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돈까스 한입 하실래예

삼류배우가 마법천재 황자님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이기준
그림/삽화
연근조림
작품등록일 :
2023.05.19 06:32
최근연재일 :
2023.08.10 08:57
연재수 :
64 회
조회수 :
164,010
추천수 :
8,549
글자수 :
329,698

작성
23.05.31 19:58
조회
4,471
추천
209
글자
12쪽

첫 주연 (8)

DUMMY

황태자의 동공이 충격으로 확장되었다. 그의 표정은 인간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을 맞닥뜨렸을 때 어떤 얼굴이 나오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네가 지금······나를 경연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것이냐?"


그의 충격은 곧 분노로 대체되었다.


"네가 감히!"


그가 벽력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당신이 먼저 시작했어!"


나는 그에게 맞고함을 질렀다.


"당신이 먼저 시작했잖아. 당신이 내 샤디아를 죽였잖아!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도 어떻게 내게 소리를 지를 수 있지? 당신은 인간이 아니야. 당신 같은 건 그래······모래가 되어버려야 해. 모래가 되면 아무도 해칠 수 없을 테니까."


나는 핏발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형용할 수 없는 확신이 뱃속에서부터 차오르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눈앞의 증오스러운 놈의 피를 모래로 바꿀 수 있다는, 단지 손만 뻗으면 된다는 확신.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영감을 준 건 라이벌인 자히라다. 지금까지 마지드처럼 살아왔다면 당신은 마지드나 다름없다는 말에 나는 황태자를 떠올렸다. 그는 무고한 여인을 납치했고, 죽음으로 내몰았다. 그를 마지드에 대입하는 건 죄 없는 여자에게 감정을 이입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나는 오른손을 뻗어 그를 가리켰다. 손을 뻗자마자 법칙이 움직이는 게 또렷이 느껴졌다. 그것은 정말로 법칙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을 만큼 명료해서, 왜 내가 지금까지 마법을 쓰지 못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황태자는 더 이상 소리치지 않았다. 그랬더라면 그는 모래 포대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내가 법칙을 움직이는 동시에 그의 법칙도 움직였다. 나와 그 사이의 현상이 엄청난 속도로 왜곡되기 시작했다.



**



"충격에 대비하시오!"


바툰이 고함을 치며 심사위원석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른 심사위원들은 이미 한쪽씩 방위를 선점하고 있었다.


"큭···!"


엄청난 마력이 바툰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바툰은 정신을 다잡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무대를 중심으로 공간의 급격한 일그러짐이 관측되었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법칙이 서로 부딪힐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강력한 마법은 대상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법칙을 접한 모든 것을 바꿔놓는다. 샤말 황자의 마법은 자칫하다가는 경연을 보는 관객들의 피까지 모래로 바꿔놓을 우려가 있었다. 바툰이 기억하기로 근 십 년 내에 데뷔무대에서 이런 위력의 연기를 보여준 마법사는 단 한 명 뿐이었다.


황태자, 유셉 이븐 샤리프.


유셉은 자타가 공인하는 괴물이었다. 제국민들은 그의 존재를 법칙이 만들어낸 자연재해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샤말은 성년이 될 때까지 어느 무대에서도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던 연기자였다. 그의 재능은 평범하다고 여겨졌다. 샤말이 설마 자히라를 압도하리라고는, 심지어 황태자에게 도발을 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바툰!"


법칙의 회오리 속에서 외마디 외침이 들렸다. 황태자의 마력이 거세게 증폭되기 시작했다. 황태자는 어린 동생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작정인 듯했다. 바툰은 정신력을 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리며, 왼손 검지로 샤말 황자를 가리켰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반대편에 선 입장이지만, 그는 타자립의 감독 책임자로서 인명피해가 나오도록 둘 수 없었다.



**



온 세상이 거꾸로 뒤집어져 있었다. 속이 메스꺼운데다 팔다리는 고장난 것처럼 말을 듣지 않았다. 내가 VVIP석으로 날아가 거꾸로 처박혔다는 걸 알게 된 건 정신이 조금 돌아오고 나서다.


보였다.


나의 의지를 따라 법칙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보기 전과 한 번이라도 보고 난 뒤의 세상은 완전히 달랐다. 나는 거꾸로 처박힌 채 실실 웃었다.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픈데도 웃음이 나왔다. 연기는 정말로 마법이 될 수 있었다.


"경고했을 텐데. 타자립의 대가가 하찮아보일 결말을 선사해주겠다고."


황태자가 내게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의 몸 주변에서 수많은 일그러짐이 느껴졌다. 그는 그야말로 법칙의 요새 같았다. 나로서는 가늠도 되지 않는 무수한 마법이 그의 의지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난 죽는 건가?


무대를 하다 죽을 각오는 마친 지 오래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방금 어마어마한 가능성의 세계를 엿보았다. 그것을 알게 된 이상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삶을 마감할 수는 없었다.


"멈추십시오."


누군가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매니저 소녀였다. 소녀는 곡도를 빼어 황태자를 향해 겨누었다.

소녀의 몸에도 법칙이 감돌고 있었다. 황태자가 요새 같았다면, 그녀에게 느껴지는 건 무엇이든 꿰뚫을 것만 같은 날카로운 검의 이미지였다.


"더 다가오시면 베겠습니다."

"가소로운 년, 감히 만법의 제왕이 될 몸에게 덤비겠다는 거냐?"

"무사히 제위에 오르고 싶으시다면 죽음을 가까이하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소녀가 살벌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나처럼 연기를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부러져본 적 없는 두 개의 자기확신이 첨예하게 부딪혔다.


"그쯤 해 둬."


나는 소녀를 말리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둘을 싸우도록 둘 수는 없었다. 그때는 정말로 사태를 돌이킬 수 없을 테니.


"괜찮으십니까?"

"멀쩡하니까 날 쪽팔리게 만들지 마라."


나는 그녀에게 차갑게 면박을 주었다.


"역시 형님이시군요. 한 수 배웠습니다."


이어서 황태자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뭐?"

"최고의 마법사를 상대로 데뷔무대를 치러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아우의 무리한 요구에 맞장구를 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그저 내 즉흥연기에 맞장구를 쳐줬을 뿐이잖아, 안 그래?


황태자는 내가 자히라를 이길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가능성 하나 때문에 내 혓바닥을 뽑아버리고 싶은 기분을 참았다고 말했다. 즉 그는 감정보다 가문의 명예를 더 우선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잘 생각해보는 게 좋을 거다. 수많은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 분을 못 이겨 동생을 쳐죽이든지, 아니면 이 모든 걸 공연의 일부에 포함시켜서 전설적인 무대를 만들어볼지.


"······."


침묵이 길어졌다. 극장은 수천 명의 사람이 모였다고는 믿기 힘들 만큼 조용했다. 관객들은 숨을 죽인 채 황태자에게 온 감각을 기울이고 있었다.


"······제법이더군."


마침내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서툴지만, 그만하면 가능성은 보여줬다."


그는 뒷짐을 지더니, 언제 날 죽이려 들었냐는 듯이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도 마법사이기에 연기력이 뛰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 능숙하게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잠시만요!"


갑자기 자히라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마법에 휩쓸리기라도 한 것인지 머리가 온통 산발이었다.


"설마 동생분께서 승리했다고 말씀하실 건 아니시죠?"

"안 될 게 있나?"


그녀의 눈빛이 표독스럽게 변했다.


"물론이죠, 전하께서는 저 계집을 먼저 죽이는 쪽이 승리한다고 하셨잖아요!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계집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힌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저, 자히라에요!"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하는군."


황태자가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렸다.


"나는 피해를 입히라고 한 적이 없다, 죽이라고 했지. 시원찮은 마법으로 내 눈을 더럽혀 놓고는 염치도 없구나. 그리고 내 다른 요구는 어디다 팔아먹었나. 분명히 말했을 텐데. 암마르였다면 결코 분노할 수 없었을 대상에게 분노를 쏟아내 보라고."

"장차 만법의 제왕이 되실 유셉 형님이야말로 암마르 같은 천것이 결코 분노할 수 없었던 대상이었죠. 말씀을 주의 깊게 듣지 않았더라면 이 아우도 놓칠 뻔 했습니다."

"바로 그거다."


황태자가 흡족하게 웃었다. 이상한 기분이 든다. 사적으로 전혀 친하지 않은 배우와 촬영에 들어갔는데, 막상 카메라가 돌아가니 서로 애드립이 기가 막히게 들어맞는 느낌.


그러나 자히라도 순순히 물러나진 않았다.


"저는 납득할 수 없어요. 심사 기준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면 그건 제가 아니라 심사위원장의 책임이겠죠. 저는 재심을 요청하겠어요. 필요하다면 재시합이라도···!"

"그만두어라."


축 처진 눈매를 가진 건장한 중년의 남성이 끼어들었다. 그는 이 경연의 또다른 심사위원이었다.


"···바툰 숙부님."


자히라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남성은 자히라의 숙부인 듯했다. 어쩐지 심사위원장에 친형을 앉혀놔도 괜찮나 싶었는데, 양쪽 가문에서 사람을 한 명씩 보냈던 모양이다.


"네 패배다, 자히라. 심사위원단은 샤말 전하의 승리에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뭘 근거로 그런 편파적인 판단을 하신 거죠?"

"연기력, 임기응변, 마법의 발동속도와 위력. 무대에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이다."

"숙부님, 어떻게,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가···!"

"더 이상 날 부끄럽게 하지 마라. 네가 여전히 사레디일 수 있는 동안만이라도."


바툰이 음울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이미 자히라를 가문 바깥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샤말 전하."


그가 몸을 돌려 내게 말을 걸었다.


"전하께서는 금번 타자립의 승자가 되셨습니다. 규칙에 따라 승자는 패자에게 한 가지 요구를 할 수 있습니다. 꼭 지금 밝혀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만, 혹여 생각해두신 요구조건이 있으십니까?"


이제 모든 사람의 관심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요구는 이렇습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뜸을 들였다.


"자히라 대공녀는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오로지 진실로만 대답할 것."

"진실로만 대답하라고? 그게 전부인가?"

"그렇습니다."


요구조건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었다. 무엇이 그녀에게 적절한 벌이 될지. 내 결론은 진실이 그녀를 심판하리라는 것이다.


나는 황태자를 향해 물었다.


"혹시 형님께서는 상대의 말이 진실인지 가려낼 수단이 있으십니까?"

"물론이다. 마법사가 상대라면 꽤 까다롭겠지만, 되다만 풋내기라면 문제 없다."

"알겠습니다."


나는 자히라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머물 곳을 정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내가 뭘 물어볼지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히라 유스라 사레디."


그녀가 침을 꿀꺽 삼켰다.


"네가 나한테 줬던 케말 -"

"가겠습니다."


그녀가 다급히 말을 잘랐다.


"가다니, 어딜 말이냐?"


바툰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대사막으로 떠나겠습니다."


그의 미간에 세로줄이 죽죽 그였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냐? 샤말 황자가 요구한 건 질문에 솔직히 대답하라는 것뿐이었다. 지금까지 타자립을 여러 차례 보아왔지만, 이 정도로 관대한 조건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너는, 고작 답변 하나를 못해서 추방령을 택하겠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자히라는 고집스럽게 입을 앙다물었다. 그녀로서는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겠지. 샤말이 자살한 정황을 낱낱이 파헤친다면 그때는 타자립에서 진 게 문제가 아니라, 황족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가 뒤집어 씌워질 테니. 그녀는 감옥에 가지 않아서 좋고, 나는 그녀가 샤말의 흑역사를 떠안고 사라져줘서 좋고. 모두가 행복한 엔딩이네.


"황자 전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지켜보던 매니저 소녀가 낭랑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샤말! 샤말! 샤말!"


동시에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나는 떨떠름하게 서 있다가, 무대 가장자리로 가서 두 팔을 넓게 벌렸다. 몸져 눕는 한이 있더라도 팬서비스는 제대로 하라고 배웠거든.

온 몸이 쿡쿡 쑤셔왔다.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제법 들떠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주연이었던 무대가 성황리에 끝났으니까.


작가의말

소제목 ‘첫 주연’이 끝났습니다. 과분한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다음 소제목의 이름은 ‘이기적인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일러스트레이터 박시진 님께서 어마어마한 표지를 선물해주셨습니다. 소중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15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삼류배우가 마법천재 황자님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6 이기적인 거짓말 (7) +12 23.06.08 3,238 169 9쪽
15 이기적인 거짓말 (6) +9 23.06.07 3,140 173 9쪽
14 이기적인 거짓말 (5) +3 23.06.06 3,193 149 11쪽
13 이기적인 거짓말 (4) +5 23.06.05 3,294 151 11쪽
12 이기적인 거짓말 (3) +12 23.06.03 3,533 165 11쪽
11 이기적인 거짓말 (2) +6 23.06.02 3,828 167 13쪽
10 이기적인 거짓말 (1) +3 23.06.01 4,329 175 12쪽
» 첫 주연 (8) +15 23.05.31 4,472 209 12쪽
8 첫 주연 (7) +13 23.05.30 4,476 200 10쪽
7 첫 주연 (6) +7 23.05.29 4,642 194 10쪽
6 첫 주연 (5) +6 23.05.27 4,838 202 13쪽
5 첫 주연 (4) +5 23.05.26 5,084 196 13쪽
4 첫 주연 (3) +10 23.05.25 5,568 210 10쪽
3 첫 주연 (2) +10 23.05.24 6,287 209 9쪽
2 첫 주연 (1) +8 23.05.23 7,842 219 11쪽
1 못생겨서 미안합니다 (0) +11 23.05.22 9,368 198 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