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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까스 한입 하실래예

삼류배우가 마법천재 황자님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이기준
그림/삽화
연근조림
작품등록일 :
2023.05.19 06:32
최근연재일 :
2023.08.10 08:57
연재수 :
64 회
조회수 :
164,005
추천수 :
8,549
글자수 :
329,698

작성
23.06.05 19:57
조회
3,293
추천
151
글자
11쪽

이기적인 거짓말 (4)

DUMMY

나는 머릿속으로 카심에 대한 정보를 업데이트했다. 전승 무패의 아가리파이터라고.

지난 세계에서도 입만 살아있는 놈들은 발에 치일 만큼 많았다. 그러나 한국은 기술의 발달 덕분에 비대면으로 의견을 남기는 게 가능하기 때문에, 악플의 난이도따질 것 같으면 이곳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 카심이라는 놈은, 남의 명예를 훼손하면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미개한 사회에서, 이 많은 재판기록을 달성해냈다.


심지어 지지도 않았어.


······황제보다 더 또라이 아니야?


"어쨌거나······."


나는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말싸움에서 이기기만 하면 고유마법을 배울 수 있다니, 타자립보다 훨씬 낫군."

"예. '카심의 이기적인 도발'은 그가 당대 최강이라는 평판을 얻어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강력한 고유마법입니다. 폐하께서는 이 정도 마법은 습득해야지 황자님이 다른 형제분들과 겨뤄볼만하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만, 곧 형장에 오를 사형수가 대결에 응해 줄지는 모르겠군요."

"······입니다."


한숨처럼 작은 소근거림이 들려왔다. 나와 라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을 살펴보았다.

범인은 식사 시중을 들던 하녀였다. 나이는 이십 중반쯤 될 것 같았는데, 150 초반의 작달막한 키에 까만 머리카락,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드라마를 찍으면서 친해졌던 모 스태프가 생각나게끔 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하녀들에게 둘러싸여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들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별로 없다. 극적인 시퀀스들이 숨쉴 틈도 없이 몰아치다 보니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그녀들이 눈에 잘 띄지 않기도 했다. 거의 말을 하지 않는데다 시선을 항상 바닥으로 내리깔고 있으니까.


"네 이름이 뭐지?"

"느베타라고 합니다."

"느베타, 방금 누구한테 말을 한 거지?"

"화, 황자 전하께···."


목소리가 정말 작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녀의 존재 자체가 소멸해버릴 것만 같다. 게다가 그녀는 내게 대답을 하면서 실시간으로 작아지는 중이었다. 어깨는 자꾸만 움츠러들고, 뺨은 라나가 먹어치운 과일만큼이나 빨갛게 익어간다.


"마저 이야기를 해다오, 느베타. 목소리를 조금만 더 높여서."

"며, 명을 받들겠습니다······어, 엊그제 들은 이야기인데요······카, 카심 님 때문에 감옥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감옥에 갇혔는데도 그 내기인가 뭔가를 했다는 건가?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가, 간수장님과 내기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군."


나는 빙긋 웃었다. 아무래도 목소리를 높여달라는 요구는 무리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두 주먹을 꽉 쥐고, 고해성사를 하듯 침통한 표정으로 웅얼거리고 있었다.


"곧 형이 집행될 죄수가 내기라니. 제정신이 아닌 놈인 것 같은데."

"잘 된 일입니다. 그냥 가르쳐 달라고 해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겁니다."

"그랬겠지. 느베타, 고맙다. 네 정보가 큰 도움이 되었다."

"다, 당치도 않습니다···저, 저는 당연한 일을···."


느베타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숨을 쉬기조차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과 이름을 외워두기로 했다.

라나는 귀족은 아닌 것 같지만, 다른 하인들과 편하게 말을 나눌 만큼 직급이 낮지도 않은 듯했다. 느베타는 라나가 도울 수 없는 부분에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처럼 떠도는 소문을 물어온다던가.


"자, 그러면 할 일은 정해졌네. 감옥으로 가서 그놈한테 한 번 붙어보자고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신청하기만 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이기셔야죠. 이 서류더미의 일부가 되고 싶지 않으시다면 말입니다."

"작전을 말해 봐."


라나가 느베타가 가져온 바구니에 손을 뻗었다. 그녀는 그 안에서 빨간 과일을 꺼내더니, 입에 쏙 던져 넣으며 말했다.


"대부분의 송사가 모독죄, 명예훼손죄인 것을 보니 인신공격에 각별히 주의하셔야겠습니다."

"그건 방어전략이고. 공격은 어떻게?"

"카심은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식이나 아내의 행실을 트집 잡을 수는 없겠죠. 노예 출신이라 부모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쪽의 공격수단은 극히 제한됩니다."


일국의 황자와 측근들이 머리를 맞대고 논하는 주제가 '어떻게 하면 패륜적인 모욕으로 상대를 열받게 할까'라니. 내가 상상했던 판타지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황자님이 활용해볼만한 최고의 공격은 외모라고 봅니다. 황자님은 다른 남성을 압도하는 용모를 지니셨습니다. 반면 카심은 평범 이하의 보잘것없는 남자죠. 그러니 용모가 인간의 인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집중적으로 강조하셔서 그의 열등감을 자극하시는 겁니다."

"기각."


다른 건 몰라도 생긴 걸로 까는 건 해서는 안 될 짓이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그러더라도 난 그러면 안 된다고, 진짜로.


"외모가 아니라면 뭘로 승부를 거시겠습니까? 이것이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라는 건 알고 계시겠지요."

"그걸 지금부터 연구해야지. 당분간 식사는 여기로 가져오라고 해. 전략이 나올 때까지 안 나갈 거니까."


나는 새로운 서류를 하나 집어 들어 펼쳤다. 라나도 나를 도와 문서들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테이블 앞에서 웅얼거리며 문서를 읽고 있는 모습들이 마치 대본 리딩하러 모인 배우들을 연상시킨다.

대본 리딩이 맞지. 재판기록과 대본의 차이점이라면 샷 한 번에 모든 씬이 끝난다는 것 정도겠다.


타자립 때와 똑같다. 정보를 분석하는 게 아니라 연기할 배역에 대해 알아간다고 생각하자. 그가 왜 이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는 어떤 인간인지를 끊임없이 사유하자.

만약 카심의 심리에 통달한다면 암마르 때처럼 마법을 훔쳐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



다음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온통 모래언덕 뿐인 나라라 근시일내에는 비를 볼 날이 없을 줄로만 알았다.

나는 창가에 걸터앉아 주룩주룩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느베타가 타준 차를 음미하면서, 온갖 욕설이 망라된 카심의 재판기록을 읽었다.


그러고 보니 느베타가 자주 눈에 띄었다. 얼굴을 기억해둬서가 아니라, 그녀의 업무 자체가 내 눈에 띌 수밖에 없는 포지션이었다. 라나가 굵직한 일들을 총괄하는 치프 매니저라면, 그녀는 궂은 일을 도맡는 로드 매니저쯤 되는 듯했다.


느베타는 내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던 모습과 달리, 어린 하녀들을 아우르면서 능숙하게 업무를 지시하곤 했다.

물론 그녀들이 나누는 대화를 직접 듣진 못했다. 그녀들은 유령처럼 발끝으로 걸어 다니며, 나를 방해하지 않도록 구석진 곳에서 소근거렸다.


종일 서류들을 읽고 나서 느낀 점은 카심이 전승무패를 할만한 놈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인간의 악의를 혓바닥 끝에 담아낸 듯한 존재였다.


조상 욕, 부모 욕, 자식 욕, 사생활, 온갖 신체적, 정신적 콤플렉스 등, 그는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상대의 멘탈을 탈탈 털어버렸다.


게다가 카심의 무기에는 팩트가 아닌 것도 포함됐다. 네 여동생이 널 뒤에서 흉보더라는 둥, 네 마누라가 누구랑 바람이 났더라는 둥, 가짜뉴스까지 동원해 취약점을 찔러 오니 웬만한 사람들은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그리고 카심의 버릇을 읽어낸다면 고유마법을 빼낼 수 있지 않을까했던 거.

아쉽게도 이 계획은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았다. 재판에서의 그는 피고의 입장인지라 시종일관 방어적이었으며, 정제된 격식어를 썼다. 카심이 어떤 사람이라는 건 제법 파악할 수 있었지만, 그가 어쩌다가 타인의 분노를 먹잇감으로 삼게 되었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결국 그 '무사수행'이란 것에 응해야 할 것 같긴 한데.


적지 않은 문서를 검토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약점을 모르겠다는 게 문제다. 재판기록으로 알 수 있었던 건 많은 사람들이 내가 떠올릴만한 방법들을 시도해봤으나 처참하게 박살났다는 것뿐이었다.


······진짜 외모 공격이라도 해야 하나?


"화, 황자 전하."


느베타가 나를 불렀다. 나는 호기심을 담아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는 사람을 닮아서 그런가, 그녀에게는 이상하리만치 친근감이 느껴진다.


"무슨 일이지?"

"고······곧, 날이 저뭅니다. 비, 빗줄기도 굵어지고 있고요. 조, 존체를 보존하시려면 이만 아, 안으로 드심이 좋을 것 같습······."


'니다'는 들리지 않았다. 점점 목소리가 작아진 끝에 마침내 인간의 청력으로 감지 가능한 영역을 벗어나 버렸으니까.


나는 느베타의 달아오른 뺨과 꽉 쥔 주먹, 내리깐 속눈썹을 차례차례 살펴보았다. 그녀는 날 이토록 어려워하면서도, 내가 감기라도 걸릴까봐 굳이 말을 걸어줬다.

이런 건 직업정신의 일환일까, 아니면 사적인 감정이 개입한 건가. 오리지날 샤말은 하인들에게 사랑을 받을만한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부주의했군. 고맙다."


나는 창턱에서 점프하듯이 가볍게 내려왔다. 샤말의 육체는 평소에 운동을 해왔던 것인지, 십대임을 감안하더라도 날렵하고 강인했다. 나는 책상으로 돌아가려다, 몸을 빙글 돌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느베타."

"네, 전하."

"혹시 카심의 약점에 대해 들은 바 없나?"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마법사들조차 풀지 못한 실마리가 일개 하녀에게서 나올 리가 없으니까.

다만 그녀가 궁중의 소문에 밝은 듯하기에, 황제의 아사라 바탈이었던 카심의 뒷소문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저는 그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누, 눈매가 무척 사나운 분이시라는 것과······폐, 폐하께 불충을 저질렀다는 것 말고는···."


그렇겠지.


말했잖아, 기대는 안 했다고.


나는 별 생각 없이 그녀를 지나치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간과했던 무언가가 그녀의 말 때문에 번쩍 스파크를 튀긴 듯한 기분.


"방금 뭐라고 했지?"

"네, 네?"

"방금 뭐라고 했냐고."

"누, 눈매가 사나운 분이시라고···"

"그 다음은?"

"폐하께 불충을···."

"···그랬지!"


나는 손가락을 튕기며 소리쳤다. 느베타는 당황해서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등을 대강 두들겨준 후, 책상으로 달려가 서둘러 기록들을 재검토해봤다. 한 장, 두 장, 세 장······.


페이지를 넘길수록 확신이 더해졌다. 역시 짐작이 맞았다. 이 기록들에는 공통점이 존재했다. 당연한 것처럼 느껴져서 놓치기 쉬운, 그러나 승패를 갈라 놓을 정도로 중차대한 요소였다.


"······하."


나는 맥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가, 느베타의 시선이 느껴져서 자아에 도취된 황자가 취할 법한 포즈를 취해주었다. 진정한 배우는 관객이 단 한 명 뿐이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법이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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