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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는 아무래도 영화평론가가 되어야겠다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현우(炫宇)
작품등록일 :
2024.04.01 07:36
최근연재일 :
2024.04.26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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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5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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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서울예술종합학교

DUMMY

예술업계 지망생들은 어딜 가나 튀기 마련이다. 면접 당일 지하철엔 이 특이한 존재들 천지로, 발 디딜 틈 하나 없었다.

제 아무리 2회차 인생이라 해도 시험은 시험이었다. 서류전형을 통과한 나는 면접 예상 질문과 답변을 외워 대느라 며칠 째 한숨도 자지 못했다.

한 번 살아 본 나도 이럴진데 첫 인생(?)인 이 친구들은 오죽할까.


-저는 한국영화의 부흥과 발전을 위해, 이 한 몸 불 사를 각오가 돼 있습니다!


역 앞에 다다르자 여기저기서 기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직 서툴지만 그래도 겁먹지 않으려는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오늘은 경쟁자지만 우린 곧 업계 동료로 만날 것이다. K-콘텐츠의 저력은 우리들의 도전정신으로 이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길 몇 년 만에 와봤더라.’


서예종에 도착하니, 한국 영화의 예루살렘인 평화의 전당이 우릴 반겨 주었다.

평화의 전당은 영화계의 각종 시상식이 이뤄지는 곳.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도가 높은 연말(청룡)시상식은 초청권을 받는 것만으로도 출세했음을 의미했다.

슬프게도 나의 한계는 딱 거기까지였다. 초청권은 받았지만 단상에는 올라갈 수 없는.

내 상업영화 데뷔작은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혹평을 받았으며, 단 한 부문도 노미네이트 되지 못했다.


[아주 비싼, 독립영화]


도리어 난 특유의 색깔마저 잃고, 상업과 독립영화의 중간에 있는 아주 어정쩡한 감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일까. 나는 오늘 이 면접자리가 너무 기대되며 떨렸다.

1회차 땐 여기서 박수만 치다 갔는데, 오늘은 말 할 기회도 주지 않나!

전생의 한을 오늘 다 풀고 가야겠다.



*



“김기태 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가장 감명 깊게 봤다면서 어떻게 마거릿 미첼을 모를 수 있어요? 이 영화의 원작자가 바로 미첼입니다. 그리고 작중 스칼렛 오하라는 노예주를 찬성한 남부군 옹호자였습니다. 그녀가 사랑 받았던 건 결코 정의로워서가 아니라, 그냥 무슨 짓을 해도 밉지가 않은 캐릭터였기 때문입니다.”


명불허전 백 교수는 오늘 벌써 네 명 째나 지원자를 울려 버렸다.

이는 다른 면접관들도 혀를 내두르는 타율이었다.


“백 교수님. 이번 년도 지원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십니까?”

“작년에 비해 더 형편없어졌군. 지원자 뿐 아니라 입학처까지 마음에 안 들어.”

“입학처는 또 왜요?”

“딱 봐도 저것들은 자소서 대필이야. 이런 쭉정이들은 다 서류에서 걸러냈어야지.”


어설프고 부족한 모습, 가진 거 하나 없이 목소리만 큰 모습. 모두 이해 할 수 있다. 그건 스무 살의 특권이니까.

하지만 남의 창작물(?)을 마치 제 것인 양 가증을 떠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자소서 하나 못 쓰는 놈들이 시나리오라곤 쓰겠나. 커서 남의 저작권이나 뺏고 다니지 않으면 다행인 일이다.


“하긴. 연관 질문 몇 개만 해봐도 역량이 다 나오는데.”

“저희가 자소서, 면접을 중시 여기니 악용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모양입니다.”


괘씸하면서도 씁쓸한 단면이었다. 이는 그만큼 충무로에 낭인들이 많다는 뜻이니.


“미안하네. 성질 고약한 늙은이 때문에 자네들 입장만 난처해졌구먼.”

“아닙니다. 스칼렛 오하라가 노예주 폐지에 앞장섰다는 얘기엔 저희도 기가 찼습니다. 저 친구는 울만 했어요.”

“그래도 나머지 면접에선 내 성질 좀 죽여보이. 다섯 명까진 안 울릴 거야.”


참자. 감수성이 예민한 예술 지망생들은 조심히 다뤄야 한다. 미대입시에 떨어진 독일 청년이 무슨 전쟁을 일으켰는지 기억하자.

백 교수는 모질게 마음먹었지만 다음 응시자들이 들어왔을 땐 바로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다른 면접관들 모두 115번 응시자에게 시선이 향했다.

[대 필 의 심] 115번 면접자의 자소서에 큼지막한 주홍글씨가 달렸기 때문이다.


“면접을 시작하기에 앞서 115번, 강성진 군.”

“네.”

“본인은 외부활동이 전무 하던데. 왜 영화학부에 지원하게 됐죠?”

“사실 어렸을 때 영화를 좋아했는데...”

“그런데 학교에서 공부만 시켜 관련활동을 할 수 없었다. 뭐 이런 얘기인가요? 참 빤하디 빤한 래퍼토리입니다. 아주 진부해.”


성진은 너무 당황하여 눈만 껌뻑거렸다.

이건 예상에 없었던 면접 질문이다. 면접관이 왜 이리 적대적일까?


“한 가지 더. 강성진 군. 혹시 주변에 영화 업계 종사자가 있습니까?”

“어, 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이 자소서는 어떻게 완성했지? 이제 갓 스물 살 된 청년 머리에서 나올 만한 통찰력이 아니야. 거의 박사급 논문 같던데.”

“그건...”

“됐습니다. 얘기 나눠 보면 알겠지 뭐.”


백 교수는 해명할 시간도 주지 않고 바로 본 면접에 들어갔다.


“공통질문입니다. 지금까지 가장 감명 깊게 봤던 영화를 말하고, 여러분이 감명을 느꼈던 이유를 말씀해 보세요. 감독을 말해도 좋습니다.”


공격적이었던 분위기와 달리, 첫 질문은 너무나 쉬웠다. 사실 이 정도면 공짜 질문이다. 집에서 충분히 준비해 올 수 있는 질문 아닌가.


“프랑수아 트뤼포를 빼놓고 영화를 논할 순 없죠. 작가주의의 시초이자 누벨바그의 대표 거장인 트뤼포는 저의 우상입니다.”


“전 <라쇼몽>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건을 왜곡해서 기억한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이 어려운 철학 주제를 쉬운 스토리로 관객에게 설명했습니다. 한일간의 문화 격차가 통탄스러울 정도입니다.”


“찰리 채플린에 가려진 비운의 천재, 버스터 키튼요.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는 다시 써야 합니다. 채플린이 시의성 있는 작품을 많이 찍긴 했지만, 감독으로서의 순수 역량에선 키튼과 비교 할 수 없죠.”


지원자들의 대답은 모두 놀라울 따름이었다.

과거 영화사조를 최근과 비교하고, 꽤 통찰력 있는 해석도 곁들인다. 채플린을 과장된 천재라 비판하는 113번에겐 존경심까지 느껴졌다.

사실 입시학원에선 모더니즘 얘기만 나오면 무조건 채플린을 찍으라 가르친다. 1회 차 때 공부만 했던 나는 아무 의심 없이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근데 그 개념을 이해하고 무엇이 잘못 됐는지를 비판하는 놈까지 있다니.


“영석 군. 구로사와 아키라를 최고의 감독으로 꼽았는데, 그럼 그의 다른 대표작을 추천해 줄 수 있나요?”

“그, 그건...”

“민수 군. 채플린을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그럼 모더니즘이 뭔지 우리에게 설명해보세요.”

“에... 그니까.”


‘이 양반들 진짜로 고약하네.’


웃음이 난다. 첫 질문을 왜 이렇게 쉽게 내나 했더니, 꼬리 질문을 어렵게 낼 심산이었구나!

이론만 달달 암기해 온 놈은 꼬리 질문에서 답변이 막힐 수밖에 없다. 그게 주워들은 지식의 한계지. 준비한 답변은 확실히 솎아 내겠다는 면접관들의 의지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강성진 군은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가 뭐죠?”

“네. 타이타닉입니다.”


면접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그 빤하디 빤한 상업영화를 지껄인다고?



*



70년 대 영화계의 거장 백승오는 팔짱을 끼며 청년을 꼬나봤다.

오늘은 이미 네 명의 지원자를 울려 버린 터였다. 다섯 번째 희생자는 안 만들겠다 다짐했건만 왜 하늘은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

사실 백 교수는 처음부터 이 청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소서 대필 의혹이 붙어서? 아니다. 오히려 눈물 나리 만치 고맙고 기특한 자소서여서 그랬다.


-아직 한국 감독들은 스토리 전달력이 좋은 편이 아니다. 나는 한국영화가 성숙해지기 전까지, 전달되지 못한 메시지를 관객에게 해석해주는 평론가가 되고 싶다.


이는 백 교수도 십분 공감하던 얘기였다.

조금만 다듬으면, 조금만 더 쳐내면 충분히 전달력 있는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데 아직 한국 감독의 역량을 벗어난 일이다.

하지만 그는 충무로의 가능성을 이미 확인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곧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등장하고, 세계를 호령하는 영화가 등장할 것이다. 평론가들이 이런 대작이 나왔을 때 응원하고 지지하며, 한국영화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


‘기대한 내가 바보였나.’


달랐다. 너무나도 달랐다.

보통 영화과 지원생들은 배우나 감독을 지망하는데 반해, 이놈은 처음부터 목적이 분명했다.

평론가가 되고 싶다고 한다. 고전 명작들이 재미 없는 이유는 그것이 재미가 없어서가 아닌 그 작품이 어떤 시대적 사명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몰라서라고 한다.

영화는 아는 만큼 보인다, 이것이 백 교수의 작품철학이었고, 녀석은 이걸 이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한국 영화 자체도 걸음마 단계에 있는 실정이다.

그런 마당에 제작을 넘어 평론을 하겠다는 건 특히나 대학에 어울리는 놈이라는 걸 말해주었다. 하지만


‘고작 그 딴 작품이나 댈 줄이야.’


면접에 대한 준비를 안 할 걸까? 최근 가장 흥행하고 있는 영화를 말하고 있다. 이 때 당시 <타이타닉>은 외화에 대한 반감 때문에 디카프리오 얼굴 보러 가는 영화라 폄하 당했다. 사실 그건 한국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나오는 지적이었다.

근데 고작 그 따위 작품을 말한다고?


“제가 타이타닉을 꼽은 이유는...”

“됐습니다.”

“예?”

“그 영화가 얼마나 위대하고 재밌는지는 나도 잘 알아요. 대답은 들은 셈치죠.”


비아냥섞인 대답에 면접관과 지원자 모두 키득키득 웃었다. 오늘 같이 형식적인 날 감히 상업적인 영화를 지껄인 대가다.

그 뒤로 면접이 계속 진행되었지만 질문은 지원자 네 명에게만 집중되었다. 으레 그렇듯 면접관이 질문을 안하는 건 탈락이란 뜻이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한국영화가 부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각자의 생각을 말해 보세요.”


백승오는 구석탱이에 있는 성진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좋은 시나리오에 나쁜 영화는 있어도, 나쁜 시나리오에 좋은 영화는 없습니다. 작가 육성이야 말로 충무로의 시급한 과제입니다.”

“근무 여건 개선이 시급합니다. 스태프들에게 합당한 처우를 보장한다면 이는 곧 한국 영화의 질적 성장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원론적이지만 이것이 학생이 할 수 있는 최고치의 대답이다. 이 자리가 뭐 문화부 장관 뽑는 자리도 아니고.


“스크린 쿼터제를 폐지해야 합니다.”


마지막 놈 대답에 백 교수는 마시고 있던 물을 뿜었다.


“케, 켁. 켁. 뭐?”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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