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파고스 증후군이란 게 있습니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국내 수요자의 입맛에만 맞추다보니 해외 시장의 요구와는 크게 멀어져버린 일본 전자업계를 진단한 용어라고 하더군요.
얼마전에는 정담에서도
‘최근의 재패니메이션도 결국 심각한 갈라파고스화에 빠져 있다.’
는 말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오타쿠’라고 불리는 막강한 구매력을 가진 소수 집단을 대상으로 기획하다보니, 평범한 사람들은 다가서기 힘든 작품들이 늘고 있다는 거죠.
하지만 그런 상태에 빠져있는 건 우리 판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얼마전 [오늘의 베스트]에서도 ~귀환, ~귀환, ~귀환... 이렇게 특정 장르의 작품들이 연달아 금, 은, 동을 마크한 적도 있었죠.
근 몇년 동안 판무 작품을 거의 읽지 않은 탓에 확언할 수는 없지만, 최근 판무 시장은 특히나 유행에 민감하다고 생각합니다. 툭하면 ~물, ~물... 하나 유행하면 봇물 터진 듯 비슷한 설정과 플롯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 현상을 보며,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한가지 방향의 진화가 이뤄지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고도의 ‘대리만족’ 지향.
물론 대중 문학의 어쩔 수 없는 특성이기도 하지만, 과거에 비해 더욱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그런 성격을 드러내는 추세로 보입니다.
과거에는 능력을 얻어야 하는 당위성과 능력을 얻기까지의 과정에 상당 지분을 할애하며 독자의 카타르시스를 유도했다면, 최근에는 ‘다 귀찮고, 그냥 강한 힘!’ 이란 느낌입니다.
...
시작부터 다른 세계의 강한 힘을 가지고 등장한다 (귀환, 이계진입)
엄청난 힘(정보, 지식)을 가지고 시작한다 (회귀, 환생)
뭔지 모르지만 엄청나다. (게임능력치)
세상이 바뀌니 인생역전 (몬스터 헌트)
...
거기에 더해 주인공의 배경과 성격은 더더욱 독자에게 밀착해 있습니다. 복수를 꿈꾸는 멸문의 후손, 구원의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용자, 집단을 짊어져야 하는 엘리트...
이런 과거의 주인공들은 낡고 뻔한 대상으로 외면받습니다.
이제는 현대인을 그대로 닮은, 아니 평범한 현대의 소시민 그 자체가 주인공입니다. 그냥 갑자기 그에게 막강한 힘이 주어졌을 뿐입니다.
‘만약 나한테 힘, 돈, 여자가 생긴다면...’
하는 독자들의 욕구를 그대로 반영하는 거죠.
기획의도가 빤히 보인달까요?
그것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저는 장르소설의 가치는 ‘재미’ 그 자체이며, 거기에 특별한 성찰과 삶의 의미, 교훈 따위는 ‘굳이’ 필요치 않다는 입장입니다.
작가부터 그런 요소를 좋아한다면, 그렇게 쓰는 게 맞습니다.
독자들이 그런 요소를 바란다면, 요구에 부응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판무시장은 계속 축소되어가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환경에 맞춰서 진화하는 게 필연이겠죠.
하지만 진화는 발전이 아닙니다.
특정한 먹이에 맞춰 진화한 팬더나 코알라가 먹이인 대숲이나 유칼리투스 숲이 축소되면서 함께 멸종의 위기에 처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남들은 못 먹는 걸 나는 먹을 수 있지.
단지 남들이 먹을 수 있는 걸 못 먹을 뿐.
지금 구매력을 가진 특정 독자층의 구미에만 맞춰 특화된 작품들은 결국 더 넓은 잠재 구매층을 공략하기 어렵다는 거죠.
‘요새 판무 읽을 거 없다.’
‘재미만 있으면 된다지만, 재밌는 게 어딨냐, 요새?’
하는 독자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결국 장르 소설에 미련을 버리고 떠날 수밖에요.
다양한 독자들이 즐길 수 있는 ‘그릇’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독자들이 계속 이탈이 늘면, 작가가 놀 연못도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독자 취향이 언제까지 유지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요.
물론 팬더나 코알라와는 달리 ‘글’은 얼마든지 변화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미 ‘장르 소설이 다 그렇지’ 하며, 고개를 돌린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오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나마 해결책이 되어 줄 거라는 기대를 받았던 것이 ‘인터넷 유료 연재’입니다.
초기 투자 비용이 종이책에 비해 적기 때문에, 다양한 작가들이 실험적인 성격을 가진 작품들을 내놓고, 그것을 통해 일정한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시스템이죠. 물론, 애초부터 풍부한 구매층에 영합(나쁜 뜻 아닙니다.)한 작품들 보다는 얻을 수 있는 이윤이 적겠지만요.
그런 작가와 작품이야말로 저물어가는 판무 시장이 품고 있는 희망의 불씨 아닐까요?
요즘 플래티넘의 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오가고 있습니다.
물론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문제고, 해결책이 필요하지만, 그게 ‘진입 규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기작만 [플래티넘]에 들 수 있다!
이런 규제는 결국 다수층에게 어필하는 작품군만 가치가 있다는 주장과 다를 게 없는 것 아닐까요?
오히려 비인기작들이 그대로 무너져버리지 않게 붙들어 줄 수 있는 보완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인기작에 한해 [골드] 가격을 할인해준다든지 (‘그냥 분량 2배로 해라’ 할 수도 있지만, 할인이라는 뉘앙스가 주는 기분적 요소, 혜택을 보고 있다는 실감을 무시할 수 없다고 봅니다.)
하다못해 특정 조회수 이하의 작품은 ‘무료’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용해주는 정도라도요.
물론 불성실한 연재 작가에 대한 규제와 거기에 따른 독자의 불만을 무마할 수 있는 대책도 서둘러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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