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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는 아무래도 영화평론가가 되어야겠다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현우(炫宇)
작품등록일 :
2024.04.01 07:36
최근연재일 :
2024.04.26 01:00
연재수 :
2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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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25
추천수 :
167
글자수 :
102,724

작성
24.04.02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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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
추천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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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격동의 1997

DUMMY

김말숙 여사는 며칠 째 땅이 꺼져라 한숨만 쉬었다.

평생의 자랑거리,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강성진이 최근 부쩍 딴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에휴.”

“왜 또 한숨이야.”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구먼. 왜?”


그걸 몰라서 묻나!

아들 녀석이 방에만 처박혀 있고, 행여나 마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는데 이 무심한 남편은 뭐가 문제인지도 모른다.


“또 성진이 때문이지?”

“알면 당신도 좀 뭐라 말해 봐. 애가 대체 왜 이러지? 우리한테 섭섭한 게 있나.”

“당신이 자꾸 그러는 게 애를 더 섭섭하게 하는 거야.”

“뭐?”

“수능 끝난 고3이 마냥 좋기만 하겠어? 이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는 어떤 인간인지 고민이 들겠지. 누구나 다 겪는 성장통이라고.”


김말숙 여사는 화병 난 환자처럼 가슴을 쳤다.

내가 이렇게 무심한 아빠하고 어떻게 애를 키웠을까.


“성진이는 그런 성장통이 아니야. 며칠 전에 애가 갑자기 우리 보더니 꺼이꺼이 울었지? 어머니, 아버지 죄송합니다. 너무 죄송합니다 하면서.”

“나쁜 꿈을 꿨다잖아...”

“그 뒤로 우리한테 엄마, 아빠라 부른 적 있어?”

“그거야 이제 애도 어른이 됐으니까...”

“어이그 이 화상! 아빠는 아버지가 될지 몰라도, 엄마는 평생 엄마야. 애가 이상해진 거라고.”


아버지 강석두는 슬며시 입을 다물었다.

듣고 보니 아내의 말 대로 최근 아들의 거동이 수상하다.

특히나 수능 성적표가 나온 날. 성진이 세상 떠나가라 울기에 처음엔 수능을 망쳤나 싶었다. 하지만 성적은 서울대를 뿌시고 갈 성적이었다.


“속상해 정말. 나는 처음에 애가 수능을 망쳐서 우리 피하는 줄 알았어. 근데 성적표 받아 보니 서울대를 문 뿌시고 갈 성적이야.”

“당신이 참 잘 키웠지. 고등학교 내리 전교 1등도 놓치지 않았고...”

“성격은 또 얼마나 살가운데. 얘는 아들이 아니라 딸이야. 그 흔한 사춘기도 한 번 안 겪고 얼마나 나한테 조잘조잘 말을 많이 한 줄 알아?”

“고 녀석이 그런 면이 있긴 했지. 남자애 치고 감수성이 좀 유별나. 근데 사내새끼가 그리 눈물 많으면 못 쓰는데.”

“여보!”

“헙...”

“눈물이 많다는 건 공감능력이 뛰어나다는 거야. IQ, EQ, 공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애라고.”


아무래도 이 대화가 오래 지속 돼서 좋을 게 없다.

강석두는 운전대를 꺾으며 운을 뗐다.


“여보 그럼 오늘 내가 애랑 얘기 좀 해 볼게.”

“당신 같이 무심한 사람이 무슨.”

“때론 적당히 무심한 게 애한테 더 편해. 그리고 녀석도 이젠 다 큰 사내새끼야. 요즘 IMF다 뭐다 해서 진로 때문에 고민하는 걸 수도 있어. 이런 고민은 아버지가 들어줘야지.”


김 여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무슨 얘기 나눴는지 나한테도 꼭 얘기해야 돼. 하나도 빠짐없이.”

“약속할게. 자, 얼른 집으로 가자. 애 기다리겠다.”



*



회귀했다, 1997년으로.

하루아침에 난 인생의 가장 슬픈 순간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회귀해 버리고 말았다.

대체 왜?

1997년은 전례 없는 외환위기가 강타하며 집집마다 곡소리가 끊이질 않았던 시대다. 하지만 공무원 부모님을 둔 내게 이런 슬픔은 예외였고, 도리어 수능이 끝났다는 해방감에 가장 걱정 없이 살았던 한 해다.


‘내 얼굴이 이렇게 탱탱했었나?’


거울을 볼 때마다 놀라는 중이다.

휑했던 정수리엔 머리카락이 다시 풍부해졌다. 뱃살도 없어졌으며, 피부도 밝아졌다. 이 정도면 내일 당장 여자친구를 사귈 수도 있겠다.

뿐이겠는가.

시시콜콜 괴롭히던 만성피로, 어깨 결림, 허리 디스크가 싹 달아났다. 몸이 건강하니 매일 기분도 좋다.

하지만 건강한 신체로 부모님을 뵀을 땐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말았다.

한 번 늙어 봤더니 더 잘 보인다. 어머니 눈가엔 이미 잔주름이 자리 잡았고, 아버지의 정수리는 이미 휑해져 있었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부모님도 늙어가고 있다는 걸.

후회스러웠다.

성공하면 떵떵 거리며 살게 해주고 싶었는데, 부모님은 성공은커녕 하나뿐인 자식 결혼식도 보지 못하고 가셨다. 나만한 불효자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대성통곡을 하고 난 뒤 나는 부모님과 데면데면해졌다.

뵐 낯이 없어서다.

그리고 난 정리를 해야 했다. 대체 내게 이런 기연이 왜 생긴 걸까?


-똑똑.


생각에 한창일 때 노크소리가 들렸다.


“자니?”

“아, 아버지.”

“통닭 한 마리 사왔는데 나 혼자는 못 먹을 것 같아서. 네 엄마는 계모임 나갔다.”

“저도 밥을 먹어서...”

“사실은 술친구가 필요해. 너 아부지랑 술 한 잔 하자.”

“아... 네.”


식탁에 앉으니 충격적인 비주얼의 닭 한 마리가 보였다.

옛날 컨셉을 잡고 튀기는 21세기 치킨이 아니라, 진짜 세기말에만 볼 수 있었던 순수 통닭이다.

누룽지처럼 꺼무튀튀한 비주얼에 고소한 들기름 냄새. 그리고 케첩이랑 마요네즈로 대충 버무린 양배추... 하지만 내가 확실히 늙은 놈이긴 한가 보다. 통닭보단 그 옆에 있는 소주에 더 침이 꼴깍 넘어갔다.


“요녀석 보게.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아, 아니에요.”

“아니긴 뭘. 술 따르는 게 벌써 한두 번 마셔본 게 아닌데. 언제 마셔 봤어?”

“...수학여행 때.”

“흐허허. 예나지금이나 나쁜 짓은 다 수학여행에서 배워오네.”


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었다.


“암- 너무 숙맥으로 사는 것도 좋은 게 아니야. 사내새낀 적당히 마실 줄도 알아야 돼. 대신 너 담배는 배우지 마라.”

“네. 안 그래도 이번엔 끊어 보려고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직 피우지는 않는데.”


젠장 말이 자꾸 꼬인다.

사실 내가 술·담배를 처음 배운 건 대학교 오티였는데. 괜히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있다.


“됐다, 인마. 이제 너도 어른인데 나한테 그런 얘기 시시콜콜 안 해도 돼.”

“...죄송해요.”

“진짜냐?”

“네. 정말 죄송해요.”

“그럼 우리 아들이 학교 다닐 때 날라리였다는 거 다 밝혀졌으니, 기왕 이리 된 거 더 진솔한 얘기 좀 해볼까?”


아버지가 술잔을 비우며 내게 돌렸다.


“엄마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더라. 하나 밖에 없는 우리 아들이 좋은 성적 받고도 의기소침하다고. 근데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이야. 그런 시국이기도 하고.”

“...”

“혹시 진로 문제로 그런 거면 아버지랑 얘기 좀 할래?”


불현 듯 옛 생각이 났다.

대학교 졸업반, 취업을 포기하고 영화인의 길을 선택할 때.

어머니는 길길이 날뛰며 한동안 곡기를 끊어 버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다. 얼마간 반대하셨지만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더라며 내 앞길을 응원해줬다. 아버지의 끝없는 설득과 조금씩 성장해 가는 내 출품성적으로 결국 어머니도 나의 길을 응원해주셨다.

그때 아버지는 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기둥이었다.


“아버지... 저 사실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랬기에 난 더 진솔하게 얘기를 꺼낼 수 있었다.


“저 영화 하고 싶습니다.”

“영화?”

“네. 그래서 대학은 서울예술종합대학교로 가고 싶어요. 공부하면서 전문 비평가가 되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충격일 것이다. 지금까지 한 공부를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겠다니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영화라.”


아버지는 쓰디 쓴 술을 비웠다.


“그게 난 뭔지 모른다만... 인생은 항상 플랜B가 중요해. 학벌은 평생 중요할 거라고. 일단 서울대에 진학하고 나중에 하면 안 되겠니? 국문과든 뭐든 관련 전공 많잖아.”

“영화랑 문학은 많이 달라요. 그리고 전 어떤 전공을 하든 영화를 할 겁니다. 졸업장 하나 때문에 제 4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전생에 나를 가장 응원해줬던 아버지도 결국엔 내가 서울대 졸업장이 있으니 응원해주셨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그 수준을 뛰어 넘어, 아예 졸업장도 포기하겠다는 거다. 당연히 받아들이실 수 없겠지.


“그럼... 아버지가 하나만 묻자. 네가 만약 그 분야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너는 네 밥벌이를 어떻게 할 거니?”


숨이 턱 막혔다. 방법이 없어서가 아니다.

너무 차고 넘쳐서...


“이런 말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사실 마음만 먹으면 재벌 회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뭐, 뭐?”

“지금 당장엔 설명드릴 수 없어요. 근데 제가 밥벌이를 못하진 않을 겁니다.”


차고 넘쳤다. IMF로 폭락한 주식들만 쓸어 모아도 떼 부자가 될 것이다.

사실 복잡하게 갈 것도 없다. 온갖 거 다 해보다 정 안되면 가상화폐라도 사야지.

적어도 2회차엔 절대 불효자로 살지 않을 것이다.


“흐하핫. 패기 한 번 좋구나. 그래, 그럼 해 봐라. 아버지는 너 응원한다.”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렇게나 쉽게?


“왜? 아버지가 네 꿈에 반대 할 줄 알았니?”

“그건 아니지만...”

“나는 너를 잘 안다. 오히려 너희 엄마가 널 몰라. 네 입에서 그 말이 나올 정도면 절대로 널 막을 수 없다는 거야. 그럼 그냥 최선을 다해 응원을 해 줘야지.”


정말 그 이유가 다 일까? 아버지도 자식에 대한 욕심이 컸던 사람인데.


“성진아, 사실 네가 영화하는 게 좋아서 애비가 허락하는 게 아니다. 그냥 살아보니 인생이 그러더라. 너희 할아버지는 아빠한테 만날 육사 가라고 노래를 불렀어. 가면 무조건 출세한다고. 근데 정말 그러니?”


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하나회는 모조리 다 숙청을 당했다. 지금은 YS정권 말기였지만 차기 대선 후보 중에 군인 출신은 없다. 이제 군벌의 시대는 끝났다.


“육사는커녕 아빠는 대학도 안 나왔다. 경쟁이 싫었거든. 박봉이어도 노후보장 된 9급 공무원이 좋았다. 지금도 아주 만족스러워.”

“...”

“당연히 처음엔 나도 부끄러웠지. 동창들은 좋은 대학 나와서 대기업 입사하고 차장, 부장, 임원 달고 다녔으니. 근데 그 친구들 지금 어떻게 된 줄 아니?”

“...쫓겨나셨겠죠.”

“그래, 이제 막 자식새끼들 등록금 벌고, 결혼자금 벌어줘야 할 나이에 구조조정 당했더라.”


1997년.

양복 입고 공사장으로 출근하는 가장들이 넘쳐나는 시대였다.

시험을 망쳐서 오락실에 갔더니 아버지가 계셨다는 노랫말이 떠돌았다.

학교 앞 문방구에선 100원짜리 IMF아이스크림이 불티나게 팔렸다.


“누가 알았겠어? 나 때는 시켜줘도 안 하는 게 공무원이었는데 이렇게 안정적인 직업일 줄. 이게 다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가 아니다. 그냥 내 팔자대로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야.”


아버지는 술잔을 비웠다.


“세상에 정답은 없더라. 우리 아들놈이 그런 진로를 선택했다면 뭔가 전망을 봤겠지. 아버지는 전적으로 찬성이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근데 하나만 물어보자. 뭐가 되고 싶다고?”

“평론가요. 영화를 분석하고 숨은 의미를 대중들에게 설명해주는 직업이에요.”

“아니, 될 거면 감독이나 할 것이지 왜 그런 거를 해? 넌 사실 이 애비를 닮아서 배우를 해야 돼.”


제겐 재능이 없었거든요.


“그냥 꼭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아무래도 전 만드는 재주는 없는 것 같은데, 보는 눈은 있는 것 같거든요.

“무슨 놈의 60먹은 노인네처럼 말하는구나. 아닌 말로 네가 재능이 없는지 있는지 어떻게 알아. 직접 부딪혀 봐야지.”

“기회 되면 도전도 해 볼게요.”


아버지는 흐뭇하게 웃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젠 네 엄마를 어떻게 설득할지 얘기 좀 해보자.”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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