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심(腹心)
상상의 나래를 펴다.
“어,얼마나 머무실건지?”
“딱 사흘만 폐를 끼치겠어요.”
“네, 그럼 그렇게 알겠소이다...”
대머리 위로 송글송글 솟아오른 땀을 닦아내고 겨우 대화를 끝낸 마여량이 눈짓을 하고 나가자 장추산이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일어섰고 오운개가 눈치를 보다 따라 나갔다.
“헉! 그 노파가 천검마녀라니요?!”
오운개의 입이 턱 벌어지고 튀어나온 눈자위가 부르르 떨렸다.
“그럼 우리 분타에 재앙이 들이닥친 게 아닙니까 장로님!?”
“쩝,우선 요구대로 들어줬으니 딱히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만...워낙 악명이 높아야 말이지...마녀는 마녀니까.어디 좋은 방법이 없을라나?”
마여량이 이마를 문지르며 인상을 찡그리자 눈치를 보던 오운개가 한마디 하였다.
“저기...장로님 그냥 나가달라고 부탁해 보면 안될까요?”
오운개가 건의랍시고 꺼내놓자 마여량이 눈을 부라리며 윽박질렀다.
“아니 나보고 호랑이 아가리에 손을 집어 넣으라구? 아니지! 분타주인 네가 그리 부탁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구나. 당장 가서 그리 말해 보려무나.”
“죄송합니다...장로님.”
오운개가 면박을 당하고 찌그러지자 장추산이 덥수룩한 턱수염을 쓰다듬다 질문을 던졌다.
“장로님, 마녀의 악명은 귀가 따갑게 들어왔지만 제가 알기론 죄다 나쁜놈들만 골라서 죽였지 않습니까? 우리 개방이 편의를 봐주었는데 그녀가 갈 때 해꼬지라도 할까봐 그럽니까?”
“저도 그렇게 알고 있는뎁쇼...?”
“헐, 그 마녀가 40년전부터 죽인 숫자가 몇인데 그리 낙관한단 말인가? 그냥 그 옆에만 있어도 위험한 그런 종자란 말일세! 마교는 정파와 세불양립(勢不兩立)이란 말일세. 헙!”
장추산의 의견에 맞장구를 치는 오운개에게 헛웃음을 날리던 마여량은 자신이 뱉은 마교란 단어에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잠시 침묵을 지키다 마여량이 다시 말하였다.
“절대 그들과 상종은커녕 가까이해선 안된다는게 정파의 불문율이오 소방주.운개 말대로 재수 없으면 우리 개방에 재앙이 떨어질 거란 말이오.”
“내가 보기엔 그렇게 위험한 노파로는 안보이고 곱게 늙었다 싶었는데,거 참...
희안하네.”
“소방주 내 누누이 조언드리지 않았소?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해선 절대 안된다오.”
장추산의 태도에 위험성을 특별히 강조하며 눈알을 굴린 마여량이 엄숙히 말하였다.
“소방주, 개방의 후개로서 위엄을 보일 때가 온 것 같소이다. 마녀에게 오늘만 묵고 내일 떠나 달라고 소방주가 청해 봐주시오.”
“헐~아까 분타주가 그리 말할 땐 펄펄 뛰시더니 어찌 나더러 그런 부탁을 하신단 말입니까 마장로님? 내가 무슨 용뼈라도 고아먹은 줄 아십니까?”
장추산이 펄쩍 뛰며 정색하자 마여량이 시무룩해지며 대머릴 긁적였다.
“쩝...아무래도 무리겠지요? 에효...이 사단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저...장로님 저는 이만 장례와 회식준비로 나가보면 안될까요?”
이리저리 머릴 굴려도 답이 안나오자 결국 오운개가 넌지시 던진 한마디였다.
조요령은 개방의 허락을 구하자 당장 언진을 찾아갔는데 이규의 병문안을 온 표행 식구들로 방안은 미어터질 듯 했다.
“에헴,아진.이 할미에게 저 분들 소개 좀 해주지 않으련?”
짐짓 낮은 기침을 하고 언진에게 한 부탁이었지만 눈치 빠르게 상관호가 먼저 인사를 하고 중인들도 분분히 소개를 하니 증치자가 마지막으로 빙그레 웃으며 손을 맞잡았다.
“아진의 할애비 되는 사람입니다.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냥저냥 인사를 나누던 조요령이 정색을 하고 깊숙이 허릴 숙이며 진심을 담아 인사말을 건네었다.
“천산의 조요령이 은공께 인사 올립니다. 훌륭한 손자분을 두셨습니다.”
“인사 올립니다 은공. 홍고라 하옵니다.”
뒤이어 홍고와 시위들이 정중하게 절을 올리자 증치자가 손을 저으며 겸양의 말을 하였다.
“헐헐, 아진의 덕으로 노부가 과례를 받을 순 없소이다. 그만 일어들 나시구려.”
“아닙니다 은공. 아진이 아니었으면 제 손녀애도 없었을 것이고 은공이 안 계셨으면 아진도 없었겠지요. 충분히 예를 받으셔도 된답니다.참 그리고 이걸 아진에게 주고 싶습니다.”
조요령이 허리를 세우며 품에서 백옥패를 꺼내어 언진의 손에 쥐어주었다.
“아진, 이것은 할미의 작은 선물이란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거라.”
홍고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심 놀라고 있었는데,백옥패는 칠채연검과 더불어 신교의 좌사인 조요령의 신물이었던 것이다.
증치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언진은 조요령에게 다가가 수담을 해주며 인사를 하였다.
[고맙습니다 할머니.잘 간직하겠습니다.]
“홀홀, 암 그래야지.나중에 이 할미와 자주 만나려면 결코 잃어버려선 안된다 아진.”
조요령은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언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침상에 누워 잠든 이규의 입꼬리도 살짝 올라가 있는 것 같았다.
사별삼일(士別三日)이면 괄목상대(刮目相對)라는데, 사흘 만에 만난 대로검자는 똥줄이 바짝 탄 표정으로 파면객에게 필사한 서책을 바치며 고개를 조아렸다.
“노형..님 암향비급입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저와 묵령은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제 수하들이 모두 마녀에게 도륙된 이상 저에겐 이제 더 이상 여력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게 내 최대한 멀찍이서 추적만 하라 하지 않았는가? 자네 때문에 로군께 나까지 문책을 받을지도 모르네.이제 나도 어찌해야 할지 다시 생각해봐야겠네.”
대로검자가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며 입을 열었다.
“지심부의 팔대영주만 있었어도 그리 허무하게 당하진 않았을텐데...홍황객두를 믿고 합류하였던 소제의 실수가 큽니다.차라리 동귀어진이라도 하고 싶었지만...휴...”
로군의 수하가 된 이후부터 이중생활을 해 온 대로검자의 심중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탈명단으로 오로객을 부리는 로군의 암계에 당해 원하지 않는 수족노릇을 해온지가 십년이 넘은 것이다.
자업자득이랄 수 있지만 어디 핑계 없는 무덤이 있으랴.
백년대계가 이루어지는 날 온갖 영화를 누리리라는 달콤한 말은 이날 이때까지 꾸준히 체내에 쌓여 온 탈명단의 독기와 다름없는 주마가편(走馬加鞭)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허나, 파면객은 나는 나 너는 너, 내껀 내꺼 니꺼도 내꺼란 인생관에 충실한 뼛속까지 사파인이었다. 로군의 가장 큰 신임을 얻고 사로객의 약점까지 알게 된 후,병주고 약주며 알게 모르게 상당한 이득을 취해 온 파면객의 시커먼 복심을 대로검자는 알리가 없었다.
일할을 주면 구할 이상은 뺏어 와야 직성이 풀리는 파면객의 잔뜩 쉰 음성이 흘러나왔다.
“일단,지심부의 화화태세(花華太歲)를 감시하게나.편복의 전갈로는 천상부의 반요랑(半夭螂)과 망성(望城)으로 향하였다 하니 팔대영주와 합류하던지 다른 수를 써볼 생각인가 보네.”
“어? 편복이 연락을 해왔습니까? 소제는 죽은 줄 알았는데...”
“쯧, 지금 그게 중요한가? 자넨 이미 두 번의 실패를 했네.로군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어찌 하시리라 보는가? 그나마 이부에서도 실패하여 내가 한 손 거들어 줄 수 있는 여지가 생겼으니 감지덕지해도 모자랄 판에 쯧쯧...”
“...정말 거들어 주시는 겁니까 노형님?”
“내가 두말 하는 거 보았나? 망성으로 가 편복을 만나게. 그들이 마녀를 상대하기 전까지는 절대 나서지 말고 추이만 지켜보도록 하고 해약은 걱정하지 말게나.내가 로군께 적당히 아뢰어 말미를 얻어볼터이니.”
“헐...그렇게까지 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노형님!은혜는 죽어도 잊지 않고 이번일은 무조건 노형님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지금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구명줄이 생겼으니 기사회생했음이라.
벌떡 일어선 장신의 대로검자가 허리가 부러질 듯 읍을 해보이곤 내실을 벗어났다.
‘클클클, 어리석은 놈. 예나 지금이나 무공하나 빼곤 변변한 게 없으니 네 운명은 이번이 마지막이니라. 화산의 암향검이 내 손에 들어왔으니 너에게 더 이상 볼일은 없느니라 클클클.’
암향비급을 갈무리한 파면객이 흉소를 흘리는데 묵령이 복면인 둘을 데리고 들어왔다.
대로검자는 죽었다고 생각하던 군조와 종왜였다.
“흘흘,자네들은 이제 노부와 거래할 준비가 되었겠지?”
잠시 망설이던 군조가 종왜를 따라 엎드리며 이마를 바닥에 대고 낮게 부르짖었다.
“거래라니요,당치도 않습니다!저희들은 어떤 명이라도 따를 준비가 되었습니다!”
“헐헐헐.좋아, 아주 좋아.”
묵령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구출되어 빼돌려진 대로검자의 수족들을 부리게 된 파면객의 흡족한 웃음소리가 내실을 감돌았고, 그의 꿍꿍이속은 그를 부리는 로군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즐감하시길...
- 작가의말
시간이 좀 나서 한 편 업데이트 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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