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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까스 한입 하실래예

삼류배우가 마법천재 황자님

웹소설 > 작가연재 > 판타지, 퓨전

이기준
그림/삽화
연근조림
작품등록일 :
2023.05.19 06:32
최근연재일 :
2023.08.10 08:57
연재수 :
64 회
조회수 :
164,128
추천수 :
8,551
글자수 :
329,698

작성
23.05.25 19:54
조회
5,571
추천
210
글자
10쪽

첫 주연 (3)

DUMMY

나는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높다란 천장에는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그래······어쩐지 너무 술술 풀리더라. 나처럼 박복한 놈한테 행운이 거저 들어올 리가 없는데, 그렇지?


이권 때문에 서로 싸우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럴 수 없지만, 그럴 수 있다고 쳐보자고. 지구라고 야만적인 짓거리들을 하지 않은 건 아니잖아. 우린 심지어 콜로세움에 사람과 맹수를 같이 풀어놓기도 했다.


납득하기 힘든 건 왜 황자인 내가 필드에서 뛰느냐는 거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정도껏이어야지, 보통 궂은 일은 아랫것들을 시키지 않나?


일단 별첨해뒀다는 마법은 확인해봐야겠다. 여기에 내 운명이 달려있다고 하니.


별첨문서는 암마르 1인칭 시점으로, 마치 쪽대본같은 느낌으로 작성되었다. 짐작한대로 암마르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저주를 걸어서 영주의 머리카락 사이에 새치를 숨겨놨다는 둥, 영주가 가끔 발이 꼬이는 것도 자기 탓이라는 둥, 망상병 환자의 전형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주옥같아서, 집착이 인간을 얼마나 피폐하게 만드는지 말해주는 사례집으로 써도 좋을 듯했다.


나는 문서를 다 읽은 후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각은 12시. 그렇다면 데뷔무대까지 남은 시간은 20시간 남짓이다. 자는 거, 먹는 거, 이동하는 거,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 쓰일 잡다한 시간까지 빼면 실질적으로 남은 건 10시간 안팎이라고 봐야 한다.


해볼만 하겠는데?


강박증을 가진 캐릭터는 연기 연습할 때 많이 연구해봤다. 연습할 시간이 하루밖에 없다는 점이 걸리지만, 촬영장에서는 그날 연기할 대본이 그날 아침에 날아오는 일도 흔하다. 그마저도 촬영을 하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게 대본이라는 생물이다.


나는 거울을 흘긋 쳐다보았다. 거울 속의 소년은 웃고 있었다.


불나방같은 놈. 살 날이 하루밖에 안 남은 주제에 웃음이 나오냐.


그러나 미소는 도무지 입가를 떠날 줄 몰랐다. 단 하루라도 좋으니 이런 몸을 가지고 연기를 해보고 싶었다. 평생의 소원이 이뤄졌으니 웃지 않을 이유가 없다. 무대를 하다 죽는 거야 배우에겐 호상일 테고.


뭐, 암마르만 제정신이 아닌 건 아니라는 얘기다.



**



"황자님, 들어가겠습니다."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어제의 그 소녀였다. 그녀는 여전히 노출이 심한 복장에, 허리춤에 활처럼 휘어진 칼을 차고 나타났다.


"이게 다 뭡니까?"


그녀가 바닥에 흩어진 종이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뭐긴, 내 노력의 증거지."

"설마 밤 새신 겁니까?"

"그럴 리가. 컨디션 관리도 무대의 일부라고."


그녀가 나를 탐색하듯이 훑었다.


"자신이 있으신가보군요."


나는 대답대신 어깨만 으쓱였다.


자신이 있을 리 없지. 나는 내 이름조차도 모른다. 누가 나를 타자립 상대로 지목했는지도 모르고.


다만 나는 간밤에 최선을 다했다. 나는 꿈도 암마르의 꿈을 꿀 정도로 배역에 몰입했다. 주어진 여건하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경연을 하겠다는 건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연기력은 수치화가 불가능한 개념이잖아.


"황자님의 상대는 대공녀이신 자히라 유스라 사레디님이십니다. 천재 배우로 명성이 자자한 분이시죠. 누구도 황자님이 그분을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상관 없어."


천재 배우라, 오히려 좋지. 나는 껍데기만 17살짜리 꼬맹이일 뿐, 안에 든 건 숙련된 배우다. 데뷔무대랍시고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를 붙여주면 나만 불편할 뿐이다.


"황자님."


소녀가 날 불렀다, 정색하면서.


"왜?"

"도망치셔도 됩니다."

"······뭐?"

"죽을 만큼 괴로우시면 그냥 도망치세요. 못본 척 해드릴 테니까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다소 날카롭게 반문했다. 서류에는 일신상의 중대한 사유가 있지 않는 이상은 반드시 타자립에 응해야 한다고 쓰여 있었다. 패배의 대가가 추방이라면, 도망치다 걸린 죄는 그보다 훨씬 무거울 게 뻔했다.


소녀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미동조차 없어서, 왠지 모르게 오싹한 느낌이 든다.


"제가 이런 말을 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만, 황자님을 모실 날이 이제 하루도 안 남았으니 저란 사람도 좀 감상적이게 되네요. 예, 타자립을 포기하세요. 황족으로서의 권리를 내려놓고, 아무도 찾지 못할 벽지에 숨어서 평민으로 살아가시는 겁니다. 명예가 없어도 사람은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저 같은 여자처럼요."


다 내려놓고 도망치라니, 그게 그녀가 말했던 '두 번째 방법'인가보다.


"물론 저는 황자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황자님이 무모한 도전 끝에 산산히 부서지는 모습을 보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이겠습니다만······케말라 즙을 구해다 마실 정도면 이미 부서지신 것 같아서요. 철부지의 오만함이 부서지는 모습이 재미있는 거지, 이미 부서진 사람을 뭉개는 건 아무런 여흥거리도 되지 않죠."


소녀는 지나치게 솔직했다. 황자인 나한테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래서 더 믿음이 갔다. 나는 팔짱을 끼고 고민에 잠겼다. 황족에서 평민이 되는 건 내겐 아무런 패널티가 아니다. 어차피 나는 평생 평민으로 살아왔다. 중요한 건 연기, 즉 마법이다.


"혹시 평민도 마법을 배울 수 있나?"

"물론입니다."


그녀가 생글 웃었다.


"마법을 익히는 데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습니다. 모든 지식은 만인에게 개방되어야만 한다는 게 초대 황제이신 알리 이븐 샤리프님의 지론이셨죠. 생업을 떠나 학업에만 매진할 수 있는 경제적 자유와, 값진 지식을 아낌없이 공유해줄 수 있는 인맥만 충족하면 됩니다."


경제적 자유와 인맥이라니, 그런 건 이전 세계에서도 금수저들이나 누리던 거잖아.


"평민들의 삶은 어떻지? 살만한가?"

"평민들도 황자님과 같은 사람입니다. 마냥 고달프기만 해서는 삶이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기쁨과 행복이 존재합니다."

"물론 그렇겠다만."


역시 멍청한 질문이었다.


"하지만······황자님에 한정해서는 이야기가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그녀가 갑자기 내게 고개를 기울였다. 윤기 나는 밤색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 커튼처럼 드리웠다. 나는 당황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뭐, 뭐냐?"

"황자님은 지나치게 아름다우십니다. 자신을 지킬 힘이 없는 아름다움이란 저주나 마찬가지죠. 제가 아는 바에 의하면 황자님 같은 이들의 운명이란 한결같았습니다. 폭력조직에 납치당해 남창이 되거나, 변태적인 부호에게 팔려나가 애완동물로 길러지곤 하는 거죠.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서 미모가 떨어지면···"

"그, 그만···! 충분히 알아들었다."


나는 질색하며 팔을 내저었다.


"오디션장으로 데려다오. 무대로 가겠다."


역시 위험한 여자다. 이미 부서진 사람을 짓밟는 데엔 관심 없다더니, 대체 날 어디에 밀어 넣으려는 거지.

어차피 나는 타자립에 응할 작정이었다. 결코 주연이 될 수 없는 배우와, 살기 위해서 무대에 오르기를 포기한 배우.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전자다. 무대를 저버릴 거면 반반한 외모와 찬란한 재능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


나는 치장을 마친 뒤 소녀를 따라 침실을 빠져나왔다. 침실을 빠져나오면서 의심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설마하니 이 커다란 성과 수많은 하인들이 전부 나 한 명을 위한 것이 아닌가하는. 그러나 이건 정말로 멍청해보일 질문이라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날파리들이 잔뜩 몰려왔군요."


소녀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중앙 계단 아래의 홀에 사람들이 드글대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발견하자 서로를 밀쳐내며 악다구니를 내질렀다.


"샤말 황자님! 이쪽 좀 봐주세요!"

"유력한 우승후보인 자히라 님을 상대하게 되셨는데 어떤 전략이 있으신지요?"

"침실에서 케말라 즙이 발견되었다는 루머가 떠돌던데 해명 좀 부탁드립니다!"

"샤말 황자님!"


나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잘나가던 톱스타가 마약 빨고 폴리스라인에 섰을 때, 그때가 딱 이 정도 수준의 취재 열기였다. 다른 점이라면 그때 기자들의 손에 들린 건 마이크였는데, 이 사람들의 손에는 펜과 악기가 쥐어져 있다는 것이다.


음유시인? 바드? 극작가?


정확한 직업명은 모르겠으나, 기록장치가 발명되지 않은 이 미개한 사회에서 기자를 대신하는 사람들이라는 건 알겠다. 그들은 흡사 좀비떼처럼 몸을 부벼대며, 팔다리를 비틀며 돼지 멱 따는 소리로 외쳤다.


"샤말 황자님,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난감한데. 나한테 매스컴 대응력 같은 건 없다고. 톱스타로 살아본 경험도 없고, 리스크관리를 해줄 매니지먼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때였다. 눈앞에 백색 섬광이 번뜩이더니, 악기 하나가 자로 잰 듯이 반토막이 났다. 어느 틈인지 소녀의 허리춤에서 검이 빠져나와 있었다. 악기의 잘린 토막이 곡도의 매끄러운 날을 따라 서서히 미끄러졌다. 시끌벅적하던 홀은 삽시간에 무덤가가 되었다. 오직 박살난 악기가 통통 튀는 소리만이 요란할 뿐이었다.


"물러서라."


소녀가 잇소리로 경고했다.


"만법의 제왕이 되실 분이다. 죽고 싶지 않다면 마땅한 경의를 바쳐라."


나는 표정관리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녀의 행동은 상식을 가진 현대인으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폭거였다. 그러나 진짜 놀랄 일은 지금부터였다. 사람들이 주춤주춤 물러나더니, 정말로 무릎을 꿇기 시작했던 것이다.


"버러지들 같으니."


소녀는 경멸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안개처럼 스산한 눈빛을 흘리며 칼을 회수했다.

그때,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사라 바탈이 어떤 의미인지 내내 궁금했었는데, 이제야 알겠다. 그녀는 다름아닌 내 매니저였던 것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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