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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마지로의 만려일작(萬慮一作)

낙조십일영

웹소설 > 작가연재 > 대체역사, 일반소설

완결

견마지로
작품등록일 :
2022.05.11 10:12
최근연재일 :
2022.08.29 10:35
연재수 :
1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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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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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749,279

작성
22.07.25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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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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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음력 오월 열 닷새(4)

DUMMY

“사람 잡으러 가기에는 아쉬운 날이로다.”

꽃잎이 낙화가 되어 나무아래 사방으로 백우(白雨)가 되어 흩어지는 찰나, 한 떼의 인마가 꽃비를 흩으려 앞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천하의 풍광이 오색으로 물들어 푸른 하늘 누런 도로 위를 화려하게 감싸는데, 그 위에서 말을 달리는 사내들은 모두 굳은 표정이 되어 앞을 보고 있었다.

오직 백해종이 한가로운 말투로 뒤에서 구시렁대자 이를 바라보던 박중철이 낮은 소리로 동접에게 주의를 주었다.

“지금 우리가 놀러갈 때인가?”

“말이 그렇다는 거지 왜 정색인가? 나도 자네 못지 않게 일에는 진심이니 헛다리 짚지 말게.”

박중철은 백해종을 슬쩍 쳐다보더니 이내 말머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크진 않았지만 견태고의 바로 뒤에서 이야기가 나온 터라 견태고가 안 들을 수가 없었다.

견태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상겸을 바라보자 이상겸은 피식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놔두십시오. 저 친구, 저게 동료에게 하는 말버릇입니다.”

“뭐라고?”

“자기랑 같이 들어온 박중철에게만 뭐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깍듯하다니까요.”

견태고는 이상겸의 말에 뭔가를 생각하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 지일 왕창연과 싸울 때를 보니 싸움터에서 몸을 사리는 이도 아닌 듯 보였고 성중관 출신이라고 하지만 남들하고 못 어울리는 부류도 아니었다.

그렇다지만 본인은 정작 나름대로 고관대작 가문 출신이니 뭔가 기묘한 곳에 떨어졌다는 자괴감이 없을 리 없고, 그것을 애꿎게 같이 들어온 박중철에게 화풀이하는 모양새였다.

그나마 박중철의 성격이 단단하고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는 성격이니 저런 식으로 계속 티격태격하여도 별 사달이 없을 뿐이었다.

“놔둬도 되겠나?”

“제가 지켜봤는데 그냥 두셔도 되겠습디다. 지유와 저 사이에 오가는 말하고 다를 게 뭡니까?”

“영 군령이 안 서겠구먼.”

“허, 무슨 말씀이신지 원······”

어느새 사내들의 말은 앵계를 건너 개경 서쪽의 한적한 계곡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계곡의 초입을 지나기 무섭게 길 옆으로 흐르는 앵계를 따라 올라선 커다랗고 높은 담 위로 늘씬하게 뻗어 내린 처마가 보이는 거대한 장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곳은 다름아닌 권문귀족들이 지어 놓은 저택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견태고가 개경에 들어온 이래 한 번도 와 본적이 없는 곳이었다.

도로 역시 깔끔하게 닦여 돌멩이 하나 튀어나오지 않은 길이 수레 두대가 나란히 지나갈 정도로 넓게 뻗어 있었으니, 실로 권세있는 자들의 살림은 바깥 풍경에도 미치는 법이었다.

“뻑적지근한 동리구만그래.”

이상겸이 말에서 내려 주변을 살펴보다 풍경이 영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데, 나머지 척오조 역시 말을 매어 두고 견태고 옆으로 조심스레 모이기 시작했다. 견태고는 품 안의 종이를 꺼내어 둘러보고는 자신의 앞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대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서찰에 쓰여 있는 내용을 확인하였다.

글에 적혀 있는 곳은 이 집이 맞았다. 그리고 대문 밖으로는 어떤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이 집뿐 아니라 동리 자체가 고요하였다.

화창한 날 좋은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묘한 을씨년스러움이 견태고의 등 뒤로 스멀스멀 올라왔다.

견태고는 문 앞으로 다가가 거대한 문의 문고리를 잡았다가 문득 손을 멈추고 천천히 손을 문고리에서 떼었다. 견태고가 천천히 뒷걸음질쳐 문 뒤로 물러서며 이상겸을 나직하게 불렀다.

“이 정도면 뛰어넘을 수 있겠지?”

“행랑이 붙어있지도 않고, 육척 정도니 가능하겠지요.”

“어경순, 왕지균, 백해종. 그리고 기아훈.”

호명된 네 명이 앞으로 나오자 견태고는 이상겸과 함께 담 아래로 가 두 손을 맞잡았다. 그 모양새를 보던 강예구와 장천보가 문 건너편의 담으로 가더니 견태고와 이상겸처럼 서로 손에 깍지를 꼈다.

“넘어가서 바로 빗장을 열고 사방을 감시한다.”

“알겠습니다.”

“경순이와 지균이부터 올라가라. 조심해라. 살수가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니.”

“예!”

나직하게 대답한 어경순이 견태고와 이상겸을 향해 가볍게 달려와 두 사람의 어깨를 잡는가 싶더니 두 사람의 깍지 낀 손을 한 발로 밟고 훌쩍 위로 몸을 날렸다.

어경순은 담 위에 배를 붙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가 자취를 감췄다. 교주 강릉도 원주목 출신의 검객은 몸도 재빠르고 담도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장천보쪽에서 몸을 날린 왕지균도 수박의 고수답게 껑충 담을 타넘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뒤를 이어 백해종과 기아훈이 담을 넘어 들어가자 나머지 밖에 있던 사내들은 모두 칼자루에 손을 얹고 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담 안에서는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왜들 이렇게 느린거야······”

순간,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빗장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커다란 솟을대문이 안쪽으로 천천히 밀려들어갔다.

문틈이 보이는 것과 동시에 견태고와 이상겸이 칼을 잡고 안으로 들어서고 그들의 뒤에 서 있던 홍일국과 장천보, 한형무, 박중철이 활시위를 걸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들 앞에 있는 것은 휑뎅그렁하니 비어있는 널찍한 마당과 기암괴석이 묘하게 배치된 둥근 연못뿐이었다.

사방을 재빠르게 둘러보던 견태고는 먼저 집 안에 돌입한 어경순을 불렀다.

“인기척이 없는가?”

“아무도 안 보입니다. 빈집 같습니다.”

“빈집에 어찌 빗장이 걸리는가?”

왕지균과 백해종이 입을 굳게 다물고 시위에 살을 걸었다. 견태고와 이상겸도 칼자루에 칼을 넣고 천천히 활을 잡았다. 이름모를 새 하나가 연못가에서 푸른 하늘로 날며 울어 대는데, 새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귀에 잡히지 않았다.

“경순이와 일국, 백해종은 내 뒤를 따르고 지균이와 예구, 박중철은 이행수의 뒤에 붙는다. 기아훈과 한형무는 장부장과 함께 후위를 맡는다.”

“알겠습니다.”

견태고는 턱짓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사람들을 인솔하며 천천히 장원의 안으로 들어섰다. 장원의마당은 널찍하고 마당을 경계로 이층으로 솟은 누각이 좌우에 같이 붙어있는데 양쪽 누각에서 활이라도 잡는다면 실로 마당에 모인 척오조는 사지에 들어서는 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견태고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장원의 안으로 조금씩 들어갔다.

일행은 작은 담장을 지나고 또 다른 연못을 지나고 석가산(石假山)이 기묘하게 놓인 정원을 지나 계속 앞으로 지나가는데 여전히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견태고의 뺨으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이상겸 역시 눈만 번득이며 입을 꾹 닫고 시위를 천천히 당기며 앞쪽으로 나아갔다.

척오조원 모두 소리없이 앞으로 본채를 향해 움직이니 마치 몸에서 떨어져나간 그림자가 스멀스멀 앞으로 나가는 듯한 형세였다.

그 때였다. 갑자기 우측에 있던 기아훈의 몸이 옆으로 확 틀어졌다. 거의 동시에 나머지 척오조원들의 몸이 기아훈이 방향을 튼 쪽으로 돌아가며 활시위를 만작으로 당겼다. 기아훈이 쳐다본 것은 본채 옆의 작은 별채 앞이었는데, 그곳에서 그림자 하나가 별채의 기둥 가장자리를 타고 땅에 드리워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홍일국이 이를 악물고 활시위를 당긴 채 별채 쪽으로 다가서고 어경순 역시 방패를 앞으로 돌리고 견태고의 옆으로 다가서는데, 천천히 그림자가 기둥을 타고 앞으로 죽 뻗어나오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이상겸의 눈이 커지며 시위를 뒤로 당겼다.

그 순간, 한 명의 사내가 기둥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내는 흰 저고리와 바지를 입은 중늙은이 사내였는데, 사내는 자신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는 열명 남짓한 사내를 보자 그대로 풀썩 주저앉으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이구 세상에!”

“조용히 해라! 너는 누구냐!”

“세상에! 살려주십시오! 저는 이 집의 하인입니다!”

“우린 창령방 사람들이다! 대중대부 오현도는 어디 있느냐!”

견태고의 말에 하인은 눈을 질끈 감더니 손사래를 치며 재빠르게 말을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주인나리는 안 계십니다! 안 오신지 보름은 넘었습니다요!”

“뭐라고?”

“이 집엔 저 같은 종놈들밖에 없습니다요! 나리도 안 계시고 작은 주인님도 안 계십니다!”

박중철과 강예구가 별채의 옆으로 돌아가며 사방으로 바라보더니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사람들에게 알렸다. 척오조는 활시위를 다시 풀었지만 여전히 시위의 화살은 그대로 얹은 채로 사방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견태고가 하인을 보며 말했다.

“다른 하인들은 어디 있느냐?”

“안채 쪽 행랑에 모두 모여있습니다. 나리가 오신다는 기별이 없으면 모두 그 쪽에서 살림을 합니다.”

“모두 몇 명이냐.”

“마흔 명 정도 됩니다.”

“지금 먼저 이르거니와, 그 중에 외인(外人)이 하나라도 있으면 모든 노복들이 화를 면키 어려울 것이다.”

“아이고, 무슨 말씀이십니까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헌데 창령방에서 왜 우리 나리를 잡으러 오신 겁니까? 우리 나리는 절대 문하시중 대감께···..”

“닥치지 못할까?”

이상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직하게 으르렁대자 하인은 그대로 말문을 닫은 채 눈만 끔벅였다. 이상겸은 한껏 이마에 주름을 잡은 채 사방을 살피던 견태고를 바라보았다.

“어찌 하실겁니까?”

“일단 안채까지 들어가 노복들을 수색하고 증거를 찾아보세.”

겁먹은 하인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사내들이 찾아낸 것이라고는 불문곡직 나타난 험상궂은 사내들의 날붙이에 겁먹은 양순한 하인들과, 먼지 얹힌 서책들과 곱게 다려져 차곡차곡 쌓아 올려진 본채의 이부자리뿐인데, 누구 하나 머문 자리가 보이지 않았고 낯선 이가 출입한 흔적 또한 찾을 수 없었다.

긴장 끝에 남은 허탈함은 피로함을 불러왔다.

견태고는 자기도 모르게 안채 기둥에 등을 기대고 활집에 활을 끼우니 슬그머니 다가온 이상겸 역시 밝은 햇살에 눈을 찡그리며 지친 듯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이 놈들 말대로라면 다른 집에 가도 마찬가지일거요. 용의주도한 놈인데 토끼굴이 세 개만 있겠습니까? 알려지지 않은 다른 곳에 몸을 숨겼겠지.”

견태고 역시 이상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기서 일을 접을 수 없다는 것은 그나 이상겸이나 다 알고 있는 처지였다.

“그래도 일은 마무리를 지어야지. 이곳에 없더라도 다른 곳까지 없으리란 법 또한 없으니.”

“결국 나머지 집들도 가보겠다는 거 아니우?”

탄식 같은 이상겸의 물음에 견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의 심문으로 시작된 하루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화창한 날은 질릴 만큼 길기만 하였다.


*----------*


느지막이 등청했던 밀직제학 이방원은 부하들과 함께 추동의 자택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재추의 회의는 어김없이 오늘도 열렸고 이방원은 밀직사의 입장에서 참석한 뒤 슬쩍 재신들에게 남아있는 정몽주의 당여들을 조정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온 터였다.

“아직도 죽은 역적죄인을 흠숭하는 몇몇 신료가 있다는 소문이 도는데, 이는 실로 참람한 노릇 아닙니까? 여러 고명한 대신들께서 이 일의 끝마무리를 해 주셨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소망입니다.”

재추에서 내밀 수 있는 의견이었지만 굳이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이유는 없는 발언이었다. 이방원은 요즘 자신이 너무나도 감정적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질 지경이었다.

이방원은 분명 이것은 아침나절 창령방에서 있었던 여인의 심문과 견태고와의 문답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사내는 아침의 혈사와 척오조 지유 견태고를 생각하면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견태고는 맡은 일을 충실히 하는 무장이었지만 결코 그 뜻을 상관에게 부합하는 인물은 아니었고, 생각하는 것 역시 이방원과는 딴판이었다. 그런 이가 남도의 시산혈해를 누비고 다닌 칼잡이라는 것이 실로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대저 이방원에게 있어 적이란 남녀노소의 구분이 아닌 적의(敵意)와 보신(保身)의 유무와 가능성일진대, 견태고는 그 두가지 요소를 아직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신창(辛昌)든 가짜 왕씨든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봐야하는 것이 아니냐. 어찌 공맹이 그 안에 들어선단 말이야.”

“영감.”

“되었다. 내 혼잣말이니라. 신경쓰지 말아라.”

“그게 아니라 영감. 앞에 막내 도련님이······”

하인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앞을 보는 이방원의 앞에 푸른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청나귀를 탄 귀티나는 소년 하나가 서 있었다.

노복들과 함께 공손히 시립해 있는 소년은 이방원과 눈이 마주치자 못내 얼굴 가득 번지는 웃음을 참지 못한 채 꾸벅 고개를 숙이며 깊게 인사를 올렸다.

“형님, 퇴청하시는 길이십니까!”

제일 어린 이복동생의 인사에는 반가움과 흠모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순간 이방원의 표정은 자기도 모르게 딱딱하게 굳어졌지만 이내 아이의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긴장이 풀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석이구나. 오냐. 지금 집에 돌아가는 길이니라. 너는 이곳에 왜 왔느냐?”

“저잣거리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여 제가 졸라서 한번 나왔습니다. 그러다 형님의 모습을 보고 이렇게 온 것입니다. 형님!”

말을 마치고 환하게 이복형을 보며 웃는 동생의 얼굴을 보는 이방원은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기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열 다섯의 나이차, 그리고 어미도 다른 아우였지만 방석은 자신을 볼 때마다 늘 기뻐 어쩔 줄 몰라 하였다. 티없기로는 갓 낳은 새끼나 다름없으니 방원은 아우를 볼 때마다 자기 의중과 무관하게 인자하게 어조가 바뀌었다.

“그 나이엔 마땅히 공부에 힘써야지 어찌 저잣거리에서 노는 것을 즐기려 드느냐. 아우는 한눈을 팔지 말고 더 열심히 정진하도록 해라.”

나이 많은 형의 훈계를 들은 방석은 형이 자신을 동등히 대하는 것이 기쁜지 다시 활짝 웃으며 어깨를 뒤로 젖히고 점잔을 빼며 말하였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혼자서도 경전을 읽습니다. 그리고 일전에는 아버지의 앞에서도 경전을 읽었습니다!”

순간 이방원은 머릿속이 하얗게 되며 날카로운 기운이 흉중에서 뻗어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지금 이 순간엔 더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고가 뇌릿속에서 울려퍼졌다.

그러나 그와는 또 다른 무지막지한 욕구가 꿈틀대며 자신의 혀를 멋대로 꿈틀거리게 하였다.


물어봐라. 물어봐야한다. 참인지 거짓인지 물어봐야 하는 것이다.

안된다. 물어서 어쩔 것이냐. 참이면 어쩔 것이고 아니면 또한 어쩔 것이냐.

네가 왜 불신과 혐오의 구렁에 스스로 빠져들어가려 하는 것이냐. 방원아.


결국 공기를 머금고 뻐끔대던 이방원의 입에서 날숨이 말이 되어 아우 방석에게 닿았다.

“아버지 집에서 무엇을 읽었느냐?”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읽었사옵니다.”

이방원의 숨이 턱하니 막히며 가슴에 덜컥하니 보이지 않는 돌 하나가 얹혔다. 사내는 자신의 목 위로 치받쳐 올라오는 알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을 억지로 삼켜 내리고는 자신을 보며 자랑스럽게 웃어 보이는 방석의 얼굴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책을 보았으니 그 뜻을 잘 익히도록 하거라.”

“네, 형님. 알겠습니다!”

“나는 가 보마. 방석이 너도 어서 들어가거라.”

“예!”

방석이 다시 고개를 숙이는 순간, 이방원은 자신의 행렬과 함께 앞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사내는 자신의 이복동생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눈을 부릅뜨고 앞길만을 본 채 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이방원은 자신이 왜 감정적으로 변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견태고나 박감관에 의해 들쑤셔진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이는 예전부터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두려움과 걱정에 기인하는 것이었고, 그 두려움의 봉인을 뜯어낸 것은 다름 아닌 사수시주부 오대제였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걱정과 염려는 하루아침에 없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기우로 그칠 것 또한 아니었다.

“빌어먹을.”

이방원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오며 인상이 무섭게 굳어졌다.

사내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푸른 하늘이 아직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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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음력 유월 열 아흐레(2) +1 22.08.05 238 14 13쪽
86 음력 유월 열 아흐레(1) +3 22.08.04 268 14 14쪽
85 음력 유월 열 여드레 +5 22.08.04 256 15 14쪽
84 음력 유월 열 하루 +2 22.08.03 261 13 12쪽
83 음력 유월 열흘(4) +2 22.08.03 274 12 13쪽
82 음력 유월 열흘(3) +6 22.08.02 267 18 15쪽
81 음력 유월 열흘(2) +1 22.08.02 264 9 13쪽
80 음력 유월 열흘(1) +2 22.08.01 276 12 14쪽
79 음력 유월 여드레(2) +2 22.08.01 274 15 13쪽
78 음력 유월 여드레(1) +2 22.07.29 303 17 11쪽
77 음력 유월 닷새 (2) +7 22.07.29 288 16 18쪽
76 음력 유월 닷새 (1) +3 22.07.28 296 16 12쪽
75 음력 유월 이틀 +1 22.07.28 294 12 16쪽
74 음력 오월 스무 이틀 (2) +4 22.07.27 313 16 12쪽
73 음력 오월 스무 이틀 (1) +3 22.07.27 302 13 13쪽
72 음력 오월 스무날 +2 22.07.26 299 17 17쪽
71 음력 오월 열 여드레 +5 22.07.26 295 15 14쪽
70 음력 오월 열 이레 +1 22.07.25 308 16 13쪽
» 음력 오월 열 닷새(4) +2 22.07.25 304 11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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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음력 오월 열 닷새(2) +3 22.07.22 294 19 11쪽
66 음력 오월 열 닷새(1) +2 22.07.21 322 17 15쪽
65 음력 오월 열 사흘(7) +2 22.07.21 289 14 14쪽
64 음력 오월 열 사흘(6) +3 22.07.20 309 1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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