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

2회차는 아무래도 영화평론가가 되어야겠다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현우(炫宇)
작품등록일 :
2024.04.01 07:36
최근연재일 :
2024.04.26 01:00
연재수 :
20 회
조회수 :
7,122
추천수 :
167
글자수 :
102,724

작성
24.04.25 01:00
조회
239
추천
9
글자
11쪽

원고청탁

DUMMY

백승오는 엷게 웃었다.

피차 바라던 바다. 이산가족 상봉처럼 눈물콧물 쏙 빼는 재회는 사절이다. 어차피 평생 화해할 수 없을 테니.


“지금이라도 나가서 사오시든가. 나 요즘은 아무거나 잘 먹어.”

“쯧쯧. 어렵게 손님 찾아왔으면 좀 져주는 맛도 있어야지. 여전하시구려, 그 고약한 성질머리는.”

“빈손으로 온 주제에 누구한테 성질 타령. 앉아. 커피는 내가 대접하지.”


박 국장은 연구실을 힐끗 훑더니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연구실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엔 부국제 집행위원장, 필름매거진 발족식 사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앙숙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 추억들을 소중히 여기는 모양이다.

스크린쿼터 문제만 아니었다면 지금도 웃으면서 지낼 수 있었을 텐데. 5년 전 저 사진들처럼.


“쓸 데 없는 얘긴 건너뛰고 용건만 말하게. 어인 일로 이 누추한 곳에 왔지?”

“그건 내가 백 감독한테 먼저 해명을 들어야지.”

“해명?”

“무슨 목적으로 공모전에 첩자를 보낸 거야? 자네한테 우리 필름매거진은 한국영화만 추켜세우는 3류 잡지 아닌가?”


백 교수는 껄껄 웃었다. 이는 그가 다른 신문에서 필름매거진을 신랄하게 비판할 때 쓴 표현이었다.


“어때, 퍽 쓸 만 한 놈이지?”

“말 돌리지 말고 이유나 말해. 그 놈 왜 보냈어?”

“굴러다니는 공모전 전단지를 녀석에게 건넸을 뿐인데?”

“우리 공모전은 잡지에다가만 홍보했어. 백 감독이 우리 잡지 애독자셨나.”

“원래 컴플레인은 단골고객들이 많이 하는 법이지. 근데 뽑은 건 자기들이면서 왜 화풀이는 나한테 해. 자네들이 머리 맞대고 직접 뽑은 당선작 아닌가?”


박 국장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곤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뽑은 건 우리들이지.”


백 교수도 따라서 한 모금 들이켰다.


“위로가 될 진 모르겠지만 아주 잘한 결정이었네.”

“뭐?”

“관객들도 더 이상 바보가 아니야. 노골적으로 한국영화만 편드는 억지 비평, 가망 없다. 이참에 영진위 후원 끊고 독립 해버려. 예술엔 국경도 없는 법이야.”


박 국장은 혀를 내둘렀다.


“하여간 틈만 나면 지원 끊어야 한다 소리네.”

“그게 사실이잖나. 경쟁력 갖추려면 홀로서기 해 봐야지.”

“객기부리다 영화업계 그대로 고사해버릴 수도 있어. 난 솔직히 이번 공모전을 진행하면서 더 확신했네. 할리우드와 한국영화는 하늘과 땅이야. 체급도 안 맞는 놈들 경쟁 붙이면 한국영화 쥐어 터질 걸.... 옌장. 이 얘기하려고 온 게 아닌데, 꼭 대화가 그 쪽으로 세네.”


박 국장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자네 제자 좀 쓸 만 하더만. 나이답지 않은 통찰력에 글 실력도 좋아. 몇 마디 나눠보니 영화 관련 지식도 해박하더군.”

“그놈이 인물이긴 하지.”


백 교수가 승자의 미소를 보이자 박 국장이 퉁을 부렸다.


“그렇게 웃을 수만은 없을 걸.”

“왜?”

“통찰력, 글빨, 작품 시의성 해석 모두 다 압도적이었거든. 웬만한 교수보다 녀석의 실력이 더 뛰어난 것 같더만.”

“그게 왜 내가 기분 나쁠 소리야? 우리 교수들 평가도 같네. 그 녀석은 보통의 천재 범주를 넘어섰어.”


백 교수는 지난 주 있었던 미야자키 발표회를 신나게 떠들어댔다.

검증무대를 자처한 차 교수가 완전 사색이 되어 돌아왔다. 가르치는 나 보다 더 미야자키에 대해서 잘 아는 녀석이었다고.

결국 교수들은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고 녀석은 학과에서 단 한 명만 추천되는 학업장려상에 추천되었다.

박 국장은 치열했던 그 검증무대를 전해 들으며, 그 때의 교수들과 마찬가지인 얼굴이 되었다.


“그러니까... 아직 국내에 개봉 되지 않은 미야자키 작품을, 청계천에서 입수해서 리포트로 썼다?”

“그렇다는군.”

“그게 말이나 될 소리야?”


박 국장이 현실을 부정할수록 백 교수의 입꼬리만 올라갔다.

백 교수는 긴 설명 대신 페이퍼 몇 장을 그에게 건넸다.


“이건 뭐야?”

“그놈이 낸 리포트. 그 중에서도 제일 잘 쓴 두 편일세. 한 번 읽어 봐.”


아무거나 집어든 박 국장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교수들이 충분히 의심할 만한 수준이었다. 미야자키 하야오에 대한 평전이 거의 자서전에 가까울 만큼 세세했다.

순식간에 리포트 두 편을 읽은 박 국장이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이게 학부생 리포트라고?

그는 한숨을 크게 쉬더니 오히려 홀가분한 얼굴이 되었다.


“이거 원. 혹 떼러 왔다 혹을 더 붙이고 가는구먼. 아무렴 좋아. 한 마디로 검증 확실히 됐다는 거네.”

“그래, 그러니 의심 지워. 우리도 눈에 불을 키고 찾아봤지만 남의 연구 훔쳐온 흔적은 안 보였네. 그놈 당선작은 분명 그 놈 머릿속에 있던 생각이야.”

“당선작 때문에 찾아 온 거 아니야.”

“그럼 뭐 땜에 이 늙은이를 찾아왔을꼬?”


박 국장은 슬며시 서류 가방을 탁자에 올렸다.

서류가방 안에선 수많은 편지봉투들이 쏟아져 나왔다.


“내 자랑 한 번 하러 왔지.”

“이게 다 뭐야?”

“당선작 발표 이후 독자편지가 쏟아졌거든. 이것도 손에 잡히는 것만 가져온 거야. 독자편지로 사무실이 아주 미어터질 지경이라고.”

“뭐?”

“다들 이번 당선작을 보고 평론이 뭔지 깨달았데. 평론을 보고 영화를 재감상하면 장르가 다시 보인다나 뭐라나.”


필름매거진은 4월호 발행 이후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당선작에 대한 독자들의 소감문이 쏟아졌으며, 5월호 예약판매가 천정부지로 솟았다. 사람은 다 똑같다. 내가 감명 깊게 본 영화를 다른 사람은 어떻게 봤는지, 또 어떤 해석을 하는지에 대해 궁금해 한다.

당선작은 독자들의 이 원초적 호기심을 제대로 달래줬다.

각종 영화이론을 들먹이며 대중성을 잃은 평론이 아니었고, 지나치게 주관적인 해석으로 평론가들의 반발을 사는 글도 아니었다.

답답한 캐릭터에서 되레 스필버그의 숨은 의도를 찾은 큰 그림의 비평이었다.


“흐허헛. 제대로 봤네. 학술 용어 안 쓰고, 문장에 허세 없고, 읽기 쉽고. 이게 그놈 장점이지.”

“그래서 원고청탁을 좀 해볼까 망설였지.”

“원고청탁?”

“우리도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지. 독자들이 평론 써달라 성원인데,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근데 딱 하나 걸렸어. 이게 만약 그놈의 실력이 아니라면 우린 개망신일 수 있다는.”

“그럼 내 대답이 좀 도움 된 건가?”

“덕분에 의구심을 완전히 지웠네. 내일 당장 달려가서 원고 좀 부탁해야겠어.”


백 교수는 껄껄 웃더니 눈을 흘겼다.


“학생이라고 원고료 후려칠 생각 마.”

“아서. 창간 이래 최고의 팬덤을 가진 평론간데 우리가 몸값을 후려칠까. 자네보다 더 받아갈 걸세.”


그는 커피를 피우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마신 커피는 다음에 내가 한 잔 사지. 모쪼록 고마웠네.”


백 교수는 시큰둥하게 등을 돌렸다.


“시시하게 노인네 둘이서 무슨 커피. 뼈다귀에 소주라면 모를까.”


시간보다 무서운 약은 없다.

서로를 매국노, 패배자라 힐난했던 지난 앙금이 조금은 녹아내린 모양이었다.



*



“뭐? 여자친구가 있다고?”

“응. 그렇다더라.”

“말도 안 돼. 걘 집, 학교, 도서관만 다니는 애잖아.”

“원래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잖아. 속은 시꺼먼 놈이었지 뭐.”


정수진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오병규를 들들 볶았다. 그도 그걸 것이 그녀는 좀체 이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다.

성진을 극장에서 처음 만났을 땐 우연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다시 만났을 때 운명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는 호시탐탐 성진에게 다가갈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학기 초부터 각종 사고사건이 터지며 좀체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렇게 중간고사가 끝나고 용기 내어 다가갔을 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그 여자애가 누군데?”

“나도 몰라. 그냥 있다고만 하지 자세한 얘긴 안 해주더라.”


오병규의 배신감은 정수진의 허탈함 보다 컸다.

우정은 시간과 비례 하지 않는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과제도 함께하고, 라면도 끓여먹고, 공모전도 준비하며 둘도 없는 친구 사이로 발전했다 믿는 그였다.

근데 여친의 유무도 모르고 있었다니!


“그렇게 무책임한 소리가 어디 있어? 강성진이랑 너랑 매일 붙어 다니는데 정체를 모른다고?”

“나도 진짜 몰라. 근데 무용과 애들이 눈에 안 보일 정도면 대단한 여자애겠지 뭐.”

“병규야, 너 나한테 돈까스 실컷 얻어먹고 이제 와 이럴래?”

“...한 번 알아볼게. 나도 누군지 궁금해 죽겠다.”


오병규의 3월 학식은 정수진이 책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수진은 한참 씩씩 거리더니 넋두리하듯 말했다.


“정체를 모르겠다... 그럼 혹시 없는 거 아니야. 그냥 다른 애들이 들러붙는 게 싫어서 거짓말 한 걸 수도 있잖아.”


그녀는 오병규에게 눈을 흘겼다.


“병규야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나도 재미없다. 다음 달에 소개팅 시켜주기로 한 거, 갑자기 좀 어렵겠는데?”

“야, 그건 약속과 다르잖아! 내가 뜨문뜨문 성진이 앞에서 네 칭찬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내가 너한테 사준 돈까스만 하겠니?”

“...”

“아쉽다. 그때 사진 보여준 걔 있지? 걔한테도 네 사진 보여주니까 귀엽다고 깔깔 웃더라. 아주 천생연분인데 인연이라는 게 참...”

“내가 뭘 하면 되는데. 방법을 알려줘 뭐든 할게.”


정수진이 새침하게 눈을 떴다.


“강성진 걔 취미가 뭐야?”

“취미? 하아... 걔 취미는 영화...?”

“안 되겠다. 우린 없었던 일로 하자.”

“아이 진짜야! 걔는 영화 보러 가자면 자다가도 튀어갈 놈이야. 사실 다음 주에도 같이 영화 보기로 했어.”

“정말이야?”

“내가 더운 밥 먹고 쉰소리 하겠니. 진짜야.”


정수진은 입술을 씰룩 거렸다.


“좋아. 그럼 그 영화 나도 보러가자.”

“셋이서? 그럼 그림이 좀 이상한데... 그러지 말고 너도 친구를.”

“왜 셋이야? 한 사람이 빠져야지.”

“아...”

“다음 주에 무슨 영화 보러 가기로 했는데?”

“...글쎄, 무슨 이태리 영화라는데 주연배우가, 각본도 쓰고, 감독도 맡고 자기 마누라도 출연시킨 영화래.”

“영화 제목이 가족오락관이야?”

“아니 그... 아, 맞다 <인생은 아름다워>! 걔는 그게 이번 아카데미를 완전히 휩쓸고 다닐 거래.”


개봉 첫 주 만에 북미 전역을 휩쓸며, 최고 흥행 성적을 기록한 영화다. 자막영화에 유독 편견이 심한 미국에선 좀체 찾아 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하나 정수진에겐 이런 얘기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너 분위기 조성 잘해. 다 잡은 물고기 도망가게 하지 말고. 성공하면 네 소개팅은 바로 다음날 시켜 준다.”


오병규의 눈이 어느 때보다 타올랐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2회차는 아무래도 영화평론가가 되어야겠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0 20 +3 24.04.26 233 6 12쪽
» 원고청탁 24.04.25 240 9 11쪽
18 18 24.04.24 314 7 11쪽
17 17 24.04.23 285 10 12쪽
16 16 +2 24.04.22 284 10 12쪽
15 끝나지 않은 중간고사 24.04.19 301 9 12쪽
14 14 24.04.18 300 9 11쪽
13 13 24.04.17 317 9 12쪽
12 비평 공모전 24.04.16 331 8 12쪽
11 11 24.04.15 324 8 12쪽
10 10 24.04.12 338 8 11쪽
9 비평학 24.04.11 346 7 11쪽
8 8 24.04.10 357 7 11쪽
7 7 24.04.09 381 6 11쪽
6 6 24.04.08 386 8 11쪽
5 서울예술종합학교 24.04.05 399 8 11쪽
4 4 24.04.04 408 9 11쪽
3 3 +1 24.04.03 460 9 11쪽
2 격동의 1997 24.04.02 495 10 12쪽
1 시네마 천국 +1 24.04.01 624 10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