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혈마(腐尸血魔)
상상의 나래를 펴다.
사방 벽이 핏빛으로 번들거린다.
둥그런 석실 바닥도 혈흔들이 여기저기 묻어 붉은빛이다,
석실 중간 검은색 제단엔 등촉 몇개가 올려져 가물거리고,좌측 가슴이 뻥 뚫리고 심장이 뜯겨 나간,십여세 가량의 남자 아이가 공포로 눈을 부릅뜬 채 나신(裸身)으로 널부러져 있었다.
정법(正法)을 부정하고 좌도(左道)에 빠져버린 혈마(血魔)는 그동안 아흔개의
심장을 취하고 동남동녀(童男童女)의 정혈(精血)을 마셨으며,제단에 뿌렸다.
구년 전,천주(天主)의 계시를 받고 모월,모일,모시의 길일(吉日)을 택해 제물을
바치고,주마령(朱魔靈)이 원하는 청정무구(淸瀞無垢)의 동혈(童血)을 구하기 위해 귀주 상청파를 없애는데 일조를 하긴 했지만,생각보다 수확이 크진 않았다.
천주께서 계시(啓示)하신 날까지 딱 일년 남았다.
동남동녀 백여명의 심장을 먹고 정혈을 마셔 신(神)에 깃든 주마령이 음양혈(陰陽血)을 이루는 날,불사무적(不死無敵) 하리라!
서장 포달랍궁(布達拉宮)의 사학승(史學僧)이었던 잔비(盞泌)는 우연히 접한
고대 밀교의 문헌 한장으로 인해 운명이 확 뒤바뀐 사람이다.
선천대도를 이루어 만법귀일(萬法歸一)을 열망하던 어린 사학승은 타혈천(打血天)의 부름을 받고 절을 뛰쳐나가 좌도의 길로 들어선다.
밀교의 문헌대로라면 타혈천에는 무병과 불사의 길이 있고,인간이라면 누구나 열망하는 부(富)와 귀(貴)를 가질수 있는 힘(力)이 있었다.
잔비가 절을 뛰쳐나와 맨 처음 한 일은 청장고원(靑藏高原) 곳곳에 오랜 세월
풍장(風葬)으로 형성 된 웅덩이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날짐승들이 뜯어먹고 남긴 내장조각들과 살점이 붙은 뼈다귀들이 썪어,
수천년에 걸쳐 작은 웅덩이들이 만들어졌고 바닥에는 부시독이 존재 했다.
고원을 전전하며,타혈천의 밀법대로 부시독을 흡취하고 풍장으로 버려진
시체도 뜯어 먹으며 이십년을 보냈을때,서장 무림에 그를 무시할만 한
고수는 아무도 없었다.
쓸만한 아이들이 보이면 여기서 한놈,저기서 한놈,거두다 보니 잔도를 넘어
사천으로 입성 했을땐 제자 다섯과 추리고 고른 사파고수 열둘이 잔비를
따르고 있었다.
성도(成都)와 가까운 미산(眉山)에 둥지를 튼 산적채 중,제법 크다 싶은 곳을
박살내고 들어 앉은 잔비는 밀법을 연구하면 할 수록 알수 없는 갈증을 느끼며, 술류동정(術流動靜)의 해괴한 짓거리를 서슴치 않는다.
아미파의 소사미를 납치하여 제물로 바친답시고 전신을 난자하기도 하고,
자신의 힘이 부족한가 싶어 사천당가의 독왕당주도 갖은 노력을 기울여 해치운 다음 흡독(吸毒)도 해보고,도문(道門) 놈들 피가 필요한가 싶어 청성의 젊은놈들로 열댓가량 데려다가 이리저리 찔러도 보았지만 계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밀법의 말미에 적힌 천주의 계시를 받을수만 있다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었다.
대신 몇년후,사천무림의 공적으로 지목되어 부시혈마(腐尸血魔)라는,마음에 썩 들지 않는 무시무시한 외호를 꼬리에 붙인채 도망자 신세가 되어 버렸다.
아미,청성,당가 연합의 추살을 받아,은신해 살던 산적채는 풍비박산 나버리고 가볍지 않은 내외상과 함께 키우던 제자 세놈,사파고수 열을 잃고 살아도 산거
같아 보이지 않는 네놈을 데리고 도망치다 뿔뿔히 흩어진 잔비는,귀주성 깊은 산 속 어느 골짜기에서 드디어 천주의 계시를 받는다.
사천연합 고수들의 협공을 받아 생사기로의 순간에 섰을때에도,'천주의 계시를 받아 타혈천의 진정한 힘을 얻기전엔 절대!결코!죽어도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비장한 심정으로 연합의 천라지망을 죽기살기로 돌파한 잔비는,몇날 며칠 뒤도 안 돌아보고 내 뺀 덕분에 어느덧 귀주의 수 많은 깊고 높은 산 속,어느 이름모를 골짜기,으슥한 동굴속에서 한숨을 돌릴 수가 있었다.
옆구리에 바람구멍을 내 준 청성의 재수없는 말코 얼굴을 기억해내며 이빨을 으드득 갈아 붙힌 후,장포를 들쳐 보던 잔비는 툭하고 떨어지는 피에 절었다가 지금은 빳빳하게 굳어 접은 형태 그대로 굴러 떨어지는 비단천쪼가리를 줍다가,
까만 점들이 점점이 떠 있는 형상이 이상해서 조심스레 펼쳐 보았다.
점들이 글자라는 걸 알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던 잔비는 얼마 후,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동굴이 떠나가라 괴성을 지른다.
애타게 갈망하던 천주의 계시.
'영민하다고 소문났던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을까?'
잔비는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자책과 환희의 한숨을 동시에 내뿜었다.
그동안 온갖 피를 묻혀도 나타나지 않던 천주의 계시가,품속에서 자신의 피를
묻혔을때 요술같이 나타난 것이다.
동굴에 은신한 채 천주의 계시를 심혼(心魂)속에 새겨 넣은 잔비는 상처를 치료한 후,첫 제물을 향해 산을 내려간다.
삼년 동안 귀주 현내의 여러곳을 쥐도 새도 모르게 돌아 다니며 제물들의 심장을
꺼내먹고 정혈을 흡수하길 열여덟번째로 마치던 날,잔비의 상단전으로 연신(煉神)의 상징인지 뭔지 모를 령(靈)이 들어차며 거대한 힘이 느껴졌다.
희열에 몸을 떨며 흥분하던 잔비는 쥐새끼의 탈을 쓰고 자신을 추종하던 쌍로를
대동한 채 은신처로 귀신같이 찾아온 큰 제자놈을 얼떨떨하게 바라본다.
잔비는 제자놈에게 자신을 어떻게 찾았느냐는 말도 물어보지 못한 채,팔부
(八部)의 귀인을 모시고 왔다는 말과 함께 나타난 하얀면사의 신비인과 대화를
나누게 되고,몇가지 좋은 조건을 달며 설득하는 신비인의 제안을 받아 들인다.
상청파를 습격하기 전날,객잔의 별채에서 서른명의 제법 살벌해 보이는 무사들과 들이닥친 넷째 제자놈은 잔비 앞에 엎드려 펑펑 울음을 터트렸다.
두고보자는 생각으로 상청파에 도착한 잔비는,제자놈들은 회모의 탈과 백우의 탈을 뒤집어 쓰고,쌍로와 함께 서 있는 무사들까지 시커먼 복면을 하고 있자 자기도 써야 하는건 아닌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쉰가량의 흑생경장 차림을 한 무사들이 복면을 하고 각종 병장기를 든 채 합류하자 묘한 자존심에 맨 얼굴인 채로 상청파의 담을 넘었다.
일사불란하게 보이는대로 찌르고 베어 죽이며 상청파를 피바다로 만들어 주는
놈들 덕분에,느긋하게 이곳 저곳 구경하며 새끼도사 몇놈을 챙긴 잔비는 얼마 후,무위각(無爲閣)이라고 써 걸린 편액 밑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늙은 말코도사 앞에 당도한다.
폭삭 늙은 주제에 뭔 힘이 그리쎈지,꺾고 비틀고 잡아 던지며 복면인들을 쳐죽이는 말코에게 주마령으로 더욱 강력해진 부시독 몇 방을 놔주고 있는데,괴물같이 생긴 네놈이 벼락같이 날아 들어와,일다경도 지나지 않아 늙은 말코의 수급을
날려 버린다.
늙은 말코보다는 못하지만 간혹 강하게 저항하는 몇 놈들마저 처리하자 상청파
경내에는 살아 숨쉬는 이가 하나도 없게 되었다.
시체들을 모아 놓고 건물 곳곳에 불을 지른 후,뒤늦게 나타난 신비인으로부터
보상은 틀림없을 거라는 확답을 받고 제자놈들에게 새끼도사들을 들려 전 날
묵었던 객잔으로 돌아가며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잔비였다.
'확실히 밑지는 장사는 아녔어.그나저나 출출한데 어느 놈부터 잡아먹을까?'
상청파의 혈사가 일어난 지 육개월 후,잔비는 제자들과 쌍로를 거느리고 신비인이 새로 마련해준 망산 어귀,다섯칸짜리 지하석굴로 이사했다.
즐감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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