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탐사령(收探司令)-後
상상의 나래를 펴다.
수탐사의 대원들은 강생달이 단상 밑에서 오묘한 자세로 수면을 취하는 동안, 두 번째로 불려 올라갔던 증업이 반쯤 돌아간 턱을 감싸 쥐고 눈두덩은 팅팅 부어버려 앞이 제대로 보일까나 의심스러운 몰골로 엉금엉금 기다시피 오조 앞으로 돌아가 엎어졌지만 슬금슬금 움직여 흩어졌던 오와 열을 갖추곤 뻣뻣하게 선 채 눈길조차 주지 못했다.
신임사령의 재촉에 우거지상을 하고 주저하던 조장들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줄줄이 단상위로 올라갔다가 한군데씩 쥐어 터지고 굴러내려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각을 잡고 열심히 앞사람의 뒤통수만 뚫어지게 쏘아보며 오슬오슬 엄습해오는 후환이 두려워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편복이 바닥에 떨어진 장삼을 집어 여전히 능글맞게 웃으며 걸쳐주고 물러나자 의복을 정돈한 곽상이 오연한 표정으로 도열한 대원들을 내려다보았다.
말없이 한동안 묘한 정적이 흐르고 잔뜩 쪼그라든 대원들이 저마다 속으로 증업에게 열심히 욕을 퍼붓고 있을 때, 신임사령의 입이 열렸다.
“몸으로 나눈 대화가 좀 통한 것 같아 기분이 좋군. 그래 대원들 중에 나와 다시 대화를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는가?”
낮은 음성이었지만 도열한 대원들의 귀엔 천둥소리처럼 들렸는데 제꺽 이구동성으로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없습니다!!!”
대원들의 반응에 가늘게 찢어진 눈 사이로 기광을 번뜩이던 곽상이 힐끗 편복을 쳐다보곤 장내를 쓸어보며 뒷짐을 지었다.
“아쉽군. 진지한 대화는 서로에 대한 이해를 더욱 돈독하게 해준다고 배웠거늘, 뭐 앞으로 더 좋은 기회가 생기겠지. 그럼 이제 조촐한 상견례는 이것으로 마쳐볼까?”
대원들의 표정이 밝아지며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신임사령의 수행종자로 따라 온 애송이가 나서며 꺼지려던 불씨에 아주 아주 기름을 부어버렸다.
“사령! 여기서 끝내시면 안 됩니다. 감히! 하극상을 도모하려던 자는 즉참을, 부화뇌동한 자들에겐 엄벌을 내려 수탐사의 본보기로 삼아야 합니다!”
치죄를 간하고 엄숙하게 시립한 애송이는 사령이 두려워 감히 올려다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대원들이 식어가던 등골의 냉기가 전신을 감싸고 얼어붙는 느낌에 새파래지다 못해 노래진 안색으로 변해 엎어진 채 미동도 않는 증업을 죽어라 쏘아보았다.
곽상이 슬쩍 입 꼬리를 말아 올리며 편복과 눈을 맞추고 천당과 지옥을 오락가락하느라 뇌까지 얼어버리기 직전의 대원들에게 명하였다.
“주목하라!”
부지불식간에 잔뜩 긴장한 여든여섯 쌍의 눈길이 단상으로 모아졌다.
“어찌됐든 첫 상견례인데 무력으로 수하들의 피를 손에 묻혔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구나. 다만, 편복의 말대로 하극상은 팔부에서 가장 중한 죄, 참형은 거두겠지만 주동자인 오조장 증업에게 벌을 내리겠다.”
사령의 선언에 대원들은 알게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각자 모시는 신을 찾느라 부산하였고 움찔움찔하던 증업의 등짝은 풍을 맞은 듯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사령이 준엄하게 장내를 쓸어보며 선고하였다.
“증업! 단지(斷指)를 하여 오늘의 교훈을 가슴에 새기거라.”
‘사, 살았다!’
사령의 명이 떨어지자 열탕냉탕을 오락가락하던 증업이 돌아간 턱을 필사적으로 움직이며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가 날쌔게 이마를 지면에 박았다.
“사령의 은혜 뼈에 새기겠습니다!”
곧이어 비수를 꺼낸 증업이 좌수를 내밀어 가차 없이 손가락 다섯 개를 단번에 잘라버렸다.
대원들은 미동도 없이 앞만 바라보았고 식은땀을 흘리며 지혈하던 증업이 단상을 조심스레 올려다보았다가 사령의 안색이 굳어지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오른쪽도 다 잘라버리란 뜻인가?’
“...증업. 누가 다 자르라 했나? 하나만 잘라도 될 걸, 쯧쯧쯧...”
곽상이 혀를 차자 손가락을 몽땅 잘라버린 좌수로 힘들게 단도를 움켜쥔 채 고심을 거듭하던 증업은 뒤로 넘어가 버렸고 편복은 웃음을 참느라 신형을 돌리다 쪼그려 앉고 말았다.
“오늘일은 일체 불문에 붙이겠다. 단, 기강확립을 위해 내일부터 한 달 간의 특훈을 실시한다. 각 조장들은 내일 새벽 인시까지 대원들을 이 자리에 집결시키도록.”
“넵!!!”
이리하여 신임사령의 부임식은 저들만의 비밀로 간직하게 된 하극상이 미수에 그치며 끝을 고하게 되었는데, 증업에겐 과단지란 별명이 붙어 오조를 단지조라 불리게 만들었고, 일조장 강생달은 반나절 만에 깨어났지만 며칠 간 지독한 오한과 발열에 시달리다 특훈이 끝나갈 즈음엔 반쪽짜리 몰골로 변해 그가 없는 자리에선 으레 강시조장으로 통하게 되었다.
수탐사의 신임사령이 대단한 고수란 사실은 특훈이 끝나기도 전에 팔부의 수뇌들에게 발 빠르게 전해졌는데 증업을 사주하여 어떻게든 흠집을 내보려던 지심부주의 흉심은 불현듯 날아든 총주의 경고장을 받은 후 조용히 수그러들고 말았다.
곽상은 수탐사에서 첫 임무를 같이한 편복이 원래의 특임조로 복귀하자 강생달을 부사령 자리에 앉혔고 틈날 때마다 조장들은 물론이요 대원들과도 스스럼없이 몸의 대화를 나누길 즐겨 하였다. 서로를 감시하고 불신하는 수탐사의 습성은 여전하였지만 대원들은 어느 새 사령으로서 곽상을 경외하게 되었고 강생달은 입속의 혀처럼 굴게 되었지만, 오직 증업만은 단지의 아픔을 잊지 않고 뼈에 새긴 채 은연자중하고 몇 년이 흘렀다.
4년 간, 수탐사를 지휘하며 곽상은 스물 한차례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원들의 신망을 얻었고 팔부의 주목을 받는 신진고수로 자리매김 했는데, 곽일태는 신비루에 들어앉아 회오중과 오로객의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부주들의 질투어린 부러움을 사고 있었다.
얼마 전 열린 팔부총회에서 총주가 특별히 수탐사령을 언급하며 서로군에게 치사를 하였고, 신검탈취 건을 수탐사에 일임해 버린 것이다.
여기에 신검을 가져온다면 직접 그 분께 바칠 영광의 기회가 주어졌으니 고검추의 아비 지심부주의 속이 어땠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원장로가 본산을 비우고 떠난 지 만하루가 지나 총부의 광풍파랑대가 들이닥쳐 삼당주 이하 백이십의 문도를 도륙하고 형산파의 편액을 불태우니 수백 년간 호남의 명숙으로 강호에서 인정받아 왔던 형산파는 수장의 그릇 된 판단과 욕심으로 말미암아 멸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전위대의 뒤를 이어 수탐사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올라왔던 곽상은 우연히 아사직전의 묘족 청년을 구하는데 고문을 당하고 방치된 채 오줌으로 연명하던 마두르였다.
그간 임무를 수행하며 개새끼 한 마리 살려두지 않는다는 총부의 철칙을 충실히 따랐던 사령이 동족의 청년을 살리고자 애쓰는 모습에 증업은 당연히 쾌재를 불렀고 임무를 마친 배송조 열 한명이 장사로 떠나는 편에 밀지를 넣어 지심부로 보내었다.
혹여 짐꾼으로 부리다 팽시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녕향에서 드디어 청년을 놓아주니 이 사실만으로도 사령은 총부의 문책을 면할 수 없을 터였다.
북서로 질주하던 대원들이 선두에서 안내하던 어옹의 손짓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흩어지며 해송의 군락지로 은폐해 들어가자 뒤로 따라붙는 강생달을 흘깃 쳐다 본 곽상이 무거운 눈초리로 어옹이 가리키는 지점을 응시하였는데 오십 장 밖 포구 어귀에서 한창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흑의복면에 피풍의라니, 우리도 흑의지만 이런 날씨에 피풍의는 사양하겠어!‘
역시 한발 빠른 전위대의 복색에 고소를 짓던 곽상이었지만 부사령이 은폐한 채 지시를 기다리던 대원들에게 약지를 까닥거리고 품에서 복면을 꺼내 뒤집어쓰자 자신은 소매에서 얇은 흑묘가면을 꺼내 안면부를 가리곤 어옹을 불렀다. 접전을 벌이는 광풍대의 수가 본래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으니 척후가 틀림없겠고 본대는 어딘가 은신하여 사태를 관망중이니 수탐사의 도착을 알려 공조를 취해야했다.
호남의 비선중 가장 늙었지만 경신술의 대가라 알려진 어옹이 다가오자 곽상이 지시를 내렸고 이번 임무의 지령을 가져 온 어옹은 잠시 주변을 가늠하곤 지체 없이 포구의 반대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백장은 더 넘게 떨어진 강위에 떠 있는 거선을 노려보던 강생달이 접전 현장으로 눈을 돌렸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음을 보내왔다.
-마녀가 저 배에 타고 있다는 걸 알 텐데 척후가 접전을 벌이다니 이상한데요?
-내가 미리 일러둔 대로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고 대원들 건사에 신경 쓰거라.
그 동안 몸의 대화를 빙자해 단련시킨 덕분에 대원들은 몰라보게 실력이 늘었지만 임무 중 단 한명의 손실도 없었던 수탐사는 오늘 어쩌면 전체가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몰랐다.
광풍대와 공조해 인명손실을 최대한으로 줄여 볼 계획이었지만 상대는 마녀가 아닌가?
사기저하를 우려해 마녀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건 곽상과 부사령인 강생달 뿐이었다.
어쨌거나 목표는 제대로 찾아왔는데 광풍대주를 만나 의논을 하기도 전에 싸움구경이라니.
가면의 턱을 잡고 쓰다듬으며 접전 장소를 주시하는 곽상은 강호에 나와 처음으로 챙겨 온 비밀병기를 당장 착용해야 할 상황이 닥칠 줄은 어옹이 돌아오기 전까지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즐감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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