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장르소설이 대체로 긴 장편이 되는걸 비판하면서 짧고 알찬 글이 대세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주장들은 대체로 긴 글이 당연한게 되면서 글의 질이 심하게 떨어졌고 읽기에도 부담스러워졌다고 말합니다. 일리가 있긴 합니다만, 전적으로 옳은 이야기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가령 예를 들자면 해리포터는 한국 장르소설판의 판형으로 본다면 스무권 정도의 장편 소설이고, 얼불노 역시 스무권 정도이며 아마 앞으로 훨씬 더 늘어나리라 생각되는 장편소설입니다. 그 외에 상당한 히트작인 테메레르 역시 포함되고 SF에서도 파운데이션이라던가, 로봇 시리즈라던가, 추리에서는 셜록 홈즈 연작이라던가, 무협에서는 뭐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만 영웅문이라던가 녹정기라던가. 오히려 이쪽은 짧은 걸작이란걸 찾기가 정말 힘들 지경. 뭐 하여간 어떤 장르, 어떤 시장에의 좋은 작품 가운데서도 한국 장르판에 비견해 별로 꿀리지 않는 긴 장편은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짧은 소설들에 대한 독자들의 인상이 좋은 이유가 달리 있을까요? 그보다 왜 어떤 장르소설은 길고, 어떤 소설은 짧은 걸까요. 뭐 물론 작가가 그렇게 적었기 때문이겠습니다만...(...)
독자로서 짧은 장르소설과 긴 장르소설을 여럿 읽어본 입장에서 말하자면, 이 두 가지 소설은 상당히 선명하게 나눠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건 긴 소설은 캐릭터를 중요시하고, 짧은 소설은 구성을 중요시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소설이 그렇다는건 아닙니다만, 상당히 그렇습니다.
간단히 생각해 보면, 길게 이어진 소설들은 백프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캐릭터의 힘에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습니다. 구성이 가장 중요한 장르소설의 영역은 추리일 텐데도, 교고쿠도라던가, 셜록홈즈라던가, 에르퀼 푸아로라던가. 길게 이어지는 추리소설 시리즈물은 캐릭터가 독자가 글을 읽는 재미의 많은 부분을 책임지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태생부터가 장편을 어느 정도 추구햇다 할 만한 무협이나 판타지의 경우는 캐릭터의 힘이 정말 강할 수 밖에 없죠. 마치 라노벨 같은 평가입니다만, 사실 라노벨이 장르소설의 한 분화된 형태란걸 생각하면, 이런 캐릭터에 기대 이야기를 끌어가다는 경향에서 자연스럽게 나올만한 형태일 것입니다.
게다가 쓰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캐릭터가 있다는 것은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기 정말 편리한 조건입니다. 구성에 대한 고민 없어도 캐릭터만 있으면 어떻게든 이야기는 이끌어나갈 수 있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짧은 소설은? 짧다는 것은 작가의 입장에서 말하면 구성을 맞추어내기 편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캐릭터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가 겪는 사건에 의미를 부여해서 레고의 블록을 쌓아 완성된 하나의 오브젝트를 만들 듯, 이야기와 주제, 그리고 캐릭터를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기 굉장히 좋은 환경입니다. 작가가 시작과 끝을 이미 알고 주된 사건과 캐릭터를 미리 마음에 품고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야기가 길면 자연히 이런 치밀한 구성은 힘들어 집니다. 어떤 작가도 수십권에 달하는 이야기를 전부 마음에 담아두고 한 번에 써내면서 사건을 서로 복합적으로 연결해내는 일은 하기 어려우니까요. 그리고 동시에 이렇듯 구성되기 때문에 캐릭터의 힘과 역할은 약해지는 면모를 띄기 쉽습니다. 그런 작품에서 캐릭터는 작품을 구성하는 피스의 하나일 뿐,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힘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평균적으로 독자가 끝까지 읽고 좋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할 가능성은 이렇게 구성에 공들인 작품일 경우가 많지요. 게다가 긴 작품은 긴 만큼 끝까지 읽기도 힘들고, 완결까지 꾸준하게 완벽하다 싶은 퀄을 유지하는건 삼국지도 못했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짧고 알찬 작품이 지금의 이른바 양판에 대한 대안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 배경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면 로맨스는 어떨까요? 로맨스는 대놓고 캐릭터를 중시하지만 짧은 소설이 대부분이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랑은 길게 이야기할 만한 소재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 마음을 확인하지 못하는 장면이 너무 길면 개연성도 없고 짜증나겠죠. 그렇다고 이들이 사랑하다 오해하고 헤어지는걸 여러차례 반복하면 그것도 매우 화나는 일이겠죠. 그리고 한 사람이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방황하다 하나에게 정착하는 이야기가 너무 길면? 그건 방황하는게 남자든 여자든 욕듣기 딱 좋겠죠. 사랑이 핵심이 되는 이야기라면 이렇듯 아무래도 짧을 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 사랑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작품이 길어지길 원한다면 그 작품에서 사랑은 좀 곁다리가 되거나 사랑만큼 중요한 다른 것을 포섭해서 이야기의 동력으로 삼아야 할 겁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넵. 신조협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장르소설에 적절한 길이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길이는 작품의 장점이나 지향점에 따라 갈라지는 것이겠지요. 캐릭터를 살릴걸 생각하면 처음부터 좀 장편으로 기획하고, 구성에 집중하고 싶다면 짧은 쪽으로 기획한다는 식으로.
한데 재미있는 것은, 혹은 매우 당연한 것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보통 구성보단 캐릭터라는 겁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하겠지요. 우리는 구성에 매료될 수 있어도 공감하고 정말 매력을 느끼는건 캐릭터이기 마련이니까요. 우리는 사람이지 건축물이나 단순한 사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창작자의 입장에서도 잘 만큼 캐릭터는 큰 고민 없이도 수익을 보장해 주는 화수분이라서 구성보단 캐릭터에 집중하는 편이죠. 이런 경향은 점점 더 강해지는 걸로 보여서, 심지어 캐릭터에 집중하기 위해서 한편으로 끝나는 게 당연했던 영화들도 이제는 무시무시한 장편이 당연하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가령 마블이라던가 마블이라던가 마블이라던가... 그 정도 장편이 아니라 해도 캐릭터 써먹으려고 리붓도 당연하다는 듯 해서 작품을 아주 많이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DC라던가 DC라던가 DC라던가... 이쪽은 클래식을 지휘자별로 연주하는 느낌일 정도. 하여간 많은 예시를 여러분도 아실 테니까 더 설명하지 않아도 좋을 겁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좋은 캐릭터는 좋은 작품에서 나오는 법이고, 그 좋은 작품의 캐릭터가 한 작품의 완결 이후에도 생명력을 이어가면서 긴 시리즈가 되는 것이 대체적인 긴 소설의 기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처음부터 캐릭터에 너무 집중하는건 좋은 작법이라 하기 어렵겠지요.
추신.그런 의미에서 얼불노가 정말 해괴한 작품입니다. 상당한 장편이면서 캐릭터는 족족 죽이고. 그러면서도 열광적인 반응을 얻어내고 있죠. 신기~
Comment '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