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나라 말엽, 수 많은 군웅이 할거하고 전란이 꼬리를 물어 민초들의 삶이 핍절하던 시절. 장삼이사들이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이 분명하던 시절, 힘이 무엇보다 먼저였던 시절.
그 시절에 거꾸로 살아보고자 했던 이들과 거대한 물살을 타고 살아가고자 했던 이들의 이야기.
<이도에 만백하고>,<청풍에 홍진드니>,<고월하 적심인들>을 잇는 <흑야에 휘할런가>
.....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란 무엇이려나
모두가 갈 수 있는 쉬운 길이려나
아니면 그냥 세월에 모든 걸을 맡기고 가 보려나
그러면 모든 것이 다 좋게 풀리려나
그도 아니고 이도 아니면
내가 짊어지고 꾸역꾸역 살아가야 하려나.
아직도 잘 모르겠기에 끄적여봤지만 결국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4행시 연작 마지막 글.
.....
견마지로 - 흑야(黑夜)에 휘(輝)할런가
"이 짓거리만 20년이야, 어지간한 사람은 인상 딱 한 번 보고 알 수 있는 법이거든. 사람 얼굴은 그 동안 살아온 인생지도인 게지. 그 안에 좍 그려진다고. 벗어날 수가 없는 법이거든."
그 말을 정정할 때가 올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조가략 앞에 빗물을 털면서 앉아 있는 사내는 아무리 봐도 사내가 주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죄송한데 다시 한 번 여쭙지요. 뭘 내시겠다고요?"
"학관(學館)이오."
묵수현(墨水縣)
북쪽의 대도(북경)나 남쪽의 항주 같은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대처는 아니었다. 기실 현이라는 직함만 붙어있을 뿐이지 사는 사람은 이천여호, 일 만이 조금 안되었다. 진(鎭)에 가까운 인구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 묵수가 현으로 불렸는지는 조가략도 몰랐다. 풍문으로는 변량(하남 개봉)만큼이나 오래 된 장씨 집성현이라고 했다. 오래된 성읍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장구히 살만하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 하는 법. 얼마 안 되는 성읍이지만 알맞은 분지와 농토가 있고, 물이 북쪽에서 뻗어 남쪽으로 성읍을 가로지르니 약초와 나물을 캐기 좋으며 쪽, 치자, 홍화 등이 어우러져 의료(依料)가 풍성하니 염색의 기예도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다. 알음알음 상인들이 들어와 물산이 왕래하고 작은 성시(城市)라도 부족할 것이 없었다. 흉년과 병마만 무서울 뿐 현민들이 살림을 자급자족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묵수현의 힘은 장구한 역사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로,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음'에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었다. 묵수현을 아는 이들은 오직 상인들 뿐이었다.
천하에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치세(治世)하는 원나라의 거미줄 같은 행정이 미치지 않는 동리였다. 하남강북행성 일곱갈래 로(路)에서 강남과 사천지방을 향해 수십갈래의 도로가 뻗어갔건만 어떤 길도 묵수현을 제대로 거쳐가는 길이 없었따. 더군다나 이 곳은 공신들의 봉토도 아니었다. 누더기처럼 기워진 봉신들의 영토 사이에 교묘하게 놓인 북수현은 명실상부 하남행성의 공현(公縣)이었으나 정작 하남행성의 백호장 하나도 근처에 얼씬대지 않는 완벽한 자치구역이었다.
지정 13년, 천하 사방을 힘으로 누르던 원(元)의 황금빛 휘장 사이로 붉은 핏물이 홍건(紅巾)의 이름을 빌어 터져 나오기 시작한 지 이태가 되는 때였다.
바야흐로 난세(亂世)였다.
...
북관(北館)사부 한백호
학관 시비 노이(盧梨)
동촌의 나무꾼 초패왕(樵覇王) 장 운
목수현 군문(軍門)집안의 아들 장두생(張斗生)
서사(書士)의 자제 모개용(毛凱勇)
묵수현 북동쪽의 장(長)의 아들 조경보(趙慶寶)
상단 이가보 당주 아들 이일청(李一淸)
백씨 집안 장녀 백양화(白梁華)
염색공 황파파의 손녀 장소소(張騷掃)
묵수현의 삼망팔(三忘八)중 의원(義元), 의종(義宗) 형제
떠돌이 예(禮)
...
"내 사부님께 말씀을 드릴 터이니 사제들과 사매는 일단 맡은 학업에 집중하시게."
별다른 말을 할 수 없음에 장 운은 화가 났다. 이미 열 여섯 나이에 수 많은 목불인견을 봐 왔건만, 늘 돈과 관련된 일은 아무리 부딪혀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더군다나 힘 있고 위세 있는 자들과 부딪힐 때 더더욱 그러했다. 아무쪼록 장 운은 사부가 자신의 예상을 뛰어넘는 재지와 능력을 발휘해 주기만을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알 지 못했다.
소소한 일상의 연못에 떨어진 작은 돌맹이가 숨돌릴 틈도 없이 일파만파를 불러올 것을.
사건의 시작은 백양화의...
...
Comment '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