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카이첼 님의 서재입니다.

서브라임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카이첼
작품등록일 :
2008.11.22 23:02
최근연재일 :
2008.11.22 23:02
연재수 :
118 회
조회수 :
1,231,945
추천수 :
2,226
글자수 :
613,860

작성
06.10.08 22:27
조회
32,187
추천
34
글자
10쪽

여행의 시작(2)

DUMMY

“아, 저기 아저씨...”


갑자기 환전소에 들어온 17세 전후의 아름다운 금발 소녀는 길 잃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표정을 하고 가게 주인에게로 접근했다. 그녀는 양손에 가죽으로 된 작은 주머니를 소중히 쥐고 있었다.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소녀의 모습에 주변의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호기심과 욕망이 뒤엉킨 시선이었다.


“아, 꼬마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환전소 지배인인 클락은 한껏 자상한 표정으로 소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소녀는 머뭇거리며 접대창구 앞에서 가죽 주머니를 풀어 안의 내용물을 쏟아냈다. 촤르륵, 하며 휘황한 귀금속이 쏟아졌다. 환전소를 채우던 소음이 갑자기 멎었다. 그리고 욕망의 시선이야, 욕망 그대로 유지되거나 한층 강화됐고, 호기심으로 그녀에게 집중되었던 시선은 일시에 욕망으로 뒤바뀌었다.


“금화로 바꿔주실래요?”


“아, 아아...”


클락은 얼마 빠져 그렇게 답하고는 그녀가 가져온 귀금속을 살폈다. 그리고는 사람을 불러 그것을 감정하게 했다. 두 사람은 소녀가 듣지 못하는 귓속말을 한동안 교환했다. 이내 틀락은 빙그레 웃으며 소녀에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계산도 해야 하고,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그런데 양이 꽤 많은데 혼자서 가지고 갈 수 있겠니?”


“일행이 있어서 괜찮아요.”


소녀는 밝은 낮으로 말했다. 클락의 눈빛이 예리해 졌다가. 다시 부드럽게 풀어지며, 입술에 머금은 미소와 어울렸다.


“그렇구나. 일행이 있다면 괜찮겠지.”


곧 한 사람이 다가와 상당한 크기의 가죽 주머니를 하나 건냈다. 처음 그녀가 가져왔던 가죽 주머니의 몇 배는 될 만한 크기였다. 그 안에 든 게 전부 금화였으니 그것만으로도 작은 지역의 유지 소리는 들을 수 있을 만한 돈이다.


“자, 수수료를 제하고 이게 다구나. 가져가거라.”


“감사합니다.”


소녀는 밝은 낮으로 클락에게 인사하고는 그 주머니를 짊어졌다. 무거운 듯 얼굴을 새빨갛게 하고 낑낑댔다. 그게 호의에서 비롯되든, 음심에서 비롯되든 간에, 건장한 남자가 많은 공간에서라면 소녀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장면에 의례히 있을만한, 짐을 옮겨 주겠다는 종류의 농 섞인 말도 나오지 않았다. 길드의 사업을 방해한다는 인상을 주었다가 어떤 경을 치르게 될지는 그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곧 소녀는 침묵 가운데 환전소를 빠져나갔다. 문 곁에는 흑색 망토를 걸친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소녀에게서 짐을 받아 어깨에 걸쳤고, 곧 두 사람은 함께 시장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환전소 건물 옆 좁은 골목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는 눈길이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을 따라 은밀하게 걸었다.




돈을 바꾼 소녀는 카린이었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청년은 엘이었다. 두 사람은 환전소에서 돈을 바꾸고 곧장 옷집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간 카린은 이내 즐거워 하며 점원과 담소를 나누며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곧 그녀는 탈의실 안쪽에서 엘을 불렀다. 엘은 귀찮아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붉은 색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자세를 취하고 있는 카린의 모습이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와 정갈한 흰 장갑의 대조가 이끌어내는 격정정인 분위기가 매력적이다.


“어때?”


“음, 예뻐. 보기 좋은데.”


엘은 솔직하게 말했다. 카린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만족스러웠다. 카린은 만족한 얼굴로 헤실헤실 웃으며 단에서 내려왔다.


“헤헤. 점원 언니한테 물어서 제일 유행하는 걸로 산거야. 그 외에도 몇 벌 더 샀어. 엘도 칙칙하게 그런 망토 말고 밝고 화사한 망토로 하나 사는 게 어때?”


엘은 자신의 망토를 가볍게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사교용으로 입는 게 아냐. 노숙이라던가, 비나 눈이라던가 그런 걸 대비해서 입는 거지. 그래서 쉽게 더러워지지 않고, 열을 잘 흡수하도록 색이 검은 거고. 찢어졌다면 몰라도 멀쩡하고 깨끗한데, 새건 필요 없어.”


“그러지 말고 새 걸로 하나 하자. 이왕이면 좀 보기 좋은걸로. 어차피 나랑 같이 다닐꺼면 그런 거 필요 없잖아. 오늘까지도 그랬고. 응?”


카린이 꼬시자 엘은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이내 표정을 풀고 점원에게 말했다.


“으음, 나는 남색으로 망토 하나 주세요. 그리고 남자 속옷 열 벌하고 기름을 잘 먹인 가죽신발 열 컬레도 같이. 사이즈는 일반 성인으로 해 주세요. 얘가 산 옷하고 함께 계산해 주시고요.”


점원은 엘의 말을 듣고 서둘러 계산대로 돌아가 계산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카린이 불만스런 얼굴로 말했다.


“쳇! 뭐야, 결국 칙칙하게! 그러고도 더 서브라임(The sublime-숭고미崇高美)을 찾아 나섰다고 말할 수 있어!”


엘은 피식 웃으며 그녀의 투정을 받아넘겼다.


“레디메이드(ready made-기성품旣成品) 따위에 집착하면서 아름다움을 찾는다고 주장하면 못쓰지.”


“윽...”


“그리고 서브라임은 인간적인 것이 아냐. 인간적인 것에 예속된다면 서브라임이 아니지. 아, 물론 유사인간이라거나, 용이라거나, 하여간 생각할 수 있는 존재들의 것에 속한 것도 아냐. 자구(字句)에 집착하지 말 것. 그것은 주저 없는 신의 발걸음 같은 거거든.”


“뭐야 그게?”


“나도 몰라. 사부가 그러던걸. 불초한 제자는 사부의 말이니 그러려니 할 밖에.”


엘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답했고, 카린의 얼굴은 한층 아리송해졌을 뿐이다.


“저, 손님, 다 합쳐서 금화 열 장에 은화 다섯 장입니다. 동화 이하는 서비스 해 드리고 있습니다.”


그때 계산대로 갔던 점원 대신 지배인이 다가와서 계산서를 내밀었다. 엘은 그것을 보고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 내밀었다. 지배인은 그것을 황송한 표정으로 받아들고는 거스름돈을 내밀었다.


“아, 감사합니다. 여기 잔돈입니다. 그리고 주문하신 물품은 들고 가시기엔 양이 많은데 따로 어딘가에 배달해 드릴까요? 아니면 가게 앞에 마차를 대어 놓으셨다면 그쪽으로 실어드릴까요?”


지배인의 태도는 지극히 정중했다. 당연하다. 금화 열장이라는 엄청난 금액을 서슴없이 내어놓는 고객이다. 어려 보이지만 어딘가의 귀족이나 거상의 자식임에는 틀림없었다. 이런 때 정중하지 않는다면 어디 정중하란 말인가.


“아니요. 그냥 여기 모두 가져와 주세요.”


“예? 아.. 예.”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지배인은 엘이 원하는 대로 그 앞에 주문받은 물품을 모두 가져왔다. 카린의 드레스를 비롯해 망토니 신발이니 속옷이니 해서 상당한 양이었다. 행상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도무지 들고 다닐 양은 아니었다. 의아해 하는 주변의 눈길을 무시하고, 카린과 엘은 주머니를 하나 꺼내 그것을 집어담기 시작했다. 한 큐빗도 되지 않을 작은 주머니였다. 모두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했다가, 이내 표정을 경악으로 이지러뜨렸다. 그 작은 주머니 안에 그 많은 옷가지가 모두 다 들어갔으니 그럴밖에.


“그럼.”


엘은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고 가게를 나섰다. 카린이 그 뒤를 가벼운 걸음으로 쫒았다. 모두 멍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들은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딸랑, 하는 청아한 종소리를 남기고 사라졌다.




두 사람이 막 건물 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길을 지나가던 한 일행 중 한 명이 엘과 우연찮게 부딪혔다. 상당한 거구로 보이던 사내였지만 이상할 정도로 가볍게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그리고 “어구구...”하며 어딘가 부러진 것처럼 신음소리를 냈다. 쓰러진 남자의 동료로 보이는 한동안 살펴보더니 “이런, 발목이 부러졌는데.”라고 걱정스럽게 말했고, 그 말을 듣고 다른 남자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성금하게 검을 꺼내들었다. 챙, 하고 잘 단련된 검이 서늘한 소리를 내며 검집에서 빠져나왔다. 낮의 햇살을 예리하게 베어내는 검날은 갑옷이라도 단숨에 베어낼 것 같았다.


“어이, 꼬맹이, 어떻게 보상할 거지!”


갑작스런 소요에 구경하느라 멈춰섰던 군중이 저마다 주춤거리는 걸음으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살벌하게 검까지 나온 마당에 계속 구경하고 있어봐야 좋은 일이 있을 리가 없다. 그들은 도와줄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출신이 좋아 보이는 저 소년 소녀가 험한 꼴을 당하게 생겼다고 쯧쯧 대며 안타까워했다. 어디서 호위를 잃어버렸는지 모르겠지만, 안 된 일이었다.


“봐, 내 말대로 하니까 되지?”


하지만 멀어져가는 군중들의 걱정과는 달리 카린은 처음과 같이 해맑은 안색으로, 엘을 향해 가슴을 펴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음... 그래. 네 말이 맞아.”


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사람 모두 긴장감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끌리세는 흔히 사용되는 소재나 상황, 대사 등을 말합니다. 한국 무협의 끌리세라면 절벽+기연같은게 있고, 한국 양판소의 끌리세라면 소드 마스터와 9클래스 마법사가 대표적이겠죠. 일본만화 최대의 끌리세는 다다이마(다녀왔습니다.)와 오카에리나사이(어서오세요.)가 있겠습니다.ㅋ


*근데 양산형의 끌리세라 해도 뭐가 양산형의 끌리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맨날 남들이 비꼬기 위해 풍자하는 거나 대충 알고 있을 뿐인지라. 뭐, 하여간 그런걸 잘 사용해 읽을만한 글을 만드는 게 목표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1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서브라임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8 데시크리아 남작가문(4) +47 06.12.13 13,990 41 11쪽
27 데시크리아 남작가문(3) +50 06.12.10 14,023 23 12쪽
26 데시크리아 남작가문(2) +42 06.12.07 14,572 29 11쪽
25 데시크리아 남작가문(1) +33 06.12.04 15,979 23 11쪽
24 어비스(6) +44 06.12.01 15,335 60 13쪽
23 어비스(5) +59 06.11.28 14,354 25 13쪽
22 어비스(4) +34 06.11.25 14,443 25 13쪽
21 어비스(3) +31 06.11.23 14,439 23 13쪽
20 어비스(2) +37 06.11.21 14,684 21 11쪽
19 어비스(1) +35 06.11.19 16,888 21 12쪽
18 마스터 로시테아(6) +40 06.11.15 16,969 18 11쪽
17 마스터 로시테아(5) +37 06.11.13 15,930 18 11쪽
16 마스터 로시테아(4) +39 06.11.12 15,828 19 11쪽
15 마스터 로시테아(3) +34 06.11.09 15,723 18 13쪽
14 마스터 로시테아(2) +35 06.11.08 16,013 15 13쪽
13 마스터 로시테아(1) +41 06.11.05 16,455 17 11쪽
12 사자 기사단(5) +28 06.11.03 15,909 14 12쪽
11 사자 기사단(4) +48 06.10.31 15,872 35 12쪽
10 사자 기사단(3) +31 06.10.29 16,198 15 10쪽
9 사자 기사단(2) +32 06.10.28 16,653 23 10쪽
8 사자 기사단(1) +50 06.10.26 18,989 28 12쪽
7 기사 견습생 류디스(4) +36 06.10.24 19,634 18 11쪽
6 기사 견습생 류디스(3) +37 06.10.20 21,096 41 10쪽
5 기사 견습생 류디스(2) +41 06.10.17 21,184 29 11쪽
4 기사 견습생 류디스(1) +47 06.10.15 26,656 26 13쪽
3 여행의 시작(3) +52 06.10.12 27,517 27 9쪽
» 여행의 시작(2) +41 06.10.08 32,188 34 10쪽
1 여행의 시작(1) +56 06.10.06 63,052 47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