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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는 아무래도 영화평론가가 되어야겠다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현우(炫宇)
작품등록일 :
2024.04.01 07:36
최근연재일 :
2024.04.26 01:00
연재수 :
2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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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23
추천수 :
167
글자수 :
102,724

작성
24.04.10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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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8

DUMMY

선배들의 따가운 시선이 내 전신을 훑었다.


“너구나 타이타닉을 인생 영화로 꼽은 녀석이.”

“죄송합니다.”

“죄송? 뭘?”

“여러 가지로 물의를 일으켜서...”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선배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현영아, 얘 뭐냐? 백 교수 들이 받았다기에 좀 긴장했는데, 이거 생각보다 시시한데?”

“그러게. 이 소심한 성격으로 어떻게 백 교수한테 살아남았지?”


자기들끼리 웃더니 한 남자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한 눈에 봐도 이제 갓 군대에서 전역한 복학생이었다.


“반갑다, 성진아. 난 95학번 이동호라고 한다.”

“예, 반갑습니다 선배님! 자주서예, 해방영화 98학번 강성진이라고 합니다.”

“이 자식 오티도 안 왔으면서 FM인사는 어디서 배웠데? 너 혹시 군대 다녀왔니?”

“예. 전주 35사단 취사병이었습니다.”

“뭐? 너 군필이었어? 그럼 스무 살 아니야?”


아차차. 그건 1회차다.


“아, 아닙니다. 착각했습니다. 아직 미필입니다.”

“이거 완전 엉뚱한 놈이네. 사람이 어떻게 군필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헷갈리냐?”

“맞아. 너무 그럴 듯해서 순간 나 깜빡 속을 뻔했네.”

“죄송합니다.”

“좋아. 범상치 않은 놈이라는 건 확인했고, 이제 그 비결 좀 들어보자. 너 백 교수 어떻게 구워삶았냐?”


무슨 말인가 싶어 눈만 껌뻑이자 이현영이 부연 설명했다.


“우리 서예종은 타대학과 달리 교수-제자 사이가 좀 끈끈한 편이거든? 근데 만나는 교수님마다 98학번에 엄청난 돌아이가 들어왔데. 타이타닉이 왜 좋은 영화인지, 백 교수를 설득해 버린 놈.”

“아...”

“근데 백 교수님이 절대로 할리우드 상업영화를 좋게 보는 분이 아니거든? 비결이 뭐야. 타이타닉이 정말 그렇게 재미있는 영화였어?”


아는 만큼 보인다. 그 실감나는 장면을 연출하려면 감독이 얼마나 많은 고뇌에 빠져야 하는지 모를 것이다. 나야 뭐 밥 먹고 영화만 찍던 사람이니 잘 알지만.


“그냥 재미있었습니다. 상영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봤을 정도로요.”

“그게 전부야? 듣자하니 소프트파워니 뭐니 막 전문적인 얘기로 설득했다 하던데.”

“면접 때는 괜히 있어 보이는 말 버무렸죠. 사실 준비를 해 간 답변이라 지금은 잘 기억도 안 납니다.”


잔뜩 기대했던 선배들은 김이 팍 샌 얼굴로 나를 훑어봤다.


“겸손 떠는 거냐?”

“아닙니다. 제가 잘난 척 할 기회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하하...”

“에이- 김 빠진 콜라 마신 기분이네. 난 또 대단한 녀석이 들어온 줄.”

“야, 이제 스무살이야. 애한테 뭘 바라냐.”


낄낄 거리는 웃음 속엔 실망한 눈치도 보였고, 안도하는 눈치도 보였다. 어느 조직이나 튀는 놈은 눈총 받기 마련이다. 불필요한 자리에서 괜히 잘난 척 하는 것만큼 미련한 게 없다.

선배들의 관심을 따돌렸다 생각했는데, 나를 바라보는 이현영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슬쩍 내 어깨를 치더니 귓속말을 했다.


“오늘 못 다 한 얘기는 나중에 들려줘. 사실 우린 네 도움이 많이 필요해.”


졸업반 선배들한테 새내기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난 이제 갓 입학했는데?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이현영이 찡긋 눈짓을 보내 아무 질문도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아직 말 할 수 없는 서로의 사연이 있는 모양이다. 좀 친해지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

이현영은 고개를 돌려 파이팅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얘들아 개강파티에서 공부얘기 그만 하자. 오늘 하루만큼은 그냥 미친 듯이 퍼마시는 거야!”



*



고학번 선배들이 참석하며 개강파티 분위기는 한층 더 달아올랐다.

영화학부는 A반, B반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B반까지 합류하며 거의 100명 가까운 인원이 한 자리에 모였다.


“잘 들어. 새내기 때 술은 이렇게 마시는 거야.”


장난기 많은 선배들은 세수 대야에다가 온갖 술을 부으며 ‘우정주’라고 소개했다.

이는 소주, 맥주, 막걸리, 동동주, 콜라, 사이다로 이루어진 근본 없는 술이었다. 근데 이걸 동기들끼리 다 마셔야 팽생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안녕하십니까 선배님들! 자주서예, 해방영화, 98학번 이기진입니다! 동기들아 내가 다 마셔 버릴게.”

“와-


우린 차례대로 FM소개를 하며, 우정주를 최대한 마셔야 했다.

여기엔 나도 예외일 수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들! 98학번 강성진입니다! 동기들아 남은 술은 내가 끝장낼게.”


하지만 나는 겨우 그걸로 끝날 수 없었다.

이현영은 들어가는 나를 붙잡더니 말했다.


“잠깐, 새내기들 모두 주목. 우리 성진이가 여자친구 만나느라 오티에 참석 못 했데. 이거 용서하고 넘어갈 수 없겠지?”

“배신자! 노래해~ 노래해~”

“여자친구가 아니라 알바 때문에...”

“어쨌든 노래해~ 노래해~”


젠장. 이미 술에 반쯤 취해서 막무가내다.


“성진아. 우린 오티 미참가자들에게 특별히 장기자랑 시간을 주거든. 어떻게 할래?”


이현영은 소주병에 숟가락을 꽂곤 내게 건넸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호랑나비를 완창했다.

춤사위가 이어질 땐 모든 동기들이 튀어 나와 내 부끄러움을 덜어줬다. 마음껏 망가지며 노는 것도 참 오랜만의 일이다.

그렇게 무아지경 분위기에 심취할 때, 나는 술자리에서 뜻밖의 얼굴을 만났다.


“어? 성진씨?”

“수진씨?


명동 극장에 만났던 정수진을 새내기 개강파티에서 만난 것이다.


“진짜 한국 좁다. 성진 씨 서예종 영화학부 새내기였어요?”

“수진 씨도...?”


이에 여자동기들이 요란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성진 씨? 수진 씨? 아씨 닭살 돋아.”

“현영 선배! 얘네 둘 분위기 이상해요. 벌써 사귀는 것 같아요.”


수상한 분위기만 풍겨도 연애설이 불거지는 게 대학교 캠퍼스다.

술자리의 서포트 라이트는 단숨에 우리 두 사람에게 꽂혔다.


“둘이 어떻게 알아? 얼마나 됐어?”

“그, 그게 아니라 그냥 극장에서 우연히 만나서 영화 한 편 본 것뿐이야.”

“뭐? 둘이서 영화를 봤어? 이것들 아주 날짜까지 잡겠네. 뭐 봤는데?”

“...”

“설마 타이타닉?”

“현영 선배! 얘네 뽀뽀했데요!”


본래 열애설은 진위여부보다 당사자가 어떻게 믿는지가 중요한 법. 갑자기 남자 동기들까지 합세해 러브샷을 외치기 시작했다.

정수진은 당황했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안 사귀거든?”

“근데 타이타닉은 왜 같이 봤어?”

“그냥 우연히 극장 앞에서 만났고, 암표를 샀는데...”

“하필 그 암표가 커플석이었다는 거지? 그래서 막 우연히 손도 잡고, 뽀뽀도 하고 그랬다는 거지?”


정수진도 더는 변명을 포기했다. 뭔가 변명을 할수록 구차해지는 것 같았다.

결국 한참의 놀림 끝에 정수진이 내게 말했다.


“야, 강성진. 너도 그냥 나 정수진이라 불러. 우리 이제 동기야.”

“어... 그래 수진아 앞으로 잘 부탁해.”

“어머- 수진이래. 완전 미쳤나 봐.”

“지현아, 넌 그럼 영준이랑 사귀지? 아까 걔가 너 대신 흑기사 해줬잖아.”

“헐- 맞아. 영준이랑 지현이 오티 때도 친하게 지냈어.”

“야 내가 미쳤냐.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니야.”

“왜? 영준이 되게 멋있는데, 이번에 한 번 잘 해 봐.”


참 젊은 게 좋다. 낙엽 굴러 가는 것만 봐도 꺄르르 웃는다는 게 괜한 말이 아니다. 인생에서 가장 멋있고, 예쁠 나이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이겠지.

아무튼 최선의 방어는 최선의 공격이라고. 정수진이 적극적으로 공격해댄 덕분에 우리 둘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다른 쪽으로 옮겨갔다.

그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고학번 선배들이 자리에 납시었다.


“자- 다들 주목.”


이동호는 반쯤 취한 얼굴로 우리에게 말했다.


“국내 최고의 예술대학교 서예종에 입학한 걸 환영한다. 잠깐, 내 멘트가 너무 꼰대 같았나.”

“하하.”

“아무튼 지금부터 정말 중요한 얘길 할 거야. 바로 교수님에 관한 얘기지. 각 교수님들의 특징을 파악해야 너희들 4년 대학생활이 편할 거다.”


새내기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너희들 오늘 서도윤 교수님 수업 들었나?”

“네.”

“다행이군. 서예종에서 가장 천사인 분이야. 수업이 그리 재밌지는 않는데 학생들 의견을 굉장히 경청 잘해주시고, 아버지처럼 조언도 많이 해줘. 난 1-2학년 때 진로상담 다 서 교수님한테 받았다.”


모두들 격하게 공감하는 눈치였다.

박장수의 그 공격적인 질문에 얼마나 성심성의껏 대답해주셨나.


“이천성 교수님은 외국영화이론을 가르치시는데 수업이 꽤 재밌어. 다만 이건 원서 수업이라서 번역에 애 좀 먹을 거야. 그리고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 있는데... 바로 서예종 호환마마 백승오 교수님이다.”


백 교수 얘기가 나오자 몇몇은 아예 수첩을 꺼내들었다.

사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한 번씩 백 교수 앞에서 면접을 봤던 사람들이다. 더러는 백 교수가 응시자를 울리는 것 까지 목격했다.


“그 양반이 얼마나 무섭냐면...”


백 교수와 관련된 일화 몇 개가 나오자 곳곳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응시자들을 울려 버리건 빙산의 일각이었다.

우린 모두 숨죽이며 이동호의 얘기에 빠져 들었다.



*



아무리 인생을 두 번 살아도 극복되지 않는 게 있다.

나는 빈약한 주량을 이기지 못하고 술자리 막바지에 낙오 됐다. 오티 안왔다고 벌주주고, 춤 못 춘다고 또 벌주를 줘 버리니 젊은 놈들 사이에서 남아날 수가 없다.


“우웩! 웩.”

“그러게 적당히 좀 마시지. 왜 주는 술을 다 받아먹니?”

“허어... 허. 미안. 오늘 영 컨디션이 아니었나 봐.”

“괜찮아?”

“어. 고마워.”


정수진은 고맙게도 그 재난의 현장에서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나는 그녀가 내민 숙취 해소제를 들이키곤 완전히 주저앉았다.


“숙취음료수 이거 되게 비쌀 텐데...”

“그 때 못 돌려준 내 티켓값이야. 근데 그 때 왜 말 안했어?”

“뭘?”

“서예종 신입생이었다고. 난 또 엄청나게 아는 게 많아서 대학생인 줄 알았잖아.”


누가 두 번 만날 줄 알았나.


“암튼 너 내일 백 교수님의 비평학 들어?”

“응. 1학년 전공필수는 다 들어.”


정수진은 팔짝 뛰었다.


“나이스! 잘 됐다. 백 교수님 진짜 무서운 분이라던데.”

“그게 왜 잘 된 거야?”

“너도 알다시피 내가 영화적 지식이 많이 부족하잖니. 앞으로 과제 같은 거 있으면 우리 함께 도우면서 하는 거다.”

“내가 왜...”

“아이구 저 토사물 좀 봐. 내가 꽃다운 나이에 이러고 있다니.”

“...최대한 도울게. 오늘 정말 고마워.”


그녀가 깔깔 웃으며 내 등을 쳤다.


“그럼 수업 때 보자. 난 기숙사 들어가야 돼서. 이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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