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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각 님의 서재입니다.

FULL OF TEARS AND FIRE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로맨스

커빙
작품등록일 :
2020.07.08 17:29
최근연재일 :
2020.10.02 09:00
연재수 :
4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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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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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06,224

작성
20.07.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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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사랑은

DUMMY

그때 저는 창문으로 북악산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거실에서 들려오는 사람들 소리가 시끄러웠어요. 아버지가 승진하여 축하하는 파티를 열었어요. 그는 중앙정보부 3급 국장으로 승진하여 직원들의 축하를 받는 자리였어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의 주요 간부가 된 거예요. 거실에서 많은 축하객들이 모여 떠들썩한 잔치가 한창이었어요.


외톨이가 돼 버린 피에로, 저는 저도 모르게 방안을 걷기 시작했어요. 철책에 갇힌 사자처럼 저는 작은 방을 한 바퀴 걷고 또 걷고, 계속 걷다가 다음엔 낮은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어요.


'책상을 지나

책장을 지나

침대를 지나

옷장을 지나

거울을 지나

형광등이 반짝이는 빛으로 저를 안내했어요.'


'책상을 지나

책장을 지나

침대를 지나

옷장을 지나

거울을 지나

달빛이 창문으로 들어와 저를 안내했어요.'


'책상을 지나

책장을 지나

침대를 지나

옷장을 지나

거울을 지나

지독한 어둠이 방안으로 들어와 저를 안내했어요.'


저는 눈을 감고 그렇게 달렸어요. 바다 위를 날아가는 듯한 환상에 빠졌어요.

'외로운 새 한 마리가 컴컴한 바다 위를 날고 있어요. 새의 발아래로 높은 파도가 검은 바위절벽을 세차게 때려요. 그 새는 상승기류를 타고 높이 솟아올라 흰 구름 속으로 들어가요. 구름 속에서 그는 지친 날개를 추스르며 길을 찾아요. 그는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하죠. 외로움과 공포에 싸여 그는 몸을 떨며 날개를 접어요. 새는 떨어져요. 그 새는 빠른 속력으로 바다를 향해 곤두박질쳐요.'

저는 그때까지 미치광이처럼 달렸어요.


"안에 있어?"

가희가 문을 두드리며 말했어요.

"잠깐만."

저는 달리기를 멈추고 문을 열었어요.

"들어와."

"오빠, 편지가 왔어, 동준이한테서. 그가 나를 잊지 못하나봐. 내가 도시의 요정이래. 어쩜 좋아. 호호호. 그는 넓은 서울이 도시의 요정인 나로 모두 보이나봐."

그녀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말했어요.

"오, 정말? 잘 됐구나. 동준이가 너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저도 웃으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어요.

"정말 기대가 돼, 동준이의 편지가. 너무 좋아. 이제 살 것 같아."

그녀가 저를 똑바로 쳐다보며 맑은 눈으로 말했어요.

"나도 기대가 된다."

저도 밝은 표정으로 말했어요. 그녀는 기쁜 걸음으로 방을 나갔어요.


'뭘 더 바래?'

저는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서서 우두커니 창밖 어둠을 응시했어요.



1979년 3월, 새학기가 시작되었어요. 도시의 봄은 깡마른 가로수들의 손짓으로부터 시작했어요.


'북극에서 출발하여 몰아쳤던, 날카로운 어름조각들

하얀 하늘을 가로질러 도시의 심장에 떨어져 꽂히고

허공에서 춤추는 눈 송골매, 차가운 하늘을 가로지르는 겨울 독수리

땅을 얼리고 나무를 얼리고 도시를 얼려서

그것들이 끝내 강한 봄을 잉태했어요.'


'혹독한 세월의 고통 속에서 강한 아이가 태어나듯,

따뜻한 봄은 혹독한 겨울의 산물이었어요.'


'봄은 한강의 나룻터에 있었어요.

새신부 같은 봄이 묵묵히 노를 저으니

한강의 두터운 얼음들이 깨지고 흩어져 바다로 흘러갔어요.'


'저는 봄이 이토록 강한 놈인지 몰랐어요.

봄을 재촉하느라

북극의 얼음 결정들이 하늘을 날아다녔고

눈보라는 몰아치다 지친 듯, 봄에게 길을 내어주었으며

한강의 얼음덩어리가 봄이 오는 소식을 전해주었어요.'


'제게도 몸서리치는 봄이 왔어요.

어미 잃고 외톨이가 된 어린 늑대 한 마리

그토록 어둡고 추운 겨울을, 거친 상처를 입으며 맨몸으로 견뎌냈어요.

심장을 찌르던 북극 바람이 작은 소녀를 가져왔어요.

눈앞을 가리던 눈폭풍이 여동생을 안고 왔어요.

머리에 꽂혔던 얼음파편들이 가희를 제게 내어주었어요.'


'제가 사는 동안

저는 시간을 잃어버릴 거예요.

저에게 이제 저만의 시간은 흐르지 않아요.

저는 미래를 만들지 않을 거예요.

저에게 이제 저만의 미래는 사라졌어요.

저는 희망을 몰아낼 거예요.

저에게 이제 저만의 희망은 존재하지 않아요.

저는 꿈을 꾸지 않을 거예요.

저에게 이제 저 자신만을 위한 꿈은 헛된 구름이에요.

저의 모든 것을 봄이 가져갔어요.'


'봄은 너무 예쁜 꽃이었어요.

고통과 고독 속에 피는 그 꽃,

어둠과 달빛 속에 피는 그 꽃,

날카로운 가시와 심한 독향을 지닌 그 꽃,

천사의 나팔 같은 그 꽃,

제 가슴 속에서 불끈 피어났어요.'


저는 봄을 그렇게 맞이했어요. 강철은 봄이 지날 때쯤 공수부대하사관으로 자원입대했고요. 지루한 여름 장마가 시작됐어요. 계속되는 빗줄기가 창문에서 흘러내렸어요.



여름방학 때에 저희 가족은 서해안에 있는 섬으로 여행을 떠났어요. 외딴섬인 입파도까지 가는 정기여객선이 없어 저희는 경기도 화성 전곡항에서 작은 동력선인 낚싯배를 빌려 타고 입파도로 갔어요. 배로 한 시간정도 걸리는 외딴섬이었어요. 주민은 그 섬에서 물고기를 잡고 민박을 운영하는 두 사람밖에 없었어요. 선착장에 도착한 배는 조금 위험하게 일렁이며 저희 가족들을 섬에 내려주었어요.


"저 바다를 봐. 굉장히 넓고 푸르다."

두 팔을 벌리며 가희가 말했어요. 빨간 반팔블라우스와 흰 주름치마를 입고 있는 그녀가 푸른 바다와 맑은 하늘과 함께 서있으니, 풍경이 마치 수채화 속의 그림처럼 보였어요. 작은 무인등대는 나지막한 산등성이에 서있었고, 흰색갈매기가 하늘에서 날아다녔고, 숲속에서는 늙은 소나무가 기지개를 폈어요.


작은 민박집으로 방들이 일렬로 가지런히 지어진 집이었어요. 저희가 문을 열자 창호지라는 두터운 종이가 발려진 미닫이문이 삐걱거렸어요.

"너희들은 바닷가에 가서 놀다오렴. 이따 배고프면 돌아와."

새어머니가 말했어요.

"예."

저와 가희는 간단한 옷으로 갈아입고 바닷가로 갔어요. 민박집에서 30여m 떨어진 바닷가에는 파도가 찰랑거렸고 몽돌이라고 불리는 작고 검은 돌들이 하얀 모래사장을 대신하고 있었어요.


"내 손 좀 잡아줘. 넘어질 것 같아."

가희가 말했어요.

제가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어요. 저는 그때 여자 아이의 손을 처음 잡았어요. 부드러운 촉감을 느꼈어요.

"저기 조개와 바다우렁이가 많이 있다. 그것들을 잡자."

제가 말했어요. 그리고 저는 바닷물에서 나와 해안가 그늘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어요. 저는 그녀를, 바다를, 하늘을 바라보았어요.

"나, 이런 바닷가에서 살고 싶다!"

그녀가 무언가를 몹시 갈망하는 표정으로 큰소리로 말했어요.


'수백 년 된 소나무는 땅에 못 박혀 십자가의 누구를 흉내 내고 어지러운 숲을 구원하겠다고 버티고 있는 것인가. 수천 년의 세월이 지나면 한줌의 재가 되어 다른 생명의 거름이 될 터인데.'


숲속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낡은 구두는 파도에 떠 내려와 죽은 시체처럼 해안에 누워있었어요. 그리고 돛대가 부러진 폐선이 색 바랜 훈장을 가슴에 단 늙은 군인처럼 해안가에 앉아있었어요.

석양은 뉘엿 지고 밤 어둠은 남몰래 찾아왔어요. 그날 밤은 숲속 벌레들의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고 하늘엔 초승달이 애처롭게 떠있었어요.


"모두, 모여!"

다음날 아버지가 사진기를 들고 가족들을 불렀어요.

"우리, 가족사진은 찍고 가야지."

"모두 여기에 서있어."

저희 가족은 처음으로 가족사진을 함께 찍었어요. 그렇게 화려한 여행이 끝나가고 있었죠.


(보고 싶은 가희에게


오늘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쓴다.

지금 밖은 어두운 밤이다.

하늘엔 수많은 별들이 불빛 자랑에 여념이 없고

동쪽엔 작은 달이 고개를 내밀고

낯선 산새가 구슬피도 울고 있다.


나는 미로의 길을 찾는 나그네인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누군가를 찾으며

누군가를 부르며

나는 이 낯선 길을 걷어야 하는가?


저곳에 네가 있을까?

아니, 너는 다른 곳에 있을 거야.


사랑은 내 것이 아니야.

사랑은 가지는 것이 아니야.

사랑은 다른 사람의 것이야.


사랑은

달콤하지도 않고

황홀하지도 않고

그냥 멀리 있는 환상이다.


사랑은

슬프고

외롭고

그냥 허무한 착각이다.


나는 오늘 너에게 편지를 쓰지만,

나는 오늘 너에게 편지를 쓰지만,

나는 오늘 너에게 편지를 쓰지만...


너를 사랑하는 동준이로부터)


저는 동준이의 편지를 들고 가까운 우체국을 찾아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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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왜 내게 이런 형벌을 20.09.18 23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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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돌아오지 않는 마지막 여행 20.09.14 20 0 11쪽
35 어디로든 가야하는 사람들 20.09.11 23 0 10쪽
34 나도 진실을 말하고 싶어 20.09.09 33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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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하나의 작고 순결한 꽃송이를 20.09.04 31 0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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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나의 카나리아, 그대는 아는가 20.08.31 24 0 10쪽
29 창문으로 어둠이 기어들어오고 20.08.28 29 0 10쪽
28 정말 웃기는 일이었어요 20.08.26 27 0 17쪽
27 너는 가희만을 사랑해 20.08.24 34 0 15쪽
26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 20.08.21 31 0 11쪽
25 벼랑 끝에 서있는 기분 20.08.19 32 0 11쪽
24 사람은 사랑을 먹으며 산다 20.08.17 49 0 9쪽
23 더 이상 무엇을 바라는가 20.08.14 25 0 9쪽
22 병사들은 술 취해 비틀거리고 20.08.12 27 0 9쪽
21 그녀의 모습을 한 내 어머니일까 20.08.10 30 0 8쪽
20 잘 가. 애인 대신이야 20.08.07 29 0 9쪽
19 누이의 꿈 20.08.05 27 0 11쪽
18 젊은 노동자들의 승리 20.08.03 44 0 9쪽
17 힘차게 휘날리는 깃발 20.07.31 42 0 8쪽
16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조 20.07.29 58 0 10쪽
15 노동자를 위한 세상은 없다 20.07.27 38 0 11쪽
14 고귀한 그리움 20.07.26 25 0 8쪽
13 젊은이들의 죽음 20.07.25 26 0 12쪽
12 찔레꽃 20.07.24 27 0 12쪽
11 누군가 그리워 20.07.23 26 0 9쪽
10 천국의 문앞에서 20.07.22 33 0 8쪽
9 총소리 20.07.21 51 0 11쪽
8 우리들은 정의파 20.07.20 33 0 11쪽
» 사랑은 20.07.19 38 0 9쪽
6 도시의 요정 20.07.18 31 0 9쪽
5 크리스마스카드 20.07.17 47 0 12쪽
4 가희의슬픔 20.07.16 42 0 7쪽
3 무언가가 새로이자리 잡는 듯 20.07.15 40 0 12쪽
2 여동생 가희 20.07.14 54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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