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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까스 한입 하실래예

공작가 막내도련님이 도술로 다 씹어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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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전참가작 새글

이기준
작품등록일 :
2024.05.21 21:54
최근연재일 :
2024.07.06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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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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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64
글자수 :
233,927

작성
24.05.31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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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글자
11쪽

불과 얼음의 노래 (3)

DUMMY

생각해보면 나도 제정신은 아닌 놈이거든. 나는 장장 이십여 년의 세월 동안 내가 언제 죽을지 알고 살아왔단 말이지.


그리고 제정신이 아닌 놈끼리 맞부딪히면, 먼저 시선을 내리까는 놈이 진 거다.


장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했다. 사람들은 우리의, 특히 크리스의 반응에 모든 촉각을 기울였다. 녀석은 내 인중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흥이 식는군."


마침내 고개를 돌렸다.


"스타니스!"


그가 날카롭게 외치자, 군중 사이에서 장신의 청년이 튀어나왔다. 청년은 회색 눈동자를 제외하고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로지 검은색 일색이었다.


"실례지만 주군께서 피곤하셔서, 대화는 다음을 기약하셔야겠습니다."


청년은 나와 크리스의 사이를 가로막으며 정중하게 양해를 구했다.


그 순간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생전 처음 느껴보는, 무어라 형언하기 힘든 불쾌한 감각을 받았다.


단순히 인상이 나쁘다는 게 아니라, 뭐랄까······.


나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이미 크리스와 함께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크리스 님께서 그냥 물러나시다니?"


"망할, 이러면 우리 입장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마벨파 놈들이 한동안 대가리를 쳐들고 다니겠군.."


"지금 마벨파가 문제가 아니야, 이 친구야."


귀족들은 너 나할 것 없이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크리스는 명령을 내리기만 하면 누구든 복종시킬 수 있는 신적인 존재였을 텐데, 새파랗게 어린 동생놈이 흙투성이 발로 자기 영역을 더럽혔는데도 입 한 번 뻥긋 못했으니.


이쯤 되면 다들 떠올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래서 그 능력의 조건이 뭔데.


"멋진 퍼포먼스였다."


고개를 돌려보았다. 오렌지빛 머리카락의 다부진 소년이 내게 미소를 보내오고 있었다.


"내 동생이 그런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구나. 이럴 줄 알았더라면 미리 잘 보여두는 건데 말이다, 하하하!"


나의 큰형님, 마벨 에스테르지.


그나저나 웃음소리가 정말 시원시원하다. 갖은 멸시와 압박 속에서 어떻게 이토록 구김없이 웃을 수 있는지 궁금하다.


압도적인 재능이라고 평가받는 크리스에 맞서서 그나마 한 줌의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이와 같은 인품 덕이 아닐지.


한편으로는 이런 의문도 든다. 이 사람은 대체 뭘 믿고 날 크리스 앞에 던져놓은 걸까? 내게 크리스를 압도할만한 재능이 없었다면 어쩌게?


"저야말로 형님 덕에 좋았어요. 아무도 절 몰라볼 줄 알았거든요."


"단언하건대 오늘 이후 공작령에서 널 몰라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얹더니, 고개를 가까이하며 말했다.


"시간이 난다면 내 농장에도 들러 주겠니? 과일주스를 좋아하는 모양이던데, 마침 과일 몇 종류가 수확철이거든."


"네, 그럴게요."


특이한 사람이다. 보통은 사교계 명사 누구누구가 오는 자리라든가, 여름 별장이 비었다는 식으로 초대를 하지 않나?


뭐, 나도 이런 파티보다는 농장이 마음이 더 편할 것 같다. 먹지도 않을 디저트를 쌓아두기만 한 광경을 보면 심사가 뒤틀리거든.


"자, 잡담은 여기까지."


"네?"


"너도 주빈 노릇을 해봐야지."


마벨이 찡긋 윙크를 건넸다. 그의 말이 신호라도 된다는 듯이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이덴 공자님!"


"이덴 공자님, 저 기억하십니까?"



**



파티장을 벗어났을 땐 이미 한밤중이었다. 나는 흔들거리는 마차 안에서, 젖은 채소처럼 축 늘어진 채 비텐에게 몸을 기대고 있었다. 도력이 높은 것과 별개로, 마음에도 없는 사람들과 마음에도 없는 대화를 나눈다는 건 피곤한 일이었다.


그런데 나만 상태가 안좋은 건 아닌 듯했다. 맞은편에 앉은 탈리아도 평소답지 않게 어딘가 맹해보였다.


"탈리아."


"···예?"


두 박자 늦은 대답.


"왜 그래? 뭐 잘못 먹었어?"


"아··· 아닙니다."


그녀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아니긴 무슨, 넋이 나갔는데."


이상징후는 비텐에게서도 발견되었다. 비텐은 상태가 한층 더 심했다. 녀석은 숫제 딸국질을 해대는 중이었는데, 딸꾹거릴 때마다 붉은 수염이 위아래로 깃발처럼 펄럭거렸다.


"다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나?"


"이덴 님."


탈리아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초조한 어조로 물었다.


"아까는 대체 어떻게 되신 겁니까? 어떻게 두 가지 각성능력을 함께 사용하신 거죠?"


"궁금해?"


"궁금합니다!"


비텐이 꽥 소리를 질렀다.


"저흰 그런 게 가능한 인간이 존재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요! 솔리타스 님이라면 모를까!"


귀청 떨어지겠다.


하긴, 두 사람도 다른 사람 못지않게 쇼크를 받았겠군.


"진짜로 각성 능력이 두 개인 건 아니야."


나는 싱긋 웃었다.


"혹시 샐러맨더 혓바닥 먹었을 때 기억나?"


"예, 기억합니다. 눈에서 불을 뿜어내셨죠."


"저 그때 진짜 간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불을 다루는 능력이 생긴 게 그때부터야."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서로 얽혔다.


"그렇다면 설마 - "


"몬스터를 먹어서 특성을 흡수하는 능력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고 있어."


공들여 준비한 변명이었다. 꽤 그럴듯하잖아. 내가 샐러맨더의 혓바닥을 먹어치우고도 멀쩡했던 일화는 제법 유명하니까.


지난 5년의 세월 동안 두 사람은 내게 충분한 신뢰를 쌓았다. 그러나 도술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려면 전생까지 들어가야하는데, 그러려면 이야기가 너무 복잡해진다.


"···그렇군요. 말이 됩니다."


탈리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면 메탈 골렘을 드시면 금속도 마음대로 다루실 수 있겠네요?"


비텐이 흥분한 어조로 물었다.


"그야··· 그렇겠지?"


"그럼 바실리스크를 드시면 - "


"선배."


탈리아가 엄격한 눈으로 비텐을 쏘아보았다.


"이덴 님은 선배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애완동물이 아닙니다.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주군이십니다."


"아니······나는 가능성을 보자는 건데."


비텐이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탈리아는 비텐의 자아가 콩알만큼 쪼그라들 때까지 노려본 뒤,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덴 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함구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오해를 하도록 놔두는 게 좋을 테니까요."


"아니야, 탈리아. 난 오히려 소문이 널리 퍼졌으면 좋겠어."


나는 여전히 비텐에게 몸을 기댄 채, 눈을 감으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래야 몬스터의 소재에 대한 정보가 들어올 거거든."



**



파티가 끝난지 닷새가 지났다. 그 짧은 기간 동안 내 위상에 드라마틱한 변화가 찾아왔다.


"또 초대장이 왔어요, 도련님."


릴리가 편지봉투를 바리바리 안은 채 방에 들어왔다.


"거기 쌓아둬."


나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대꾸했다. 이미 내 책상에는 초대장이 가득이었다. 가장 무도회, 그냥 무도회, 티 파티, 디너 파티, 지역 축제, 누구누구의 전시회 등등.


아버지는 나가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귀족이라는 놈들은 자빠져 놀고 있단 말이지.


우리 영지 괜찮은 거 맞는지, 심히 의문이 든다.


물론 그들도 아버지의 군대에 사람이나 물자를 지원하고 있긴 한 모양이다만, 그래도, 이게 다 누구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이겠어.


"정말 웃기지도 않죠."


릴리가 초대장들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눈 감고 귀 닫고 도련님의 생신을 모른 척 하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친한 척을 하는 모습이요."


"동감이야."


제일 꼴불견은 이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없는 사람 취급하더니, 크리스의 위상이 흔들리자마자 귀신같이 태세를 전환하는 모습.


한편으로는 존경심마저 든다. 나였으면 쪽팔려서 아는 척도 못 했을 텐데, 뻔뻔함도 이 정도가 되면 각성 능력이라고 불러줘야 한다.


"그래도 가보시면 재미는 있으실 거예요. 지금 도련님을 주제로 한 노래가 대유행이거든요."


"내 노래가 유행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음유시인들이 며칠 전에 도련님께서 크리스 공자님을 골탕먹인 일을 가지고 경쟁적으로 노래를 만드는 중이거든요. 어느 파티를 가도 들으실 수 있을 걸요?"


왠지 더 가고 싶지 않아졌다.


아니, 그게 노래가 될 줄 알았더라면 좀 더 조신하게 굴었지.


"파티는 됐고, 큰형님한테 연락이 오면 알려줘."


"네, 그럴게요."


마벨 형님은 개인적으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내친김에 릴리에게 정보를 더 캐보기로 했다.


"큰형님은 어떤 분이지?"


"평판이 무척 좋으세요. 아랫사람에게 관대하시고, 성실하고 총명하시죠. 전하와 사이도 나쁘지 않으시고요. 다만···."


"다만?"


릴리는 주저하며 말을 이어갔다.


"···주변 사람한테 불행이 끊이질 않아요. 작년에만 제가 알기로 친구분이 세 분이나 돌아가셨거든요."


"어쩌다가?"


"그걸 아무도 몰라요. 건강하던 분들이 갑자기 돌아가시니 각성 능력이다, 저주를 받았다, 온갖 흉흉한 소문이 떠돌아다니죠."


왠지 나는 이유를 알 것 같은 걸. 형제가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사악한 놈이 주변에 있는 것 같거든.


"궁금한 게 더 있으신가요?"


"아니, 그만하면 됐어."


"그럼 도련님의 교육 일정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진짜야?"


"네, 올해 일곱 살이 되셨고, 사교계 데뷔도 화려하게 마치셨으니까요."


그녀가 생긋 웃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응!"


기다리다가 턱이 빠지는 줄 알았다. 뭐라도 배워야 머릿속에 든 것들을 꺼내 놓지, 언제까지 어린애 흉내를 내야겠어.


"도련님이 배우실 과목은 역사, 교양, 예법, 무술, 제왕학, 이렇게 다섯 가지 과목이에요."


교양과 예법을 배우기는 하는구나. 파티장에선 눈 씻고 찾아봐도 그런 게 없었는데.


다른 과목들은 그러려니 하겠다만, 두 과목, 무술과 제왕학이 걸린다.


우선 나는 도사다. 도사는 흔히 말하는 '무림인(武林人)'과는 모든 면에서 다르다.


무림인이 땀을 뻘뻘 흘리며 육신을 단련할 때, 도사는 그늘진 곳에 앉아 참선을 한다.


무림인이 검과 창을 휘둘러 사람들의 골통을 쪼갤 때, 도사는 검과 창에게 움직이라고 명령을 내린다.


무림인이 패거리를 이루어 문파를 세울 때, 도사는 심신유곡에 틀어박혀 진법과 안개로 자신을 감춘다.


도사는 도를 이루어 하늘로 승천하려는 사람이다.


도사더러 무기를 휘두르며 두 발로 뛰어다니라는 건 무림인 레벨로 자신을 낮추라는 건데, 굳이 그래야만 하느냐는 거다.


"무술을 꼭 배워야할까?"


"당연하죠!"


릴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공작가의 후계자시라면 반드시! 예외 없이 무술을 마스터하셔야만 해요. 그래야 전하께서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아드님이 되시죠."


흐음.


아버지의 당당한 풍채를 보면 무술이 마냥 하등하진 않은 거 같긴 하다만.


어차피 화신경까지의 깨달음은 모두 구했으니, 참선 대신 몸을 단련해두는 게 나쁘진 않을지도.


"게다가 가정 교사로 오시는 분이 보통 분이 아니세요."


"그래?"


"네."


릴리가 뿌듯하다는 듯이 말했다.


"공작 전하께서 각별히 아끼시는 분이랍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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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가 막내도련님이 도술로 다 씹어먹음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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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가정 교습 (3) +4 24.06.03 9,273 239 10쪽
12 가정 교습 (2) +10 24.06.02 9,338 263 10쪽
11 가정 교습 (1) +4 24.06.01 9,613 255 10쪽
» 불과 얼음의 노래 (3) +9 24.05.31 10,187 252 11쪽
9 불과 얼음의 노래 (2) +9 24.05.30 10,129 287 12쪽
8 불과 얼음의 노래 (1) +5 24.05.29 10,405 272 11쪽
7 뜨겁고 화끈한 것 (3) +9 24.05.27 10,425 273 9쪽
6 뜨겁고 화끈한 것 (2) +8 24.05.26 10,662 303 11쪽
5 뜨겁고 화끈한 것 (1) +9 24.05.25 11,145 307 9쪽
4 형제애 (2) +6 24.05.24 11,807 279 11쪽
3 형제애 (1) +17 24.05.23 12,336 289 12쪽
2 윤회의 굴레 (0) +18 24.05.22 13,168 311 10쪽
1 상서로운 꽃 (0) +21 24.05.21 14,450 32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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