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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주의 님의 서재입니다.

SF단편소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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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림주의
작품등록일 :
2013.03.18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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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1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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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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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0.16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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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37. 작별인사

DUMMY

한 아이가 나를 올려다본다. 음울한 얼굴. 눈은 무심하다. 그저 주시한다. 시커멓게, 암흑과도 같다. 언제나 바라보던 암흑에 옮은 것 처럼. 그냥 그렇게, 하얗게 올라온 입술을 그저 닫고, 모든 것을 닫고, 침묵과 암흑 속에서, 언제나처럼 그저 주시만하며, 꺼진 불처럼, 시체처럼, 그저 그렇게 바라본다.


"그저 그렇게 나를 잊을거야? 남들처럼 그저 그렇게 나를 조용히 어둠속에 내버리고 잊을거야?"


움직이는 입술이 시리다. 뜨거워야할 것을 뜨겁지 않게 말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뜨겁게 느껴진다. 그저 조용히 하루 날씨를 소소하게 얘기하는 것 처럼 아무런 무게도 힘도 없이 내뱉어진 단어들이, 타오르는 석탄 덩이를 삼켜넘기는듯하다. 뜨겁지 않을 수 없는 말을 시리게 말하기에 오히려 더 뜨겁다.


"그 눈물들. 그 절규들. 그 비명들. 그 메아리들. 등을 돌린채 외면하던 사람들. 어둠속에 내버려두고 태양으로 떠나간 사람들. 그때 맺었던 맹세를 잊은거야? 언젠가는, 언젠가는, 반드시 언젠가는..."


말이 잠시 끊긴다. 입술이 더 이상 시리지 않다. 뜨거움을 감추기 위한 거짓 냉혹함은 어느덧 사라졌다. 내뱉는 단어의 이글거리는 열기에 녹아 사라졌다.


"찢어발겨씹어삼킬씹썅노무새끼들의 모가지를 언젠가 이 손으로 따서 꺽꺽거리며 오줌핥는 개새끼라도 된마냥 애걸복걸하다 좆되서 쓰러지는 꼴을 반드시 보고야 말겠다는 그걸 잊은거야? 그저, 그저... 잠깐의 비참함을 잊기 위해 상상만 했던거야? 상상만으로 끝날걸 알면서도 머릿속 뇌내망상으로나마 나는 힘이 있다는 착각에 취하고 싶었던거야?"


처음으로 내가 입을 열었다.


"응."


아이의 얼굴은 이그러져있었다. 얼음에 금이 갔다. 압도적인 힘에 비틀려 깨졌다. 모든 것을 비틀어 찢어발겨버리는 원초적인 힘이다. 그러자 그 속에 갇혀 있던 증오가 모습을 보였다. 시꺼멓고 시뻘겋다. 갇혀 썩어 시꺼멓고 그러면서도 식지 않아 시뻘겋다. 갇혀 태울게 없어 자기 스스로만 태우면서도 그토록 오랫동안 꺼지지 않고 끓어오른다.


"하! 그냥 한 떄의 일이였다 이거지? 지나갈 일이였다, 이제는 떠나보내야한다, 이거인거지!? 함께 바닥에서 뒹굴 떄는 유일한 구명줄이랍시고 나를 움켜잡고 놓을 생각조차 못하더니만, 이제는 불쑥 컸다고 그냥 떠나가는거야? 이 배은망덕한 썅놈의 새끼야! 나를 그냥 그렇게 간단하게 버리고 떠나가는거냐고! 더 커야하니까, 더 나아가야하니까, 그리고 나는 발목을 붙잡을 뿐이니까!"


"응."


"지랄!"


"투정은 이제 충분히 부렸잖아. 벌써 오년인가?"


아이의 증오는 식었다. 다시 감춰졌다. 그리고 그저 무기력한 회한만이 다시금 드러났다. 타버린 재처럼, 훅하고 불 당장이라도 가루로 비산해 날아갈 것처럼. 달빛처럼, 버려진자의 서글픈 회한이 아련히 푸르르게 드리워진 것 처럼.


"....."


"십오년간 나를 살려줬지만, 오년이나 투정 부렸으면 이제 그만 떠나가야되잖아?"


나는 아이를 조용히 내려다봤다. 아이. 무기력하다. 힘이란 힘은 모두 고갈 된지 오래인 모습. 하루하루 생존하기 위해 악을 지르며 살았었다. 추악하게 뒹굴면서. 온갖 기만과 자기합리화를 갑옷처럼 휘감아야만 사정없이 내질러오는 칼질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다.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하지만 옥상에서 추락해 뭉개진 시체보다는 보기 좋다. 아득히 멀어져오는 의식 너머로부터 온갖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아련하게 울려퍼지는 것보다는 좋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나도 바뀌었다. 더 이상 옛날 같이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 여전히 혼란스럽고 여전히 두렵겠지만 그래도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수 있다. 잠시 비틀거리고, 가끔은 지쳐 쓰러질지언정, 다시금 일어날 힘을 가진채로. 세상과 나 사이에 놓여진 유일한 보호자였던 아이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내 발목을 붙잡고 늘어진다. 교묘한 악마처럼 내 귀에 의심의 씨앗을 속삭이며, 가장 소중한 것 마저도 때려부수고 마침내 나 자신까지 때려부수려는 증오를 부추기며, 그저 축 늘어지고나하는 무기력감을 새겨넣으며, 그렇게 투정을 부린다. 잊지 말라고. 온 세상이 잊고 태양과 달과 우주도 잊을지언정 최소한 너 만큼은, 너 만큼은...


나 자신 만큼은...


자길 잊지 말라고.


"난 잊지 않을거야."


내가 말했다. 아이는 조용히 올려다봤다. 음울한 무기력감. 그것이 출렁이며 흘러넘치는듯하다.


"네가 있었음을, 네가 나를 살려줬음을, 나의 유일한 동반자가 되어줬음을, 잊지 않을거야."


아이는 힘없이, 포기한듯, 고개를 끄덕였다. 달빛처럼, 버려진자의 서글픈 회한이 아련히 푸르르게 드리워진, 밤의 푸른 빛에 조용히 적셔지는 끄덕임이다.


"그럼 이제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갈거야?"


나는 말없이 지평선 너머 한곳을 가리켰다. 사방을 사로잡은 캄캄한 어둠은 한치 앞이나 겨우 볼 수 있을만큼 짙었다. 당연히 지평선 너머 어딘지도 모르겠는 까마득한 곳이 보이진 않는다. 그래서 아이는 되물었다.


"어디?"


나는 그저 가리키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는듯 짧게 답했다.


"저기."


아이는 다시 되물었다.


"그러니까 어디로?"


하지만 나는 똑같이 답했다.


"저기로."


아이는 힘없이 물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잖아. 어디로 가는지, 왜 가는지, 어떻게 가는지. 함께 걸어갈 동반자도 없이, 길을 밝혀줄 등대도 없이, 주변을 밝혀줄 횃불도 없이, 정말로 갈 수 있겠어?"


"걷다 보면 동반자는 만나겠지. 등대가 없다면 짓으면 되지. 횃불이 없다면 밝히면 되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고, 어떻게 가야할지 모르겠다고, 캄캄해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고해서 그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거잖아?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닦아놓은 고속도로로부터 내팽겨쳐졌다해서, 걸어야할 길이 발 아래 보이지 않고 그저 사방에 횡하니 공터만 뚫려있다해서, 길을 걷지 않을 수는 없는거잖아? 걷다보면 최소한 지금 여기는 아닌 곳에 도착하겠지. 그곳이 어디던간에 말이야."


"그러다 더 안 좋은 곳에 도착할 수도 있잖아."


"그럼 그곳을 떠나 다시 걸으면 되지. 결국, 모든 도착점이란, 인생의 도착점이 아니라 그저 잠시 쉬어가고 거쳐가는 곳이 아니야? 힘든 일이 있겠고 아픈 일도 있겠지. 혼란스러워 길을 잃고 방황하는 때도 다시금 오겠지.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안 걸을 수는 없는거잖아. 삶이 무섭다고해서 아예 삶을 포기한다면, 그거야말로 진정..."


눈이 젖어왔다.


"슬픈 일이잖아."


감히 입에 담지 못하던 단어를 담았다. 잊고 싶고 피하고 싶던 단어를 세상에 말했다. 그 단어에는 내가 잊고자하던 것들이, 마치 향수집 상자에 아련한 향수향이 희미하게 배인 것 처럼, 구름처럼 안개처럼 담겨 있었다. 슬픔. 그저 삶이 힘들고 아픈데 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었다. 다른 사람들은 삶을 잘 사는 것 처럼 보였다. 나 혼자 지하에 추방되고 지상과 하늘을 권역이라 거니는 사람들은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힘으로 가득차 있었다. 황금처럼 빛났다. 그것이 그저... 슬펐다. 그냥 나는 이렇다는게, 저 사람들은 저렇다는게, 세상이 이렇다는게, 그냥... 슬펐었다. 그 슬픔은 분노와 증오로서 감췄지만 그럼에도 까마득한 망망대해와도 같았다. 먹먹했다.


"삶의 추악하고 고통스러운면만 겪다가, 그 고통을 이겨내고 아무리 감칠맛 날 지언정 조금이나마 행복한 단맛을 맛볼 기회를 완전히 잃는다는게... 너는 안 슬퍼?"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고통만 겪고 기쁨을 겪기 전에 죽어 고통만을 겪음이 슬프기에, 그렇기에, 아이가 버려진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내가 말 없이 소지품을 추스르는 모습만 우두커니 바라봤다. 넋이 나간듯한 모습. 텅 빈 껍질같은 모습. 그러다 마침내 내가 길을 나서는데 필요할 물품들을 추스르고, 준비를 마치고, 마지막 작별인사를 '잘 있어.' 하고 남기고 떠나려하자, 내가 그냥 떠나게 놓아두면 안 된다는 것을 갑작스레 깨달은듯, 아이는 절박한 다급함으로 나를 짧게 불러 세웠다. 마치 비명과도 같았다. 나는 뒤돌아봤다. 그곳에는 아이가 서 있었다. 모든 껍질들을 내던져버린채, 그저 내가 떠나면 안 된다는, 나 마저도 아이를 떠나면 안 된다는듯... 절박한 슬픔으로 가득찬 모습. 하지만 아이는 나에게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라도 말해서 나를 계속 이곳에 남겨두고 싶다는듯 손가락을 다급하게 비틀며 무슨 말이라도 쥐어짜내려 했지만... 차마 하지 못했다. 그러다, 마침내, 아이는 이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나를 잊지마."


살면서 다시 보지 못할 서글픔에 아련히 물든, 살면서 다시 듣지 못할 구슬픈 메아리. 나는 말없이 뒤돌아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 어둠 속으로, 길을 비추어줄 등대도, 주변이나마 밝혀줄 횃불도 없이, 그저 그렇게, 걸었다. 언젠가 동반자를 만나길 바라며, 잠시나마 쉬어갈 수 있는 어딘가에 도착하길 바라며, 그저 바라기만하며, 불확신, 혼란, 두려움을 나침판 삼아 힘겹게 걸어가는 길.


그 후로 나는 다시 아이를 만나지 못했다.


작가의말

전 저렇게 쉼표를 많이 넣어서 글을 쓰는게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데 독자분들께서는 어떤 느낌인지 혹시 말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쓰라리다해도 감사히 듣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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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3 콘펠로
    작성일
    14.10.18 03:04
    No. 1

    몇번이나 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재미있네요. 소름이 돋았습니다.
    쭉 읽어보다가 느낀건데 과학 쪽에 일가견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초면에 어리석은 부탁이지만, 그 부분에서만 살짝 저를 조금 도와주실 수 있나요?
    현재 투고를 준비하는 장편 SF 소설에 들어가는 과학적 요소들이 조금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핵력과 만유인력을 비교하고 전자와 위성의 관계를 비교하며 원소와 행성의 공통점이 나오는 장면이 있는데, 그냥 그렇다고만 나올 뿐, 하드 SF틱한 설명이 도저히 나올 수가 없네요.
    강림주의님의 작품 1화를 보면 지구가 팽창하는 과정에 세세한 과학적 사실들을 넣으셨는데,
    연륜이나 교육이 차이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네요......
    어쩌면 그 쪽의 재능이 뛰어나서 그런지도 모르구요.
    제 소설에서 이라는 생명체의 진화과정에서 나오는 축소의 원리를 이용해서 사람을 작게 만드는 기계가 있는데, 그냥 그렇다고 설명 할 뿐, 정확하고 납득이 갈 만한 과학적 배경이 깔리지가 않아서 몹시 섭섭하네요......
    제가 원하는건 이런겁니다.
    예를 들면, 피자- 라는 주제를 두고,
    파마산 치즈, 파프리카, 피자 치즈, 페퍼로니......
    이렇게 정확한 정보들을- 물론 틀릴 수 도 있는 정보들을 나열하는거죠.
    흠, 더 자세한 설명을 하자면......
    위에서 언급한 이란 기계가 사람을 작게 만들 수 있다면,
    그 어떤 광선이 어떤 파장으로 어떤 부분을 조작해서 어떻게...... 한다!
    이런 과학적 사실들을 집어넣는겁니다.
    이해하셨는지는 모르겠다만......
    저는 이런걸 부족한 지식으로 인해 쓰지 못한다는거죠.
    강림주의님의 글에는 제가 부족한 그런 점이 아주 완벽하게 적혀있어서,
    혹시나 그 능력으로 저를 도와주실 수 있을까..... 조심스럽게 기대했고,
    그래서 용기내서 이렇게 댓글 적어봅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96 강림주의
    작성일
    14.10.18 15:14
    No. 2

    제 부족한 글을 잘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칭찬이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만큼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다만 제가 지금 컴퓨터로는 댓글이 안 써지는 오류에 시달리고 있어서 폰으로는 도와드리기 힘들 것 같은데 혹시 강호정담에서 채팅방을 찾아 그곳으로 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도착하시면 공일공 칠이팔구 칠이팔칠로 문자 보내서 알려주시고요. 좀 복잡하게 꼬여서 죄송합니다 ㅠㅠ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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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39. 어느 순례자 +2 14.12.15 471 3 12쪽
38 38. 소비주의교 +4 14.10.30 644 7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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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36. 서울의 부족 +2 14.09.17 759 9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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