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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블랑 님의 서재입니다.

역대급 무역천재가 사업을 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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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블랑
작품등록일 :
2023.10.16 10:21
최근연재일 :
2023.12.18 19:02
연재수 :
6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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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232
추천수 :
2,170
글자수 :
417,030

작성
23.10.25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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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11화 악연의 고리들

DUMMY

조용한 금요일의 오후였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배송할 세 업체의 물품을 싣고 이 기사는 출발했다.


사무실로 들어와 장갑을 벗고 신발도 슬리퍼로 바꿔 신었다.

잠시였지만 답답하게 조이던 발이 숨을 쉬는 느낌.

온종일 안전화를 신고 미끄러운 바닥을 누비는 현장 직원들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또다시 찾아온다.

윤 반장은 내게 곧 익숙해질 거라 말을 건넸지만.



오후의 사무실은 조용했다.


공장장은 현장에서 오늘 오전에 입고된 원자재를 확인 중.

시간이 상당히 소요되는 작업이라 토요일에도 출근할 거라 했다.

나를 제외한 영업부 직원들은 모두 외근에, 과묵한 경리부 쪽 세 사람은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있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들고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고개를 들고 희미한 미소를 띠며 나를 바라보던 강 부장과 언뜻 눈이 마주쳤다.


“무역일 잘 돼가요?”

“예. 뭐 그럭저럭요.”


멋쩍게 웃음 짓는 나를 보며 그가 슬그머니 기지개를 켰다.


“미국에도 수출 가능해요? 거리가 멀어서 운송비가 만만치 않을 텐데.”

“예. 그래도 샘플은 조금 보내려고요. 수출 계약은 안 되더라도 이게 인연이 되어서 나중에 어떤 식으로 또 연결될지 모르는 일이라...”

“아~. 샘플은 나왔어요? 몇 가지 되는 것 같던데.”


뜻밖에 거래 가능성이 극히 낮은 미국 업체로 보내는 샘플에 강 부장이 관심을 보였다.

영업일은, 특히 내가 맡은 무역과 관련된 것엔 아직 한마디도 꺼내지도 않더니.


“두 가지는 이미 나와 있고요. 남은 두 종류는 다음 주 월요일 오전까지 완료 예정입니다.”

“아...”


희미한 웃음을 짓고 나를 바라보던 강 부장의 자리에 전화가 울리면서 뜬금없는 대화는 끝이났다.



철강의 종류와 제조 공정 자료를 읽으며 반드시 숙지해야 할 것을 뽑아 다시 정리하고 있었다. 몸은 나른했고 식곤증이 몰려왔지만 갈 길이 먼 현실.


커피 한잔을 더 뽑으려고 몸을 일으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 액정창에 떠 있는 이름


[차진석]


진구네 5형제 중 맏형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 신황도로 돌아가 작은 펜션도 하고 피서객들 상대로 낚싯배도 운영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 진구의 통장에서 월급일 다음 날이면 80만 원을 녀석이 이 형에게 송금했다는 것이 언뜻 떠올랐다.

여튼, 어떻게 된 일인지 대화 해 봐야 알 일.


통화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귀에 갖다 댔다.


“여보세요.”

“형이다!”


벌써 낮술이라도 걸친 듯, 부정확한 발음에 걸걸한 목소리.

진구가 그 집 막내고 형제마다 세 살 정도 터울이 있어 진석이 형은 아마 지금 마흔다섯은 됐을 거다.


“왜요?”


아무리 겉모습이 차진구라도 속은 아니다.

난 ‘홍두식’이다.

혈육도 아니고 마지막으로 본적도 까마득한 옛날.

게다가 바쁜 와중에 통화라니...


정말 귀찮다.


“왜요-오? 너 지금 ‘왜요’ 라고 했냐?”


어이없다는 듯 더 거칠어진 말투가 내 귓속에 울린다.

확 끊어버리고 싶지만 그래도 이 몸뚱이 형이니 조금 참아본다.


“전화 왜 하셨어요?”

“이번 달 돈 아직 왜 안 부쳤냐?”

“돈을 왜 형한테 보내요?”


혹시라도 녀석이 독립하면서 형한테 돈 좀 꾼 게 있나 싶어 그래도 차분하고 부드럽게 물었다.


“뭐야? 너! 이 씨발노무새끼 아직까지 내가 해준 게 얼만데!”


다짜고짜 쌍욕부터 내지르는 형이라는 인간.


“내가 다-아 먹여주고 키워줬더니, 이 씨발놈이 뭐? 돈을 나한테 왜 보내? 이 새끼가 죽을라고 환장했나!!”


그의 말에 어이가 없어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이 인간의 목소리가 너무 크고 사무실은 너무 조용한 탓에 다른 직원들이 들을까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향했다.


차진구를 내가 잘 모른다면 ‘먹여주고 키워줬다’는 이 인간의 말을 믿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어렸을 때부터 이 녀석의 집안을 너무나 속속들이 알고 있다.

가진 땅도 없어 우리 할아버지가 산 아래 저수지 옆 논 두 마지기하고 밭 세 되지기 빌려주지 않았나. 농사지어 입에 풀칠이라도 하라고 말이다.


1998년 즈음. 열 살 정도밖에 안 되는 진구 앞세워서 먹을 양식 없다고 우리 집에 빈 됫박 들고 오게 시킨 집안은 그 섬에서도 그 망할 놈의 집구석밖에 없었다.


아무리 궁핍하다 해도 도시도 아니고 섬에서, 허드렛일 아무거나 하더라도 밥은 먹고 살 텐데. 그 집안은 어떻게 된 일인지 밀레니엄이다 뭐다 하는 시대에 보릿고개를 넘고 있나?


그것도 사지 멀쩡한 스물대여섯 먹은 사내놈이 맨날 술은 취해있었다. 그저, 만만한 막내동생 진구, 툭하면 학교도 안 보내고 농사일시킨 거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그런데 뭐? 고생하면서 다 키워놔?


아니 이놈 주변은 이런 개 같은 새끼들만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달려 있냐.

차암. 한심한 노릇이네.


“이 씨이발 좆같은 새끼. 좋은 말로 할 때 돈 보내라!”


회사건물을 빠져나와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는 동안, 이 형이라는 인간은 끝없이 내 귀에 욕을 해댔다.


“여보세요. 진석이형?”


끓어오르는 울화를 억누르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나 홍두식이야! 진구가 아니고. 홍두식 알지? 옆집 살던.”

“이 섀끼가 보자보자하니까 이제 그짓말까지 하고 자빠졌어!”


얼마나 술에 만취했는지 통화하는 나도 술 냄새를 맡을 정도다.

좋게 좋게 말하려니까 안 되겠다.


“아니 이 인간이 술 처먹더니 처돌았나아! 나 홍두식이라고! 누구한데 쌍욕질이야! 지그-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더니 한순간 조용하다.


“이 개애 같은 당신 동생 진구가 내 돈 오천 빌려서 튀었다고! 아주 내가 이개애새끼 잡기만 하면 다리 몽둥이를 부러뜨려 버릴 거야. 씨팔!”


길길이 날뛰는 내 목소리를 들으며 뭔가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만취 상태.

소심왕 차진구가 목소리 높여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었을 터.


“진구가 당신한테 월급 받아 돈 꼬박꼬박 보냈나 보네? 좋게 말할 때 이 새끼한테 받은 돈 다 토해내. 알았어? 당신! 신황도지? 거기 딱 기다려!”


- 뚝


어이가 없다.


씨바 혈육보다 돈 내놓으라는 말이 더 무섭지?

만만한 호구 동생 돈 뜯어내려다가 시껍했을 거다.


“....휴우우우우우”


길게 한숨을 내 쉬고 다시 사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네 주위에는 도움 될 놈 하나 없냐. 진구야. 팔자 하나 드으럽다!”


아니지.

배광식이 놈은 이번에 도움이 좀 되긴 했네.

사장도 내 능력 이상으로 추켜세워주고 있고.


열린 현장 문 사이로 작업 중 힐끗 내다보던 유상록씨가 나를 보고 웃으며 손을 흔든다.


나도 손을 들어 흔들어 보이고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날 보고 저렇게 손 흔들고 인사하는 사람도 있군.


“그래. 이제부터 좀 도움 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보자. 진구야.”



* * *



벽에 걸린 시계가 5:30분을 가리키고 있다.

퇴근 시간.


옷을 갈아입고 슬리퍼를 벗어 놓은 후 낡은 구두를 신었다.

책상을 대충 정리하는데 또다시 휴대폰이 울린다.

액정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배광식]


주위를 언뜻 살펴보았다.


내일까지 납품하기로 된 제품의 생산이 늦어지자 똥줄이 탄 마 대리.

현장으로 달려가 유 반장하고 지금 한바탕하고 있을 터.


내 존재를 그림자 취급하는 공 주임은 업무일지 작성하느라 바쁘다.


공장장과 오 부장은 사장실에 또다시 불려가 아직 내려오지 않고 있으니.

사무실은 아주 아늑하고 평안한 상황.


“여보세요?”


들고 있던 펜으로 메모지 위에 무의식적으로 선을 하나씩 긋는다.


“퇴근 안 하냐?”

“해야지. 왜? 무슨 일 인데?”

“어, 그게...”


무슨 어려운 말이라도 하려는 듯 녀석이 말을 멈추고 잠시 뜸을 들였다.


“뭔데?”

“별건 아니고, 내일 저녁에 고향 친구들 대여섯 모이기로 했거든. 넌, 안 올 거 알지만, 그래도 말은 해주려고.”


그래, 생각해보니 고향 친구들 모이는 자리에 진구가 나타났던 적이 없다.

가끔 배광식이하고는 연락하고 만나는 듯 보였지만 말이다.

자신이 못나 보이는 자리에 나간다는 건 달가운 일은 아닐 것이다.


“누구누구 나오는데?”

“똑같지 뭐. 이번에 두식이가 잠깐 나왔어. 할아버지 장례식 때문에. 이달 말일에 다시 미국 돌아간다는데 그 전에 다 같이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기분이 묘했다.


내가 나오는 자리라니.

6년 전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타인의 눈으로 보는 나는 어떤지 궁금하다.

하지만 또 그만큼 두려움이 스멀거리며 올라온다. 정말 내가 과거의 나를 보러 가도 괜찮은 걸까? 기괴한 일 생기고 그러는 거 아니겠지?


“나는 그냥....”


거절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Home DIY Steel 업체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혹시라도 미래에 고객이 될 수도 있는 업체가 뉴욕에 있네.

혹시라도 과거의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돼 주지 않을까?

뭐 아주 착한 인간이라고 말하긴 그렇지만, 못돼먹진 않았잖아.


그렇지?


“나도 갈게. 시간과 장소만 알려줘.”

“뭐? 진짜?”


뜻밖이라는 말투로 놀라는 배광식.


진구가 없는 자리에서 뒷담화를 즐기던 놈들 모두 생생하게 기억한다.

슬프게도 그중에 나도 있었지만 말이다.


적어도, 이제부터 무시하지 못하는 존재감을 보여주고 와야겠다는 생각.

그래서 가겠다 했다.


그러려면 외모도 적당히 꾸며야 하니 쇼핑도 좀 해야겠네.

통화를 막 끝내는 순간 사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차진구씨 뭐 해요? 얼른 나와요. 봉고차 출발해요.”

“예. 지금 갑니다.”


부리나케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리려던 메모지의 그림이 언뜻 눈에 들어왔다.

가지에 뾰족뾰족한 가시가 잔뜩 박혀있는 나무 한 그루.


무의식의 세계는 참 맹랑하다.


종이를 구겨서 버린 후 문가에서 버티고 서 있는 유상록씨를 따라 부지런히 사무실을 나섰다.



* * *




“새꺄! 네가 훔쳤지?”

“아니예요. 그 돈, 전 보지도 못했어요.”


- 빠악!


사내의 주먹이 내 뺨을 휘갈겼다.

그 한 방에 나는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눈앞에 별이 보인다.

얼얼한 뺨을 만지면서 나도 몰래 입에 고인 침을 뱉었다.

시뻘건 핏물이 침과 함께 튀어나와 바닥 위로 튀었다.


“이 새끼 안 일어나? 이 거짓말만 찍찍하는 새꺄!”


쓰러져 있는 나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사내는 나를 끌어올렸다.


“제가...제가 정말 안 훔쳤어요.”

“이 새끼가 그래도 진짜!”


마치 호랑이의 눈빛처럼 무시무시한 사내의 눈초리.

금방이라도 패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두식이가 말했어. 이 새꺄! 네가 그 돈 훔쳐 가는 거 봤다고! 그래도 계속 거짓말할래?”

‘두식이가....’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솔직하게 빨리 말 안 해?”


그가 벽에 기대 세워져 있던 마포 자루를 움켜쥐었다.


“엎어져! 이 새꺄!”


다음 순간 바닥에 양팔과 다리를 세우고 엎드려 있는 나의 엉덩이에서 불이 튀었다.


“...아악!”


한번이 아니다.

두 번 세 번 연거푸 내 엉덩이 위에 불꽃이 튄다.

살갗이 찢어지는 듯 격심한 통증에 정신까지 혼미하다.

이러다 죽는다. 정말 죽는다.


“선생니임. 제가...훔쳤어요.”


더 이상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안돼! 안돼-애!”


두 손을 뒤로 하고 손바닥으로 엉덩이를 비볐다.

아프지 않다.


다행히 꿈이었네.


“...휴우우우우”


한숨을 내 쉬었다.

땀으로 뒤범벅되어 흠뻑 젖은 온몸.

꿈이라고 해도 너무 생생하다.

아직도 가슴은 두근거리며 심장은 쿵쾅쿵쾅 뛴다.


머리맡에 있던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10월 28일 토요일 06:48


등을 벽에 기대고 앉았다.


마포자루를 들고 노려보던 인간이 누구인지 기억난다.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선생탈을 쓴 그 거지같은 조폭을...


“..설마. 그럼 이 꿈이 진짜 이놈이 겪은 일인 거야?”


깜짝 놀라 다시 차분하게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로 기억한다.

전교생이 겨우 120명이라 한 학년은 한 학급. 그것도 겨우 이십여 명.

선생 셋이 두 학년을 한 반에 넣고 수업을 했다.


그때 담임이 꿈속에 나왔던 인간.

키도 크고 몸도 근육질에 성질도 장난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이 길에서 보면 동네 깡패 두목으로 볼 이미지의 소유자.


그때 나는 동네에서 유일한 마트집 아들과 친하게 지냈었다. 서로 집도 찾아가서 놀곤 했으니.

그리고 그날도 녀석은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숙제하고 돌아갔다.


문제는 녀석이 필통 안에 돈을 넣어놓았다는 것.

이유야 알 수 없지만, 학교에 내야 하는 육성회비를 내지 않고 그 안에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 이전에 전국적으로 육성회비를 내는 것은 폐지되었다.

하지만 육지에서 멀리 떨어져 고립된 낙도에서 알 리가 있나?

내라면 내야지.


한밤중 녀석이 우리 집을 찾아왔었다.

필통 안에 넣어 두었던 돈이 사라졌다고 했다.

물론 나는 그 돈을 보지 못했고, 당연히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 다음날이었다.

담임이 날 사택으로 불렀다.

학교 뒤쪽에 있던 사택 건물로 찾아간 나를 담임은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았다.


지금에야 교권 추락, 갑질 학부모의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끌시끌하지만.

그때는, 그리고 최소한 육지와 동떨어진 신황도에서는 선생은 곧 법이었다.

여전히 6,70년대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섬 어른들.

선생을 마치 대법관처럼 여겼으니 말이다.


아무리 우리 집이 동네 유지라고 해도, 선생은 그 위에 존재하는 존중받는 클라스.


“너 진석이 돈 훔쳤어, 안 훔쳤어?”


‘너 혹시 진석이가 돈 가지고 있는 거 봤니?’ 라는 그런 질문이 아니다.

나 지금 열받았으니 죽기 싫으면 솔직하게 말하라는 표정과 말투.


“저 안 훔쳤는데요. 돈 보지도 못했어요.”


솔직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돌아온 것은 내 뺨을 후려친 선생의 주먹.


분하고 억울했다.

하지만 그것과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공포가 나를 지배했다.


“진구. 차진구도 그날 우리 집에 왔었어요. 선생님.”


얼떨결에 그렇게 옆집의 녀석을 선생에게 팔아넘겼다.

그리고 그 사건에서 곧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난 진구가 돈을 훔치는 걸 봤다고는 하지 않았다.

절대로. 맹세코.

그래도 그게 내가 녀석의 이름을 댄 이유를 정당화 할 수 있을까?


녀석은 절대 믿지 않았겠지?

내가 아주 못돼먹은 인간은 아니라 하더라도 분명 녀석의 눈에 비친 나는 절대로 착한 녀석은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녀석의 심장에 쐐기를 박는 한마디도 수업 중에 하지 않았던가.


철이 들고 가끔은 녀석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나는 녀석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만일 내가 녀석을 만났더라면 용서를 구했을까?

지금까지 내가 품고 있던 생각은 사실일까? 아니면 그저 입바른 정당화일 뿐일까?


오늘 저녁에 과거의 나를 만나보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 *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손니임.”


백화점에서 자켓을 걸치고 거울에 비춰보고 있는 나에게 여직원이 한 말이다.

옷이 날개라더니.

어깨 뽕 좀 들어가고 각이 잡힌 자켓이 허접한 거울속의 모습을 한결 커버해주고 있다.


“이걸로 할게요.”

“고맙습니다. 계산은 저쪽에서 도와드릴게요. 손님.”


키높이 구두와 날렵한 세미 정장 바지에 새 가방을 들고 있는 내 모습.

계산이 끝난 후, 라벨을 잘라 내주는 여직원에게서 자켓을 받아 다시 입었다.


이미 오전에 미용실에 다녀온 후, 백화점 1층 화장품 코너에서 적당히 몇 개를 구매하며 화장 서비스까지 받았다.


건물을 나가기 전 다시 한번 화장실에 들러 몸 전체를 둘러보았다.

그래. 남자도 화장의 덕을 제법 볼 수가 있구나.

거울 속의 모습을 보는 내 입가에 흐뭇한 웃음이 배어 나온다.


하루 만에 돈은 많이 썼지만 그래도 이놈 형이라는 인간한테 80 안 뜯긴 게 얼만가?

녀석에게 내가 주는 투자다.


고향 녀석들이 날 보고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다.

물론 홍두식으로 녀석들을 자주 보긴 했지만,

이 차진구의 모습으로는 처음인 셈.


게다가, 이제 나는 과거의 나를 대하게 된다.

녀석이 지금의 나에게 도움이 되는 놈일까?


‘모든 일에는 일어나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어깨를 쫙 펴고 턱을 당겼다.

마치 이 세상에 부러운 게 없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약속 장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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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2화 뜻밖의 조력자 +3 23.10.26 1,477 42 19쪽
» 11화 악연의 고리들 +4 23.10.25 1,508 35 17쪽
10 10화 얼떨결에 이륙당함 +2 23.10.24 1,531 47 16쪽
9 9화 활주로를 달리다. +2 23.10.23 1,549 45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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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6화 내가 호구같냐? +4 23.10.20 1,697 35 19쪽
5 5화 최종 보스 사장님 +4 23.10.19 1,737 38 19쪽
4 4화 반전의 기회 +4 23.10.18 1,817 42 16쪽
3 3화 최강 빌런 마 대리. +2 23.10.17 1,910 42 19쪽
2 2화 녀석은 개호구였다. +3 23.10.16 2,204 47 17쪽
1 1화 뜻밖의 계약 +10 23.10.16 3,031 54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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