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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마지로의 만려일작(萬慮一作)

낙조십일영

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일반소설

완결

견마지로
작품등록일 :
2022.05.11 10:12
최근연재일 :
2022.08.29 10:35
연재수 :
1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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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1
글자수 :
749,279

작성
22.07.27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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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음력 오월 스무 이틀 (2)

DUMMY

회색수염의 거한은 머리위에 늘어진 나뭇가지들을 손으로 치우며 짙게 드리운 그림자의 회랑을 지나 앞으로 걸어갔다.

그늘 아래 숨어 수직하는 병사들의 모습이 여기 저기 하나씩 보이는데, 그 수는 많지 않았지만 몸에서 풍기는 기도가 상당히 단련한 사내들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회색수염의 중년은 곧게 뻗은 그늘 아래 돌길을 타고 한참을 걸어 들어갔다.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나무등걸 아래 길은 불현듯 그치고 사내의 앞에 햇살 가득한 돌이 깔린 정원이 나오니, 그 정원의 앞에는 낮게 깔린 기와집이 하나 등장하는데 비록 단층의 가옥이지만 터는 넓었고 유려하게 뻗은 처마의 선과 굵은 기둥이 상당히 공을 들여 지은 곳임을 알 수 있었다.

회색수염의 사내가 그림자 사이로 몸을 드러내고 양달 아래 온전히 자신의 그림자를 보이며 집으로 다가오자, 한 명의 늙은 노복이 하얀 백저포를 두르고 천천히 집안에서 나타나 예를 표하며 그의 앞에 섰다.

“대중대부께서는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회색수염은 가타부타 말없이 흰 옷의 노복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창이 많이 달려있는 집안은 바깥이나 진배없이 환한 햇살이 깊숙이 들어와 사방을 훤하게 밝히고 있었는데, 커다란 방 안에는 진한 향목의 냄새가 그득 감싸고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 놓은 거대한 탁자를 중심으로 사내들이 여럿 앉아있고 그들의 앞에는 찻잔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들어오는 그를 바라보던 사내 하나가 슬쩍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그를 보고 군례(軍禮)를 올렸다.

“오셨습니까. 장군.”

“충용위의 왕창연인가. 아니, 이젠 지일이라고 불러야 하느냐?”

“편하게 부르십시오.”

회색수염이 앉아있는 사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수염을 쓰다듬는데, 그 순간 방의 건너편에서 두 명의 사내가 재빠르게 앞으로 다가왔다.

수염이 허옇게 센 비둔한 노인과 마르고 단단해 보이는 젊은이가 같이 방안으로 들어오며 서 있는 회색수염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데, 두 사람의 얼굴을 보던 회색수염 역시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들어온 사람들에게 예를 표하였다.

“대중대부, 오랜만에 들어온 개경에서 이런 황망한 소리를 듣게 되어 참으로 유감이오이다.”

“황주목께 이런 일을 보여드려 참으로 유감이오.”

회색수염, 황주목 김두북은 앉아있는 사람들과 자신의 앞에서 인사를 나눈 오현도와 그의 아들 오대제를 번갈아보더니 깊은 한숨을 토해내었다. 심사가 불편하다는 것을 직접 내비치는 김두북에게 오대제가 웃음 띤 얼굴로 공손히 말하였다.

“차를 한잔 올려드리리까.”

“이 상황에 무슨 차냐? 술이나 한 잔 가져오게.”

김두북의 눈은 오대제의 뒤에 서 있는 대중대부 오현도를 향하였다.

“이 일에 대해서 말을 해야 할 것이 산더미요. 대중대부. 그대가 애초에 내가 한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게 상황이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지금 이게 무슨 일이오?”

“상황은 그리 나쁘지 않소이다. 사소한 일은 어그러짐이 있을 수 있지만 대계는 착실하게 진행되는 중이외다.”

“착실하게 진행된다고!”

터져나온 김두북의 사자후에 쩌렁쩌렁 집안이 울리며 장지문이 부르르 떨렸다. 집안 사방의 공기가 요동치며 사내의 회색수염이 일일이 곤두서는데 그 모습을 전장에서 본다면 아마 대적한 적은 그 자리에서 무기를 떨어트리고 목숨을 구걸했을 터였다.

하지만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평온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으니 김두북의 호령이 떨어지자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모두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이미 지사(志士)들이 셋이나 죽어 넘어간 걸로 모자라 이번에는 정체까지 까발려졌지 않은가! 황주목까지 군사들이 들이닥쳐 나를 추포하려는 것을 겨우 따돌리고 개경까지 들어왔어! 하루를 꼬박 산 위에서 짐승처럼 머무르다 내려오니 오대부 그대는 지금 가옥까지 모두 수색당하고 집에서 쫓겨나 이렇게 은신처에서 몸을 숨기기에 급급하지 않는가! 이게 무슨 대계인가!”

“일을 처리하다 보면 겉으로는 굽은 길인 듯 보여도 결국엔 곧은 길이 있는 법이외다.”

“유자(儒者)의 헛소리!”

김두북은 이를 으드득 갈고 불꽃이 뚝뚝 떨어지는 눈을 들어 오현도를 바라보았다.

마침 오대제가 작은 술병을 가져오자 김두북은 술병을 그대로 입에 가져가고는 일순간에 쉬지도 않고 벌컥벌컥 한 숨에 술을 다 들이켜더니만 다시 오현도를 보며 이를 드러내었다.

“이 무부(武夫)의 생각을 대부에게 말해도 되겠소? 나는 그런 대계나 정략에 관련된 일에 내 목숨을 같이 건 것이 아니오! 지금 왕실을 능멸하는 저 이성계와 그 졸자들을 한 번에 쓸어버릴 수 있는 계획을 원하였기에 지금까지 그대와 같은 배를 타고 있던 것이지!”

“알고 있소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일을 했어야지! 지금이라도 잘 달리는 준마 하나만 내 앞에 마련해주시오! 그렇다면 내가 대도를 옆구리에 끼고 그대로 말을 달려 남대가를 쏜살같이 가로지른 뒤 역적이 사는 어배동의 담을 단숨에 뛰어넘어 그 놈의 목을 한 합에 끊어 가지고 올 것이오! 그게 내가 생각하는 대계요! 대저 머리가 끊어지면 뱀은 죽는거요! 물론 한참 꿈틀대기야 하겠지! 그렇다고 예전의 위세가 다시 돌아올 것 같은가 말이야!”

김두북은 술병의 술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술병을 탁자위에 쾅 하고 내려놓은 뒤 이를 악물었다.

“그런데 그런 간단한 수를 남겨두고 복잡하고 자잘한 책략으로 귀중한 무장들을 사석처럼 날려버렸으니 이를 뭐라 하느냔 말이오! 병법으로 따지면 실패가 아닌가?”

김두북의 부릅뜬 눈이 슬쩍 찌푸려졌다. 실 같은 주름이 잔뜩 잡힌 눈가에 사내의 회한이 어렸다.

“세 명이 죽었소. 아니지. 유종기까지 합치면 네 명이지! 넷 중에 셋은 내가 그대에게 추천한 이들이오. 그 셋 모두 재주가 출중하고 무력이 뛰어났소이다. 이렇게 개경 시내에서 허망하게 죽을 위인들이 아니오! 외적과 싸우며 군공이 하늘을 뒤엎어도 모자랄 장재(將材)들이었단 말이오!”

그 때, 지금까지 조용히 김두북의 말을 듣고 있던 오대제가 입을 열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그들의 희생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지요.”

“그게 실패인 것이야! 오주부는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아직 대마(大馬)가 떨어지진 않았습니다.”

오대제는 자신보다 머리가 하나는 더 위에 붙어있는 김두북을 보며 차분하게 말하였다. 수염과 머리가 올올이 곤두서 언제라도 집 벽을 뭉개고 밖으로 튀어나갈 것만 같은 야수나 다름없는 사내의 앞에서도 오대제의 목소리는 잔잔한 호수와도 같았다.

“그리고 저는 십영(十英)입니다. 추성(追星).”

인왕 같은 김두북의 얼굴 사이로 실소가 터져나왔다.

“네놈들의 말장난은 슬슬 신물이 난다. 그리고 네놈이 계획하고 있다는 그 대마놀음도 대충은 알고 있지.”

“아신다면 기다려주십시오. 이성계의 목을 따면 뒤에 오는 것은 전란과 파멸이지만 이 일이 성공하면 우리는 화평과 광영을 보게 될 것입니다.”

“힘 없는 화평이 가능하겠느냐. 단순한 위세로 모든 것을 얻겠느냐.”

김두북은 미소를 지으며 보인 이를 한껏 드러내었다. 마치 설산의 백호가 사람을 앞에 두고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았다.

“여기 모인 고수들 말고 믿을 수 있는 사병은 몇 명 정도냐? 대업을 위해 목숨을 내던질 충의로운 이들이 몇이냔 말이다.”

“물불 안 가릴 병사 서른 명 정도가 있소.”

“서른? 개경의 밭이랑 하나를 뒤져도 서른 명보다는 많이 데려올 수 있어!”

“말이 심하구먼. 추성.”

늙은 이위충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노인은 슬쩍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태산같이 앞에 서 있는 김두북을 올려다보았다. 김두북의 시선이 오대제에게서 이위충에게 옮겨졌다.

“삼척제율. 그대도 내 계책이 무모하다 여기는거요?”

“어차피 힘으로 모든 것을 엎을 생각이었다면 우리 모두 이곳에 모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추성 김두북.”

노인의 점잖은 말이 김두북을 타일었지만 회색 머리의 장한은 부드득 이를 갈며 사방에 안광을 뿌려대었다. 하지만 오대제는 그런 김두북을 보면서도 낯빛이 변하지 않았다.

“귀공들만은 못해도 그 서른 명, 최소한 난군(亂軍)들과는 격이 다른 이들이오. 여러분의 손과 발이 되고 필요에 따라서는 여러분을 위해 기꺼이 몸을 방패로 내줄 것입니다.”

오대제의 눈빛이 번득였다.

“여기 모인 분들은 길게는 경효대왕 시절부터, 짧게는 선왕의 시절부터 이씨들의 전횡을 목도하고 그것을 막기 위해 이곳에 모인 분들입니다. 그리고 이 망해가는 사직을 다시한번 세우려고 모인 거요. 동반과 서반의 구분이 없고 귀천의 차이가 없소이다. 오직 충심으로 모였으니 각자의 모든 재주를 목숨과 함께 이번에 바치고자 할 뿐 아니오?”

“가락이 때에 맞으니 구구절절 옳은 말이로세.”

구석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광대 옥동, 최죽이 넋두리처럼 흥얼대며 찻잔을 비웠다. 그 옆에 앉아 말없이 이 광경을 보고 있는 황삼의 껑충한 무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황삼무인은 김두북이 문을 열고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가느다랗게 코 아래에서 턱으로 이어지는 역삼각형의 수염과 가느다란 눈매는 살맞은 호랑이처럼 날뛰는 김부둑의 언동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실로 태산 같은 무게가 느껴지는 사내였다.

사람들의 차가운 반응에 김두북이 잠시 주춤하자 그제야 뒤에서 말없이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대중대부 오현도가 김두북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추성께서는 조금만 기다리시구려. 십영이 길을 터 놓은 상대는 곧 우리 말을 들으러 올 것이오. 그리고 그가 우리의 가장 큰 방패막이 되어줄 것이오.”

“그 놈이 대체 누구기에 그러는거요?”

늙은 오현도가 슬쩍 곁으로 다가와 김두북의 옆에서 뭔가를 읊조리자, 순간 김두북의 부릅뜬 눈이 멍하니 둥그렇게 변하며 오현도를 응시하더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변하여 늙은 대부를 바라보았다.

김두북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혀로 축이며 눈을 빠르게 껌벅거렸다.

“지금 뭐라고 했나? 어처구니가 없구먼. 그 놈이 어떤 놈인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그렇기에 필요한 거요. 그렇기에 우리가 원하는 것이고.”

“오대부, 미쳤는가? 괴수의 수괴와 같이 일을 하겠다고?”

오현도의 눈이 김두북의 눈을 똑바로 맞받았다. 비둔하고 늙은 재추의 눈빛은 결코 전장에서 한평생을 구른 노장의 눈빛보다 못하지 않았다.

“난 이 끔찍한 육도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부처의 가르침뿐 아니라 마군(魔軍)의 요설이라도 받을 거요!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어떤 값이라도 치를 것이요. 나와 내 가족은 물론이고 나와 함께 손을 잡은 여러분의 목숨까지도 나는 같이 화구(火口)에 밀어넣겠소!”

“뭐?”

“그러려고 이곳 개경까지 목숨을 걸고 들어오신 거 아니었나! 추성!”

건장한 김두북을 바라보는 오현도의 신위에는 하나 거칠 것이 없어보였다.

오히려 지금까지 한껏 날을 세웠던 김두북이 말을 잃어버리자 오현도는 그를 보며 정중하지만 엄격한 목소리로 다시한번 그를 다그쳤다.

“앞으로 열흘이오. 열흘간 우리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이곳에서 기다릴 것이오. 그 시간이면 우리를 쫓는 사람들의 칼날도 다시 칼집으로 들어가고 감시도 예전 같지 않을거요. 그 때 우리는 그자에게 다가갈 거요. 그리고 그게 성공하면 우리는 다시 대 고려를 반석위에 제대로 세울 기회를 얻을 것이오. 그 때까지의 대계에 협조해 주시구려.”

“만약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김두북의 말에 오현도의 표정 역시 굳어지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에는 오직 칼과 피가 우리를 대언(代言)할 것이외다.”

문살을 뚫고 들어온 햇살에 몸을 맡긴 여섯 사내의 등 뒤로 그림자가 나와 바닥에 드리워지는데 그림자의 주인들은 모두 말을 아끼고 있었다. 여전히 바깥은 밝기 그지없는 화창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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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음력 유월 열 아흐레(2) +1 22.08.05 238 14 13쪽
86 음력 유월 열 아흐레(1) +3 22.08.04 268 14 14쪽
85 음력 유월 열 여드레 +5 22.08.04 256 15 14쪽
84 음력 유월 열 하루 +2 22.08.03 261 13 12쪽
83 음력 유월 열흘(4) +2 22.08.03 274 12 13쪽
82 음력 유월 열흘(3) +6 22.08.02 267 18 15쪽
81 음력 유월 열흘(2) +1 22.08.02 264 9 13쪽
80 음력 유월 열흘(1) +2 22.08.01 276 12 14쪽
79 음력 유월 여드레(2) +2 22.08.01 274 15 13쪽
78 음력 유월 여드레(1) +2 22.07.29 303 17 11쪽
77 음력 유월 닷새 (2) +7 22.07.29 288 16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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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음력 유월 이틀 +1 22.07.28 294 12 16쪽
» 음력 오월 스무 이틀 (2) +4 22.07.27 313 16 12쪽
73 음력 오월 스무 이틀 (1) +3 22.07.27 302 13 13쪽
72 음력 오월 스무날 +2 22.07.26 299 17 17쪽
71 음력 오월 열 여드레 +5 22.07.26 295 15 14쪽
70 음력 오월 열 이레 +1 22.07.25 308 16 13쪽
69 음력 오월 열 닷새(4) +2 22.07.25 303 11 17쪽
68 음력 오월 열 닷새(3) +6 22.07.22 325 22 13쪽
67 음력 오월 열 닷새(2) +3 22.07.22 294 19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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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음력 오월 열 사흘(7) +2 22.07.21 289 14 14쪽
64 음력 오월 열 사흘(6) +3 22.07.20 309 1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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