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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까스 한입 하실래예

삼류배우가 마법천재 황자님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이기준
그림/삽화
연근조림
작품등록일 :
2023.05.19 06:32
최근연재일 :
2023.08.10 08:57
연재수 :
64 회
조회수 :
164,009
추천수 :
8,549
글자수 :
329,698

작성
23.05.23 20:00
조회
7,841
추천
219
글자
11쪽

첫 주연 (1)

DUMMY

서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들어온 풍경은 하늘하늘한 레이스였다. 그 레이스가 침대 프레임을 꾸민 장식이라는 걸 깨닫는 데엔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나는 한참 동안 넋을 놓고 있다가, 누운 자세에서 솟구치듯 몸을 일으켰다.


'출근!'


김현이 분명 아침 먹기 전에 회사로 나오라고 했는데, 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아니, 시간이 문제가 아니다. 난생 처음 보는 인테리어, 값비싸 보이는 장식들······내 기억에는 없는 풍경이다.


이상하다, 난 분명 자취방에서 술을 마시다 뻗었을 텐데. 누가 나 같은 가난뱅이 배우를 호텔 스위트룸에 가져다 놨을 리도 없고.


나는 버릇처럼 이마에 손을 짚다가, 팔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탄탄하다는 걸 느꼈다. 게다가 피부색이 달랐다. 약간 노르스름하던 피부는 온데간데없고, 진줏빛으로 빛나는 하얀 살갗이 보인다.


······아니겠지, 설마.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건 단역을 전전하던 산도적이 아니라 연하늘색 눈을 가진 미소년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뺨을 쓰다듬었다. 거울 속의 소년도 정확히 같은 동작으로 뺨을 쓰다듬었다.


드디어 미쳐버린 건가? 오디션에 떨어진 충격 때문에?


아니면 꿈을 꾸는 중인가보다. 못생긴 한이 골수까지 사무친 나머지 미소년 빙의 자각몽을 꾸는 지경까지 간 거지.


"깨어나셨군요."


갑자기 방문이 달칵거리며 열렸다. 연한 갈색 피부를 가진, 건강미 넘치는 소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윗가슴이 드러나는 크롭티를 입고, 배꼽에는 피어싱, 귓불에는 고리 장식을 달아두었다. 전체적으로 노출이 심한 복장을 망토를 둘러 커버하고 있었다.

소녀를 보는 순간 여기가 한국이 아니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패션센스가 너무 과감하기도 하거니와 입에서 자연스레 나오는 말도 한국어가 아니었다.


"누구······누구시죠?"


일단 대꾸를 해봤는데, 소녀의 얼굴이 못 볼 꼴을 본 사람처럼 일그러진다.


"뭡니까, 어울리지도 않는 존댓말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자르르 흐른다. 그녀는 이 몸의 주인을 아는 사람인 것 같다. 아직 정황을 파악하진 못했지만, 그녀의 의심을 사면 안 될 것 같다는 촉이 온다. 나는 급한대로 잠이 덜 깬 흉내를 내기로 했다.


"아····너였군.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

"그건 제가 묻고 싶습니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유리병 하나를 주워들었다. 손바닥만한 크기의 반투명한 유리병이었는데, 비슷한 병들이 바닥에 몇 개 더 흩어져 있었다.

그녀는 병 입구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더니,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말했다.


"케말라 즙이로군요. 대체 이런 독극물로 뭘 하려고 하셨던 겁니까."


나와 그녀의 시선이 동시에 침대 발치에 닿았다. 이 몸의 주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걸쭉한 토사물이 보였다. 정황상 내가 빙의한 인물은 음독자살한 모양이다.


이토록 어리고 아름다운 사람이 무슨 이유로 죽음을 자처한 걸까.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의 자살이 알려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은 든다. 앞으로도 쭉 내가 이 인물을 대신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판단이었다.


"별 거 아니야. 순수한 호기심이지."


우선 나는 웃었다,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놀랍군요."


소녀가 미간을 찡그렸다. 경멸의 기색이 역력하지만, 나를 수상쩍게 바라보는 것 같진 않다.

부티나는 방, 어린 나이, 아름다운 시중인, 이 세 가지 키워드를 조합해 도출한 결론은 방탕한 재벌 3세의 페르소나였다. 다행히 이게 먹히고 있는 듯했다.


"노파심에 말씀을 드립니다만, 독 같은 얕은 수는 쓰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상대를 암살한다고 해서 데뷔무대 자체를 없던 걸로 만들 수는 없으니까요."


아는 단어가 나왔다, '암살', 그리고 '데뷔.'


분명 아는 단어들이긴 한데, 빈약한 내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그 둘을 하나로 엮을 수가 없다.


"그냥 호기심일 뿐이야. 너무 확대해석하진 말자고."

"정말이지 황자님은······"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나는 감도 못 잡고 있다. 내가 어떤 인간이며, 그녀와는 무슨 관계인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는 이런 상황에 익숙한 사람이다. 대본에는 결코 모든 것이 쓰여있지 않았다. 대본이 말해주는 것은 어떤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뿐이다. 삶의 나머지 부분은 배우가 상상력으로 메꿔야만 했다.


그러니 상상해본다. 나는 고귀한 태생이며, 무언가 어려운 일에 직면해있으며, 극단적인 결말을 선택할 만큼 정신적으로 몰려있다. 예민함, 피해망상, 비관적인 사고방식 등의 키워드가 떠오른다.


"정말이지 뭐? 날 모시게 된 걸 후회하나?"


나는 나른한 어조로 물었다, 소파에 허리를 깊게 묻으며.


"···정말이지 제가 황자님의 아사라 바탈이 되었다는 게 지금처럼 만족스러울 때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손을 허리 뒤로 돌리며 싱긋 웃었다.


황자?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녀는 날 황자라고 칭한 것 같다. 그나저나 아사라 바탈은 또 뭐람. 이곳이 대한민국이 아닌 건 당연하거니와, 어쩌면 내가 알던 지구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면 내 아사라 바탈에게 묻겠는데. 그 데뷔무대란 것 말이다."


나는 다음에 할 말을 신중하게 생각했다.


"준비를 하긴 해야겠는데, 너라면 내가 뭘 해야 할지 잘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어렵지 않습니다. 무대에 오르셔서 그간 갈고 닦아온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시면 됩니다. 그러라고 있는 게 오디션이니까요. 아마 황자님의 재능이 너무 찬란해서 다들 눈이 멀어버리고 말 겁니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날 비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두 번째로 나온 아는 단어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디션이라니, 데뷔라니.


그 두 단어만 놓고 보면 내가 뭘 하는 놈인지 알겠는데, 황자라는 호칭이 문제다.


황자.


황제의 아들.


황제.


왕국을 아우르는 거대 국가를 다스리는 전제군주.


오디션이나 데뷔 따위완 백만 광년쯤 거리가 있는 타이틀이다. 황자는 권력을 세습받잖아, 나 같은 서민 나부랭이랑은 달리.

설령 황자가 권력을 세습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치열한 궁중암투를 통해서 제위를 거머쥔다고 해도, 그걸 두고 오디션이라고 부르진 않지 않나?


가능성은 둘 중 하나다. 황자가 내가 알던 그 황자가 아니거나, 오디션이 내가 알던 그 오디션이 아니거나.


"물론 내 재능은 찬란하지. 당연한 걸 장황하게 떠들지 마라."


그녀의 눈에 경멸의 빛이 스쳤다. 아무래도 내가 캐릭터를 제대로 잡은 모양이다.


"그러면 황자님의 미천한 아사라 바탈은 이만 물러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내일 있을 무대를 준비하려면 바쁘실 테니까요."

"잠깐만."


나는 방을 떠나려는 그녀를 멈춰세웠다. 그녀의 태도로 미루어보아, 내가 씌인 인물은 오만하고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인물이 자기 목구멍에 독극물을 흘려 보냈을 정도라면, 그 데뷔무대라는 것은 분명 배우의 감만으로는 헤쳐 나가기 힘든 난관일 것이다.


"무슨 일이신지요."

"아직 내가 뭘 해야하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야 황자님의 찬란한 재능으로···"

"당연한 걸 떠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나는 재능이 아니라 노력을 묻고 있는 거다. 말해, 무대를 준비하려면 내가 뭘 노력해야 하지?"


그녀의 눈매가 좁아진다. 마치 내가 누구냐고 묻는 듯한 눈초리다. 그녀가 아는 소년은 지난밤에 죽었어야 한다. 스스로의 나약함과 운명의 무게에 짓이겨진 끝에.

아무리 내가 연기를 잘하더라도, 소년이 여전히 살아있고, 앞으로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다는 것 자체가 캐릭터의 왜곡이다.


"설마하니 황자님께서 노력이라는 말을 꺼내시는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나라고 변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아쉽습니다. 오 년 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더라면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었을 텐데요. 하지만 연기는 벼락치기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영역입니다. 연기력이란 삶에 대한 열정······호기심, 관찰력, 집요함······그런 다양한 미덕이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 올린 관록에서 나옵니다. 평생 허송세월하다가 하루 바짝 노력했다고 해서 심사위원들을 속일 수는 없죠."


연기?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종이 울렸다. 세 개의 점이 머릿속에서 선으로 이어져 삼각형을 만들었다. 데뷔, 오디션, 연기,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틀림없이···


"설령 심사위원을 속인다고 해도, 법칙까지 속이지는 못합니다. 법칙은 오직 진실에만 귀를 기울이죠. 진실된 법칙만이 마법이 될 수 있기 때문에요."


마법?


간신히 이어놓은 선이 헝클어진다. 어렵사리 윤곽을 잡아나가고 있었는데, 마법이라는 한 마디 때문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만다.


"그래서 저는 황자님의 아사라 바탈임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어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황자님께서 '두 번째 방법'을 택하신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그녀는 여전히 손을 뒤로 돌린 채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로 무모한 분은 아니시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잠깐, 두 번째 방법이라는 건 -"

"책을 읽으십시오."


그녀가 턱짓으로 책상을 가리켰다.


"책 속에 답이 있습니다. 그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 무대는 내일 오전 9시에 시작됩니다. 그 전에 책 속에서 살 길을 찾으세요."


그녀가 방을 떠났다. 나는 서둘러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 위에는 한 권의 책이 놓여있었다. 얼마나 펼쳐봤던지 속지가 빨래를 한 것마냥 너덜너덜한 책이었다.


여기서부터 고민이 시작된다.


'마법학개론.'


책의 제목이다. 농담을 말했다간 불벼락이 떨어질 것만 같은, 근엄하고 진지하기 짝이 없는 서체로 그런 글씨가 음각되어 있었다, 맹세컨대.

이 모든 게 꿈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한층 강해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말 같지도 않은 제목을 단 책이 나돌아다닐 리가 없잖아.


하지만 소녀도 내게 마법을 언급했었다. 게다가 자고 일어났더니 남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게 된 것부터 이미 말 같지도 않은 상황은 벌어졌다. 나는 의심을 접어두고 페이지를 넘겨보았다. 다행히 말과 마찬가지로 문자를 이해하는 데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책의 첫 단락은 이런 문구로 시작하고 있었다.


- 모든 마법사는 훌륭한 연기자다.


나는 미간을 모으며 반문했다. 거꾸로 써야 말이 되는 거 아니냐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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