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이 끝나다.
상상의 나래를 펴다.
상처입은 고수가 야차보다 무섭고 사나울 수 있다는 걸 응각은 이제야 알게 되었다.종리추가 사람같아 보이지 않았다.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져 있던 노인네가 강시처럼 벌떡 일어나 팔비를 휘둘러,공격하던 수하들을 때려 죽이는데 장권에 맞은 자들은 한결같이 칠공(七孔)에서 피를 내뿜으며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처참하게 죽어갔다.
흉포하게 날뛰는 야차에게 질려 물러서던 수하들은 도망도 치지 못하고 먼저 이승을 하직한 동료들의 뒤를 따라갔다.
두철의 조호이산계(調虎離山計)는 치밀했지만,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종리추는 자신들 정도로는 결코 잡을 수 없는 괴물중에 괴물이었다.
응각은 몇 남지 않은 수하들을 쳐다보며 채주를 생각하였다.
자신과 수하들을 더 강경하게 말리지 않은 채주가 원망스러워졌다.
자신과 수하들에게 종리추의 처리를 부탁한 두철이도 미워졌다.
자신을 종리추 같은 괴물과 만나게 한 운명도 죽일 만큼 저주스러웠다.
종리추의 장권이 안면을 부수고 혼백을 분리해 버릴때까지,자신의 탓은 손톱만큼도 하지 않는 응각이었다.
태청진기가 끊기기전,부상당한 자신에게 방심한 산적놈들을 속전속결로 해치워야 했던 종리추는,초점없는 눈으로 멀거니 바닥에 즐비한 시체들을 감상하던 족제비상의 두목놈까지 박살내 버리곤 길게 호흡을 고르며 끊어지려는 진기의 마지막 한가닥을 잡고저 급히 가부좌를 틀며 운기요상에 들어갔다.
순간의 선택이 생사를 갈랐다.
상관호가 종아리에 상처를 입고 피를 철철 흘리며 주저앉자,흥분한 주첨방은 일도양단할 기세로 달려들었는데,두철은 상관호의 기색을 살피다 비사처럼 두가닥의 검기가 지면에서 솟아오르자 낭아봉을 급히 휘돌리며 뒤로 후퇴하였다.
한편,상관호의 몸을 두쪽 낼 듯 덮쳐들던 주첨방은 귀두도를 내려치던 자세 그대로 멈춰 서있더니 목젖이 길게 벌어지며 선혈을 분수같이 뿌려대곤 털푸덕 쓰러지고 말았다.
위기를 기회로 삼은 상관호의 회심의 절초는 정작 반드시 죽이고자 했던 두철은 놓쳐버렸지만,주첨방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형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빌어먹을,암수(暗數)가 있었구만.이제 끝장을 봐야겠다.너희들은 육두령을 도와 표두들을 어서 해치워버려라.”
상황이 안좋게 변하자 두철은 상관호의 퇴로를 막고 있던 졸개들에게 지시한 후,손바닥에 침을 탁 뱉어내곤 낭아봉을 곧추세우며 신중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첨방의 목에서 뿜어져 나온 피와 자신이 흘린 피로 혈인이 된 상관호도 은자삼절혼(隱刺三切魂)의 암격이 두철을 상하게 하지 못했지만 절반의 성공에 위안을 삼고 정신을 집중하며 일어섰다.
진표두를 상대하는 육대팔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주인집 안방문이 훤히 보이는데 집 지키는 개에게 걸려 때려죽이고 가려다 되려 물려버린 형국이었다.
육대팔이 괴력에 더해 철포삼(鐵布衫)을 익히고 있지 않았다면 진즉 어디 한군데 바람구멍이 났을 정도로 진표두의 솜씨가 보통이 아닌 것이다.
분기가 치솟아 얼굴이 시뻘개진 육대팔이 진표두의 풍파제미곤(風把齊眉棍)을 상대로 한방만 걸리길 갈구하며 약이 올라 펄펄 뛰고 있는데,우르르 몰려온 두철의 수하들이 합세하여 표두들을 몰아붙이니 진표두도 어쩔수 없이 부상을 당하고도 사투를 벌이던 동료들을 엄호하며 표차쪽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육대팔은 철괴장으로 바닥을 한번 쿵! 내려치곤,표사들과 싸우는 졸개들까지 불러들여 단번에 표차를 차지하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표사들과 진을 구성하여 공방을 거듭하던 남구도 숨을 돌리며 표차로 물러서니, 표차를 중심으로 전면에 살아남은 표국식구들 약 이십여명이 모였고,둥그렇게 반원을 그리며 육대팔이 이끄는 산적들 사오십가량이 대치하는 형세였다.
“으하하!드디어 시간이 되었다.얘들아! 모조리 죽여버리고 보물을 챙겨 집에 가자꾸나~!”
집결한 산적들의 인원수를 믿고 기세가 오른 육대팔이 그동안 고생한 건 모두 날려버리고 졸개들에게 공격명령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증치자가 내심 결정을 내리고 막 몸을 일으키려는데 다급한 어조로 허공에서 조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표국 형제들은 본인을 믿고 모두 엎드리시오!한시가 급하오.어서!어서!”
쟁자수들은 대다수가 표차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었지만,산적들과 전면전을 각오하던 남구와 표두,표사들은 어리둥절해 하다 다급하게 연신 재촉하는 조일의 지시에 따라 엉거주춤 신형을 낮추었다.
백척간두(百尺竿頭).표차의 지붕위에서 표국식구들을 엎드리게 한 조일은,몰려오는 산적들을 노려보며 손에 쥐고 있던 고리들을 잡아 당겼다.
드르륵,드르륵,드르륵.
조일이 올라가 있던 표차에서 열린 들창 사이로 괴상한 기음이 들려오더니 별안간,
퉁,퉁,퉁
연달아 투박한 발사음이 울리며 수십발의 암전(暗箭)이 전방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크아악!”
“으아악!”
“케에엑!”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며 사방에서 달려들던 도적들은 눈깜짝할 새 모조리 온 몸에 구멍이 숭숭 뚫린 처참한 시체로 변해 바닥을 나뒹굴었다.
살아남은 도적들도 너무 놀라 가랑이 사이로 오줌을 줄줄 흘리며 망연자실 자빠져 있었다.
조일은 방어장치의 가공할 살상력에 놀라 피바다가 된 장내를 내려다 보다 털썩 주저앉았는데,국주인 상관호가 비밀리에 준비한 십장무적 천살강노(千殺强弩)였다.
육대팔을 비롯하여 오십에 가까운 도적들이 몰살에 가깝게 죽어 넘어지자,두철은 싸우던 상관호에게 맹격을 가하여 물리친 다음 쏜살같이 언덕아래로 도주해 버렸다.
종리추가 태청진기로 응급요상을 한 후 숲을 빠져 나왔을땐,증치자가 바쁘게 움직이며 부상당한 표국 식구들을 치료하는 중이었고,쟁자수들은 정신을 추스르고 야영지에 널려 있는 시체들을 한쪽으로 쌓아 놓는 중이었다.
종리추는 음울한 눈으로 장내를 쓸어보다 사제인 상관호가 기대어 앉아 있는 나무밑으로 걸어갔다.
“피해가 컸구먼...한시라도 빨리 사문에 도착해야겠네.”
“사형,죄송합니다.고생하셨습니다.”
상관호는 좌측 다리에 칭칭 감은 흰색 천이 피로 벌겋게 물든채로 사형에게 죄스럽고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어느새,사위는 부옇게 밝아 있었고 무심한 하늘은 칙칙한 회색빛이었다.
즐감하시길...
- 작가의말
지루하게 이어졌던 표국과 산적들간의 혈투가 막을 내렸습니다.(__);;
무난하게 결착냈다 자위하며,다음편은 수상전으로...쿨럭;;
한결같이 찾아 주시는 분들께 새삼 감사의 인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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