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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는 아무래도 영화평론가가 되어야겠다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현우(炫宇)
작품등록일 :
2024.04.01 07:36
최근연재일 :
2024.04.26 01:00
연재수 :
2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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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2,724

작성
24.04.18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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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14

DUMMY

박 국장은 한바탕 웃어젖히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미안하네. 내가 초면에 너무 무례했지? 알다시피 현재 한국영화계는 우라까이(베껴쓰기) 천지라서.”

“아, 아닙니다.”

“당연히 이 당선작도 교수의 첨삭, 아니 대필일 거라 생각했어. 근데 부끄럽구만. 그냥 천재 비평가의 등장이었어.”


의구심이 완전 가신 건지 그는 한동안 칭찬세례를 퍼부었다.

나도 좋은 마음으로 악수에 응했다. 스무 살 풋내기가 이제 막 개봉한 영화를 마치 박사 논문처럼 분석해 버렸으니 의심이 되는 게 당연하다.


“근데 성진 학생이 몸담은 동호회는 어떤 모임이야. 이 비평문이 다 거기서 얻은 지식이라고?”

“그냥 아마추어 모임입니다. 만나면 다 서로 자기 해석이 맞다고 우기는 그런...”

“하하. 프로들 세계도 다르지 않아. 내가 만나 본 비평가, 대학교수들도 다 자기 해석이 맞다 그래. 싸우는 이유도 똑같구먼.”


비평가(Critic)의 어원은 Critical(비판적인)이다. 말이 좋아 평론이지, 실은 매사 불평 많은 심술쟁이들이다.

투덜거리는 사람들끼리 만났는데 어떻게 화합이 이뤄지겠나. 실제로 비평가들끼린 서로 친하게 지내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근데 성진 학생의 비평문은 달랐어. 심사위원 다섯 명이 전부 다 두 손 들더군. 난 그 사람들이 한목소리 내는 걸 처음 봐. 아주 진귀한 경험이었네.”


당선작 발표 기한을 넘기는 경우는 지난 공모전에서도 왕왕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서로 미는 작품이 갈려서 싸웠지 이처럼 주관사와 척을 진 경우가 아니었다.

심사위원들도 바보는 아니다. 암암리에 국산작을 밀어줘야 하는 건 이 바닥의 불문율이다. 하지만 그들은 절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그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기본적으로 영화에 대한 배경 지식이 풍부하며, 자신만의 해석능력도 뛰어난 놈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가능성을 본 것일까?


“가만. 서예종 학생이면 백승오 감독을 아나?”

“아, 네. 비평학 교수님이십니다. 저희 교수님을 아십니까?”

“알다마다. 한 때는 죽고 못 사는 동료였지. 지금은 웬수가 됐지만.”


무슨 사연인지는 안 들어도 알 것 같았다.

이 때 당시 필름매거진은 국내영화육성, 달리 말해 스크린쿼터 유지의 선봉장에 섰던 단체였고 백 교수는 그 대척점에 섰던 사람이다.


“그 양반이 수업시간에 내 욕 안하던가? 뒤끝이 참 긴 양반인데.”

“들어 본 적 없습니다.”

“그럼 막 수업 시간에 스크린쿼터에 대한 비판 같은 건?”


대답할 수 없었다. 백 교수는 틈 날 때마다 한국영화가 이래선 안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이다.

내가 우물쭈물 하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하구먼. 하긴 개가 똥을 끊지 백 감독이 고집을 꺾을까.”

“...”

“그래도 내가 제자 앞에서 흉을 볼 순 없지. 80년대 한국영화는 백승오를 빼고 논할 수가 없어. 영화 이론, 특히나 분석에 있어서는 아직도 백 감독을 따라갈 위인이 없네.”


칭찬은 짧게 끝났지만 백 교수에 대한 존경만큼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백 교수의 마음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이런 비평무대를 소개 시켜줬다는 건 필름매거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단 증거다.


“이런. 또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구먼. 요즘 젊은이들은 나 같은 놈을 꼰대라 부른다지?”

“아닙니다.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성진 학생. 여기 모인 사람들 다 기대가 큽니다. 앞으로 더 좋은 모습 많이 보여주세요.”

“네.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그렇게 꾸벅 인사를 하고 다음 자리로 향할 때, 그가 내 등을 툭 쳤다.


“성진학생. <쉰들러리스트>가 두 번 다시없을 홀로코스트 영화라 했지?”

“아, 네.”

“그럼 영화 하나 추천해주겠네. 다음 달에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작품이 개봉할 거야. 이건 쉰들러랑 정반대의 색깔을 가진 작품인데 진짜 끝내줘. 해외에선 벌써 난리가 났더군. 꼭 한 번 보게.”


유유히 사라지는 그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이미 초고를 다 써놓은 작품인데... 기말고사 용으로.



*



제사보단 젯밥이라고 나는 당선 사실보다 수상 상금 200만원이 더 기뻤다.

98년 4월은 뉴스만 틀면 부도 소식이었던 작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살짝 반등 기미를 보였던 주가가 다시 끝을 모르고 추락했으며, 한국 경제는 이제 끝났다는 종말론이 크게 유행했다.

비단 경제에만 종말론이 유행했던 건 아니다.

세기 말이 다가오자 갑자기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주목받았고, Y2K바이러스가 핵폭탄을 터트릴 것이란 지구 종말론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끔찍하네. 이걸 일 년 반이나 더 겪어야 하다니...’


이 때 당시 서울은 <맨인블랙>의 화성과 비슷했다.

PC방을 던전처럼 꾸며놓는가 하면, 명동엔 부산 앞바다를 연상케 하는 자갈치룩(은색 슈트)이 유행했고, 자유로는 폭주족들이 점거했으며, 압구정엔 오렌지족들이 보이는 여자마다 “야, 타!”를 외쳤다.

경제는 회복할 기미를 안 보이고, 세기 말이라 뭔가 두렵긴하고, 에라이 막살자. 뭐 그런 심정 아니었을까?


“강성진 고객... 어? 그 때 2월에 왔던 그 학생 맞죠?”

“아, 네.”

“세상에나. 대학생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새 이 큰돈을 어떻게 마련했데?”

“장학금을 좀 타서...”

“어머 기특해라. 공부도 잘하는데 그 돈을 저축까지 해?”

“하하...”


창구 직원은 막냇동생 흉을 한참 떠들더니 내게 측은한 눈빛을 보냈다.


“그래서 말인데 성진 학생. 그냥 이 돈 은행에 맡기는 게 어떨까요.”

“네?”

“미안하지만 그 때 성진 학생이 산 주식이 많이 떨어졌어요. 행간에선 정부가 디폴트 선언까지 할 거란 말이 나돌 정도에요.”

“아...”

“내가 정말 동생 같아서 하는 말인데 이 돈 그냥 은행에 맡겨요.”


이 때만해도 주가를 확인하려면 여의도나 증권지점으로 행차해야 했다. 그래서 나도 그때 산 주식을 지금 확인할 수 있었다.

얼핏 전광판을 확인하니 창구 직원 말대로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괜찮아요. 이 주식 전부 사 주세요.”

“그렇담 별 수 없고.”

“아, 잠시만요.”


나는 돈을 갈음하여 다시 그녀에게 건넸다.


“170?”

“네. 30만원은 선생님 말대로 그냥 용돈 쓸게요.”

“선생님이라니! 이래 뵈도 나 작년에 학교 졸업했어요. 내가 재수 했으면 딱 후배 학번이야.”


나는 머쓱하게 웃었고, 그녀는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더니 내게 주식증서를 내밀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코스피는 6월에 바닥을 찍고 2천년대 초까지 폭등한다.

세기말은 한국의 종말이 아니라, 새 도약의 시대였다.



*



“여보, 내가 뭐라 했어. 이 녀석은 된다고 했잖아.”

“칫.”

“서울대 포기하고 자기 진로 선택하는 그 결단력. 이건 보통 용기가 아니야. 자랑스럽다 우리 아들!”


진부하지만 빨간 내복에 양말을 부모님께 드렸다.

보통 이런 건 첫 월급으로 드리는 거라던데, 난 그냥 이 돈을 내 첫 월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뭐 글밥 먹고 살 테니.

아버지는 이미 <필름매거진> 50부를 주문해 시보떡처럼 돌리셨고, 어머니는 상다리 휘어지는 밥상으로 내 수상을 축하해 주셨다.

이에 화답하듯 내가 흰 봉투 두 장을 내미니 두 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냐 이건?”

“두 분께 드리는 용돈이요.”

“아니 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여보, 이럴 때 넙죽 받아 둬. 이 녀석 상금이 200이었어. 10%도 안 되는 돈이라고.”


껄껄 웃는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눈시울을 붉혔다. 그 모습에 마음이 살짝 미어졌다. 1회차 때 딱 이 정도만 하고 살았어도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렸을 텐데.


“영화가 돈도 되고 집안에 도움도 되는구나. 성진 아빠. 오늘은 나도 한 잔 줘. 셋이서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보자.”


맥주 한 병에 곯아떨어진 어머니를 안방에 옮기곤 아버지가 내게 말씀하셨다.


“날카로운 작품해석, 무서운 신예의 등장. 우리 아들 별명이 아주 무시무시하더구먼.”

“제 당선작 읽어 보셨어요?”

“다는 못 읽었는데 심사평은 외울 때까지 봤어.”

“심사평보단 그게 핵심인데...”

“나 같은 까막눈이 뭐 아는 게 있다고. 그냥 잘 쓴 글 같더라.”


김이 팍 샌다. 내 당선작이 자랑스러워서 직원들한테 돌린 게 아니었나?


“아 참. 네 학교에 현수막 붙었다면서? 축, 입상, 영화학부 강성진 비평공모전 당선.”

“그건 어떻게 아셨어요?”

“학교에서 전화가 왔어. 아드님이 몇 째 아들이녜.”


어쩐지. 왜 현수막에 강석두 씨 장남이라 써져 있나 했더니...

이 때 만하더라도 유교사상이 짙게 남아 있었다. 고시 합격 현수막엔 누구네 몇 째 아들이 필수 기입 사항이었다. 가수가 자기 음반에 거주지와 주민번호를 적을 정도로 사생활이란 게 없었다.


“그리고 너 언제 아부지 동사무소에 등본 떼러 와라.”

“등본은 왜요? 학교에서 그것도 제출 하래요?”

“아니, 내가 우리 계장님한테 부탁해서 현수막 붙였거든. 흐흐. 우리 직원들한텐 네가 연예인이야. 와서 사인 좀 해.”


술기운 때문인지 아버지는 아주 흥분한 목소리였다. 정작 내 당선작은 다 읽지도 않았으면서...

근데 뭐 아들이 고시 합격하면 꼭 무슨 문제가 나왔는지 알아야 하나? 합격증만 있으면 되지.


“해서 말인데. 이 돈은 아부지한테 필요 없다.”


아버지는 아까 드린 흰 봉투를 내게 내밀었다.


“이건 그냥 제가 드리는...”

“받은 셈 치마. 어차피 난 이 돈 이상의 재미를 다 느꼈거든. 하하.”

“그래도 그냥 받아 주세요.”

“그니까 받은 셈 치고 내가 너한테 용돈을 주는 거야. 아니 일당이라고 하자. 너 언제 한 번 아부지 사무소로 등본 떼러 와야 돼. 넌 우리 직원들한테 연예인이야.”


아버지의 술버릇은 했던 말을 반복하기다. 이럴 땐 더 이상 입씨름을 해선 안 된다.


“그럼 감사히 잘 쓰겠습니다.”

“근데 성진아. 라이언 이등병인지 뭔지가 그렇게 대단한 영화냐?”

“당연하죠. 이 작품이 전쟁 영화에 종지부를 찍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이걸 뛰어 넘는 전쟁영화? 차라리 햄릿을 뛰어넘는 희곡을 쓰는 게 더 빠를 겁니다.”


전 세계 평론가들이 전쟁 영화는 <라이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말했지만, 실상은 그러지 않았다. 라이언은 그냥 전쟁 영화에 마침표를 찍어 버렸다.


“그렇구먼. 사실 아부지는 그냥 전쟁영화인 줄 알았지, 철학영화인지는 몰랐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그리고 곱씹으면서 봐야 이 감독의 철학이 보여요.”

“결말 다 아는 영화를 두 번이나 보라고? 에잉 쯧쯧. 난 모르겠구나. 근데 그렇게 대단한 영화면 당연히 상도 많이 타겠지?”


아버지의 물음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98년도 아카데미 시상식이라... 말을 말자.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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