 곧장 쌍아의 양 갈래 머리를 향해 한 되는 됨직한 선혈을 가득 토해내곤 비스듬히 쓰러져버렸다.
“..............이런 망할! 이거 뭐야?”
어안이 벙벙하던 쌍아는 피에 흠뻑 젖은 양 갈래 머리의 매듭이 풀려 머리카락이 얼굴에 치덕치덕하게 달라붙자 소매로 마구 문지르며 괴성을 토해냈다.
“으악! 난 머리 매듭을 할 줄 모르는데, 오빠도 없는데 어떡하라구!”
소매로 문지르자 도리어 산발이 되어버린 머리를 양손으로 주물럭거리다가 가까스로 쓸어 모아 뒷목의 옷깃 속으로 쑤셔 넣은 쌍아는 표독스럽게 옥성을 쏘아보았다.
“내가 이때껏 생혈은 마셔본 적이 없지만 오늘 그 불문율을 깨버리고 말겠다!”
호접의 날개를 그나마 멀쩡한 겨드랑이에 끼워 닦아낸 쌍아가 옥성에게 바투 다가앉으며 한 손을 목덜미에 가져다대었다.
“사...............................형.”
옥성의 상처투성이 목울대가 꿀렁거리며 그렁거리는 비음이 흘러나오자 콧잔등을 잔뜩 일그러뜨린 쌍아의 입에서 장탄식이 터졌다.
“휴우..............아버지 말씀대로 세상엔 공짜가 없다더니 지금이 딱 그 짝이네. 에라이, 안 마신다. 안 마셔! 울 오라버니 계획대로라면 곧 사방에 시체가 그득할 텐데, 귀찮아도 그거나 찾으러 가야겠다.”
발딱 일어나서 호접을 머리에 척 올려놓은 쌍아는 뒤로 돌아 몇 걸음 걷다가, 발에 걸린 물컹한 사체의 내장조각을 걷어 차버리곤 고개를 돌려 옥성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래도, 저만한 재료는 구하기 쉽지 않은데...일단 구해주고 일어나면 보답으로 생혈 한사발만 달라고 해볼까...근데 진기를 끌어올리면 금방 또 졸릴 텐데 어쩌지?’
요리조리 궁리하던 쌍아가 이내 이마를 탁 치며 배시시 웃었다.
‘나도 참 바보야. 근처에서 구멍 뚫린 고목을 찾아 숨으면 되는 걸, 헤헤헤’
이내 쌍아는 고목을 찾아 떠나고, 모로 쓰러져 힘겨운 호흡을 시작한 옥성의 목숨은 당가의 재녀 소령(=쌍아의 본명)에게 맡겨질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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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룡의 거선이 즉시 떠나지 못하게 된 건 화남소 때문이었다.
마여량과 전력을 다해 달려와 배에 오르려는 순간, 십여 장을 격해 날아와 상판에 꽂힌 은빛 철권에 노개는 회피 동작 그대로 부서진 파편을 걷어차며 멋들어지게 갑판에 안착했지만, 화남소는 도리어 촌락에서 선착장으로 걸어오고 있는 괴상한 흑묘 가면의 남자를 향해 무시무시한 적의를 드러내고 거선에서 등을 돌려버렸다.
선착장을 등지고 선 화남소와 어느 덧 삼장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선 수탐사령 곽상의 사이에서 거칠고 사나운 기류가 용솟음쳤다.
“파산은자권(破山銀刺券). 너는 누구냐?”
먼저 입을 연 화남소의 물음에 한동안 말없이 응시하던 곽상의 시선이 우수를 가린 소매에 가 멈추며 묵직한 저음이 되어 나왔다.
“이런 곳에서 사문의 어른이었던 분을 뵙게 되다니...아주 의외로군요.”
이어 주먹에 낀 은빛 철권을 가볍게 말아 포권지례를 한 곽상이 제 소개를 하였다.
“선부의 뒤를 이어 은자권의 주인이 된 곽상이라고 합니다.”
싸늘한 시선으로 쳐다보던 화남소의 눈빛에 의혹이 들어찼다.
“곽가라고? 언제부터 권림의 주인이 한인의 성씨를 썼느냐?”
화남소의 다그침에 곽상의 눈가로 얼핏 아픈 기색이 스쳐지나갔지만 워낙 순간적인데다 가면으로 인해 화남소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오래전 사문을 떠나 외인이 되신 분께 일일이 본림의 사정을 설명하고 싶지 않습니다.”
신색을 감춘 곽상이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잘라 말하니 화남소가 적의 가득한 시선으로 오장 밖에 둘러 선 복면인들을 노려보다 씹어 뱉듯이 말문을 열었다.
“네가 저자들의 우두머리인 게로구나. 내 떠나기 전만해도 묘형이 외곬수일 망정 문호는 엄정하였거늘, 대관절 무엇이 무도일로의 권림을 세상 밖으로 내몰아 마도의 개가 되게 하였느냐?...아니다, 이제와 그런 걸 따져 무엇 할까. 모두 부질없는 짓이로다...”
화남소가 탄식으로 말을 마치자 묵묵히 서 있던 곽상이 거선으로 눈길을 주며 말하였다.
“저 배에 제가 만나야할 분이 타고 계십니다. 길을 비켜주시지요.”
“허, 허허허”
실소를 터트린 화남소의 기세가 물처럼 고요해졌다.
화남소는 강호에 나와 처음으로 상대보다 먼저 소매를 걷고 우수의 이지를 선보이며 차분하게 말하였다.
“권림을 떠난 지 어언 이십년이 다 되었지만 내 한시도 잊지 않고 있는 철칙이 하나 있지. 내 말하지 않아도 너라면 잘 알고 있겠구나.”
무거운 눈빛으로 화남소의 이지를 쳐다 본 곽상이 재차 철권을 감싸 포권을 하고 내력을 끌어올렸다.
멀찍이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곽상을 주시하던 증업이 부사령 강생달을 올려다보며 소곤거렸다.
“강형, 사령이 언제부터 저리 말이 많았지?”
“...상대가 아는 사람인 거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주먹부터 날리던 사람이 이상하잖아?”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만약에 내가 너하고 싸움이 나서 다짜고짜 주먹부터 날리면 넌 기분이 좋겠냐?”
“얼래? 우리가 언제부터 법도를 지키며 살았다고 그러셔? 적이라 생각하면 무조건 선공을 날려야지.”
“.............”
잠시 침묵하던 강생달이 허리를 구부려 증업의 귓불을 잡아당기고 입을 가져다 댄 후 소곤거렸다.
“괜히 나한테 시비 걸지 마라. 주먹부터 날려버릴 테니까.”
즐감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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