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조(徵兆)
상상의 나래를 펴다.
“토사귀 전묵...내 아우가...어떻게 죽었는줄 아나...?”
말꼬릴 길게 늘이며 원장로가 중얼거리듯 묻자,취기가 거하게 오른 전묵이 심드렁하게 답하였다.대작하는 내내 한 이야길 반복하니 장단도 한두번이지,그래도 답은 해야했다.
“글쎄요...?제가 알기론...실종 되신 거 아닙니까?”
“클클클...강호인들이 전부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클클클...”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전묵이 취기를 가누고 바라보는데,거칠게 술 한잔을 들이 킨 원장로가 초점없는 시선으로 한 군데만 뚫어져라 쏘아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백비원호(白臂猿浩) 몽중원...그 녀석은 내 손에 죽었지...단금참맥 되어 서서히 말야...클클클.”
“...!!!”
설마 했지만 원장로 입에서 자신이 직접 동생을 죽였다는 말이 나오자 전묵은 마른 침을 삼키다 조심스레 술 한잔을 따라 마시곤 눈치만 보았다.
“...종리추 그 놈이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철천지원수로군요...”
“클클클...장권,그 후레자식은 반드시 내가 찢어 죽일걸세.개방 거지새끼들도 모조리 쳐죽여야지.크흐흐흐!”
“장로님,개방 거지들은 저희 채주님과도 구원이 크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걱정마십쇼.제가 중간에서 다릴 확실히 놔 드리겠습니다.“
“클클클,암 그래야 할게야.우린 사지에서 살아남은 전우가 아닌가?클클클”
속과 다른 말을 지껄이는 전묵을 원장로가 술잔 너머로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전묵은 취기로 몽롱한 가운데 11년전의 혈전을 떠올렸다.
11년 전,강호의 사가들이 악록(岳麓)대전이라 명명한 혈전(血戰)의 내막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인물은 드물었다.
불괴무적 독고무기,파면객 등양,원장로 몽문원은 대전에서 구사일생 하지만 함구를 택하고,혈전에 투입되었던 수하들은 거의 다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전묵은 당시 수하 열댓을 거느리는 소두목에 지나지 않았다
전묵이 채주를 따라 형산파에 당도하니 사파의 고수들과 심지어 낭인무리들까지 득시글하였다.악록산 서쪽이 행선지란 사실은 당시 부채주에게 어깨너머로 들은 사실이었고 그 이상은 알지도 못하고 그저 오백이란 엄청난 숫자의 무리들 틈에 끼어 열흘을 은밀하게 이동하였다.고한증이 뒤에 있지 않았다면,오백여명이 산등성이에 은신한 채 내려다보고 있는 분지위에 세워진 커다란 장원이 보국대장군의 본가란 사실은 죽어도 몰랐을 것이다.
낙향한 대장군 진수웅이 거하는 곳을 왜 공격하는지 의문도 품지 못하고 채주가 내린 명령에 무리들과 공격을 개시 하였는데,그 곳은 용담호혈(龍潭虎穴)이었다.
성난 범처럼 날뛰며 습격자들을 쳐 죽이는 위맹한 인상의 노인과 다섯명의 무인들 근처에 반시진도 되지 않아 시체의 산이 쌓이는데,선공에 투입 된 악룡채는 부채주들이 모조리 죽고 스물도 채 남지 않은 인원으로 후퇴하였다.
원장로가 제때에 달려오지 않았다면 모두 죽었으리라.
형산파의 백원신공과 원공검법은 확실히 대단하여 사파고수들과 연합하며 펼친 구구대진으로 노인과 무인들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천운으로 살아남은 전묵은 수채의 형제들과 채주를 둘러싸고 있었는데,고한증이 갑자기 빠지자는 것이었다.
당시 성정이 불같았던 독고무기는 당치도 않은 소리라며 전장으로 뛰어들지만 난데없이 나타난 개방거지들 중에 대머리 노인네의 시커먼 몽둥이에 허리가 부러져 죽을 뻔 한다.
고한증이 살아남은 수채형제들과 목숨을 걸고 채주를 구하지만 악룡채는 딱 세 명만 목숨을 부지하고 도망친다.
전묵은 형산파와 사파도 겨우 수장들과 몇몇만이 살아남아 도망쳤다는 사실을 아주 먼 훗날 알게 되지만 아직도 악록대전의 내막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흘러가는 상황이 당시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다.
예기치 않게 이규가 빠졌지만 표행은 예정대로 장사에 입성하여,남문에 여장을 풀었다.
목적지인 영주(永州)까지 이제 팔백오십리.
마지막 우환거리인 형산을 지나야하는 상관호는 대처방안을 의논하기 위해 사숙,사형과 머리를 맞대고 있었는데 심각한 분위기였다.
“사형,소양(邵陽)을 거쳐 영주로 우회할 수 있지만 그리되면 일정이 빠듯합니다.사오일 여유는 있지만 우회한다면 대간에 걸쳐 이점이 사라집니다.천상 형산을 지나야겠습니다.”
“흠,나야 상관없지만 식구들에게 준비를 단단히 시켜야겠군.사숙,심려를 끼쳐드리게 되었습니다.마음 같아선 황노원과 담판을 짓고 싶지만...”
옥청은 이규가 떠난 뒤 한동안,시름에 빠져있었지만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걱정말게 사질.이럴 때 필요할 듯 하여 내가 있는 게 아니겠나.형산의 원장로가 사파로 돌아 선 사실은 내 진작 알고 있었네.”
“제가 준비한 수가 하나 있긴 한데...제때에 당도할지 모르겠습니다.”
상관호는 개방의 후개 장추산과 막역지우였다.
정주와 개봉이 가까운데다 흔치 않은 인연으로 오래전부터 친우로 지내온 터였다.장사 분타로 보낸 조일이 장추산의 소식을 가져온다면 사숙과 사형에게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었다.
“헌데,악룡채는 이제 신경 안 써도 되겠나?”
“네.악룡채가 장사에서 활동한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사숙.”
잠시 뭔가 생각하던 종리추가 상관호를 보며 입을 떼었다.
“사제,불괴악룡은 원장로와 연분이 있는 자일세.노파심이네만 개방 장사 분타주를 만나 정보를 좀 얻어 보는 것이 어떻겠나?”
“안그래도 조표두를 보내놨습니다.황노원이 형산 일대에 악명이 자자한 이유는 악룡이 부추기는 면도 없지 않거든요.자세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동안 표국 몇몇이 이쪽에서 큰 손해를 본 사고들이 죄다 형산과 연관이 있지만 뒤에 악룡채가 개입하고 있다는 의혹들이 상당합니다.소문을 죄 믿을 순 없지만,만전을 기할 생각입니다.”
옥청이 상관호의 말을 듣더니 심각한 분위기를 띄우려 호쾌하게 웃으며 말하였다.
“하하하.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진천사질이 옛날과 많이 달라졌단 말이야.”
“사숙 저도 표국을 운영한 지 십년이 넘었습니다.이 정도야 뭐...핫핫핫”
옥청의 농으로 잠시 분위기가 부드러워 졌지만 조일이 가져온 소식에 방안은 이전보다 더 심각해졌다.
“집법장로 독두신개 어르신이 형산으로 출발하지 말라시며 자세한 이야긴 저녁에 방문하셔서 나누시자 하셨습니다.”
“신개 어르신이 그리 말씀하셨다고? 혹시 후개는 보지 못하였는가?”
상관호가 놀라서 되묻자 조일이 심각하게 말하였다.
“네 국주님.현재 장사 분타는 제자들을 모두 불러들이는 중인데 뭔가 큰일이 생긴 듯 합니다. 더 이상은 바쁘셔서 감히 여쭤볼 수가 없었습니다.”
마여량은 장사분타로 들이닥치자마자 분타주 오운개를 닦달하여 방외제자들을 모조리 불러들이고 악양분타로 지원을 요청하는 전서구를 띄웠다.
장사는 호남의 성도라 분타주 외 300이 넘는 방도들이 있었지만,백의개들이 다수라 일,이결 제자를 박박 끌어 모아도 백을 넘기지 못하였다.
그래도 오늘 내일 쳐들어올지 모르는 황노원과 결전을 준비하는 마여량은 바쁘게 움직였는데 오운개가 조일을 데리고 들어왔다.
와중에 길게 이야긴 나누지 못하고 저녁에 방문하겠다는 전갈을 들려 보냈는데,정탐을 내보냈던 일결제자가 들어와 악룡채의 수적들이 장사로 들어와 있다 아뢰었다.
점입가경이라,심상치 않은 징조를 감지한 마여량은 오운개에게 방비를 단단히 하라 이르곤 비사표국이 머문다는 객잔으로 급하게 달리기 시작하였다.
조일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상관호는 일각도 안되어 들이닥친 독두신개 마여량을 놀라서 맞아 들인다.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마여량은 장추산과 자신이 며칠전 형산파와 얽힌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악룡채의 움직임을 말해준다.
“헛! 악룡채가 장사에서 움직인다구요? 노선배님 혹 악룡의 동향은 아십니까?”
“내 급하게 달려오느라 악룡에 대해선 듣지 못했네.하지만 십중팔구 악룡도 나오지 않았겠나? 표행을 장사 분타로 옮기는 게 좋겠네.”
설상가상이라 상관호는 순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옥청과 상관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종리추가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사제,강호난측이라 불가항력인 상황에 처하게 된 것 같네.표행을 위해서라도 개방과 힘을 합쳐 맞서 싸우는 방법밖엔 달리 수가 없겠네.”
“진천사질 나도 동감이야.장권 사질과 황노원의 악연도 연이라 질기디 질긴데 악룡까지 뒤를 노린다면 다른 수가 없겠네.”
상관호도 결심을 하고 표행 식구들을 불러 모아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개방 분타로 향한다.
고한증의 계책은 어긋나 버렸지만 결전의 시작은 시간문제였다.
즐감하시길...
- 작가의말
*드디어!연참대전 마지막 편입니다.
막바지 요 며칠 컨디션 난조로 힘들었는데 이렇게 끝나게 되어
안도감과 홀가분한 기분에 날아갈거 같네요.
응원해 주신 모든 문우분들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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