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날개 (5)
나는 아침이 밝자마자 새벽의 날개 극단에 들러서 각본을 점검하고, 배우들과 함께 단막극을 연습했다.
겉보기로는 대한민국에서의 삶과 특별히 다를 게 없었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존재했다.
마법.
'헤타로의 무한세계'는 내게 단 한 가지를 요구했다. 사람들이 나란 인간의 존재를 무겁게 받아들일 것.
극단은 내 존재감을 넓힐 수 있는 최적의 도구였다. 칼라일이 떠난 극단은 자연스럽게 나를 중심으로 뭉쳤고, 그들이 날 따를수록 마법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가는 걸 느꼈다.
칼라일이 다시 돌아오지 않은 건 의문이다. 그때 녀석은 극단에 불이라도 질러버릴 듯한 기세였으니까.
마법을 더 깊게 이해하게 되면서 생각이 바뀐 점도 있었다.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책에서 언급된 '헤타로의 무한세계'의 효과는 그게 전부였다. 그래서 잘 쳐줘야 예능용이겠거니, 위력은 대단치 않겠거니 했는데, 점점 나는 이 마법이 상상 이상으로 위험하다는 걸 깨달아갔다.
돌이켜보면 지난 세계에서 남들의 머리 꼭대기에 서는 사람은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종교인, 정치인 같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킬 수 있는 자들······그들이 세계의 진정한 주인이었지.
연예인이나 방송인, 유튜버 등을 봐도 그렇다. 말재주로 유명세를 얻은 자들은 비슷한 수준의 성공을 거둔 다른 분야의 사람보다 훨씬 영향력이 컸다.
만약 내가, 일국의 황자가 이 마법을 잘 쓰게 된다면······글쎄, 그때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래서 카심이 이걸 배우라고 한 건가?
아무튼, 나는 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느베타를 불러들였다. 사흘 후에 라시드의 궁에서 무도회가 열리는데, 알고 보니 그게 내 생각보다 훨씬 중요한 자리더라고. 황족이나 귀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귀족에 버금갈 만큼 성공한 사업가라던가,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룬 달인들, 언론인들, 심지어는 외국에서도 사절이 찾아온다나.
라시드가 나를 눈에 불 켠 듯이 지켜볼 것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중요한 자리에서 실수라도 했다가는 내 존재감은 바닥으로 떨어질 테고, 마법의 위력은 반감되고 말겠지.
"부, 부르셨는지요."
느베타의 호흡이 떨리고 있다. 그녀는 내 앞에만 서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특히 라나를 침대에 눕혀뒀던 후로 증세가 심각해졌다.
"알고 있겠지만, 엊그제 라시드 형님이 날 무도회에 초대했거든. 그래서···"
"드, 드디어 사교계에 데뷔하시는군요···!"
그녀가 작게 목소리를 높였다. 작게 목소리를 높였다는 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그렇게 들렸다.
"그래, 데뷔하게 됐지. 그러니 네가 예법이라던가 춤 같은 걸 좀 가르쳐다오. 너무 깊게 들어갈 건 없어, 망신당하지 않을 정도만 되어도 좋으니까."
"예, 예법이라면······귀족 영애분들을 어떻게 대해야할지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꼭 귀족 영애에 한정된 예법을 말한 건 아니다만······그것도 궁금하긴 하네. 가르쳐다오, 나 정도 위치를 가진 남자는 어떻게 교제를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응?"
"아무것도 배우실 필요가 없으세요."
느베타는 눈을 감으며 언제나처럼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 것도 배울 필요가 없다고.
"설명해 봐."
"그런 사교모임은······마, 마음에 드는 이성분께 여, 연기력을 어필하는 곳이니까요······여, 연기력은 마법사로서의 재능과 가, 가문을 물려받을 가능성을 말해주기 때문에······."
무도회장에서도 연기력을 어필하라니, 연기에 미친 나라답네.
"연기력을 어필하라고? 어떤 식으로 말이냐?"
"마음에 들지 않는 분께는···지, 진심으로 대해주시고...마음에 드는 분께는······사, 상황극을 해주시면 되어요. 친구처럼, 연인처럼···."
뭔가 거꾸로 된 거 같은데. 관심 없는 상대한테 상황극을 하고, 관심 있는 사람한테 진심을 보여야하는 거 아닌가.
"춤은?"
무도회니까 춤은 추겠지?
"추, 춤은 이제부터···."
그녀가 뺨을 붉히며 손을 내밀었다.
**
사흘이 훌쩍 지나갔다. 시녀들은 아침부터 나를 단장한다고 부산을 떨었다. 이날만큼은 느베타가 갑이었다. 라나도 시녀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구석에 조용히 서있기만 했다.
라시드의 궁까지 날 수행할 사람은 세 명이었다. 경비대장이자 운전기사인 타렉, 매니저 라나, 수행비서 느베타.
아, 타렉의 안주머니에 들어가있는 귀여운 도마뱀 '낫루'도 빼놓을 순 없다. 이들이 현재 내 가신단을 구성하는 에이스들이다.
꽃단장이 끝나자 나는 지체하지 않고 라시드의 궁으로 출발했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하기에 사흘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기에, 라나는 전갈의 등 위에서 내게 브리핑을 이어나갔다.
"정말 중요한 것들만 추려서 말씀드리겠습니다. "
"해 봐."
타렉에게 고삐를 넘겨준 덕에 라나는 내 곁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있을 수 있었다. 그녀는 내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첫 번째로 당부드릴 것은 그곳이 적지라는 걸 잊지 마시라는 겁니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누가 말로 꼬여내더라도, 절대 저와 떨어지시면 안 됩니다. 설령 마음에 드는 영애분이 나타나더라도 말이죠."
"······명심하지."
라시드가 멱살을 쥐었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유셉이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졌다면, 라시드는 결코 그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힘은 내가 노력만 하면 닿을 수 있는 수준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때 난 꽤 진한 굴욕감을 느꼈었다.
그나저나 마음에 드는 영애가 나타나다니, 그럴 것 같진 않아. 현재 내 주요한 관심사가 연애가 아니라는 건 라나나 느베타처럼 매력적인 여성들을 곁에 두고도 설렘보다 고마움이 더 크다는 게 증명하지 싶다.
"두 번째. 타자립 덕분에 황자님의 주가가 많이 올랐습니다. 황자님께 헛바람을 불어넣으려는 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겁니다. 그럴 때는 이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 "
"이 넓은 제국에서 내 편인 사람은 너하고 내 어머니밖에 없다는 거?"
"예, 기억하시는군요. 한 명을 덧붙이자면 황자님을 오래 전부터 지지해온 카렘 공이 계시지만, 아쉽게도 그분께서는 초대받지 못하셨습니다."
"알았다."
"다음은 시녀장이 설명해줄 겁니다."
라나가 느베타에게 턴을 넘겼다. 느베타는 몸에 두른 천이 뒤집어지지 않도록 바람과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었다. 그녀는 라나의 지목을 받자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네? 저, 저는 딱히 드릴 말씀이······저, 전하께서도 다 아실만한 것들이라······."
"그래도 환기를 해드려. 황자님은 건망증이 심각하시니까."
이건 라나의 대사였다. 그녀는 내 기억이 온전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느베타에게서 최대한 설명을 끌어내려는 듯했다.
그나저나 라나가 느베타에게 말하는 투가 되게 부드러운걸. 날 대할 때와는 완전히 딴판인데.
"그, 그렇다면 저는······으음······황자님께서는 2급 미만의 고유마법을 가진 가문의 여성과는 교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 정도를······."
"2급이면 후작가나 공작가가 해당됩니다. 적절한 상대인지 여부는 현장에서 시녀장이 판단해줄 테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렇군. 신분이 먼저가 아니라 마법이 먼저였군. 신분이 마법에 종속될 만큼 마법에 진심인 나라인거다.
"그, 그것 말고는···."
느베타는 더 할 말이 없는 듯했다. 하긴, 이제 와서 뭘 더 할 수 있겠어. 전갈 등 위에서 사교댄스를 출 것도 아니고.
대화를 나누는 사이 드디어 라시드의 궁에 도착했다. 라시드의 궁은 한 눈에 보기에도 내 궁보다 훨씬 컸다. 입구는 먼저 도착한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고, 정원에는 지금까지 내가 봤던 전갈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전갈이 주차되어 있었다.
"······엄청난데."
눈에 들어오는 인원만 족히 수백 명은 될 것 같다. 궁 안에 들어가있는 사람은 몇 배나 많을 테고.
"우아아!"
"엠페러 스팅어다!"
사람들은 내 전갈을 볼 때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봐서라기보다 그저 큰 전갈이 좋아서 그러는 듯했다.
적당한 곳에 전갈을 세워둔 뒤 우리는 궁 안으로 향했다. 내 주가가 올라갔다는 건 여기서부터 느껴졌다.
"샤말 황자 전하, '폼멜과 그의 진실되고 신뢰받는 친구들'에서 나왔습니다. 실례지만 이곳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지, 이것이 라시드 황자 전하를 지지한다는 행보로 받아들여도 좋을지,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어떻게든 인터뷰를 따보려는 기자들,
"돌아오는 주말에 제 별장에서 사냥 모임을 가질 계획입니다만, 오셔셔 자리를 빛내주실 수 있으실지···."
그들만의 사교클럽에 나를 넣어보려는 귀족들,
"극비리에 입수한 고유마법에 관한 정보입니다만, 전하께라면 우의의 표시로 반으로 깎은 가격에···."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늘어놓는 장사꾼들 등.
대부분의 접근은 라나가 가볍게 눈을 치켜뜨는 정도만으로 퇴치되었다. 생각해보니 타자립에서 주가가 오른 게 나 하나뿐이 아니겠더라고. 그 무시무시한 황태자와 당당하게 맞선 라나도 엄청나게 명성이 올라간 모양이다.
그러나 진정한 위협은 따로 있었다.
궁 입구에 거의 도착했을 때였다. 멀찍이서 하얀 옷을 입은 소녀가 내게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그녀는 나처럼 두세 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수행원들의 만류를 뿌리치더니 내 쪽으로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왔다.
"샤말 전하!"
먼저 말해두지만 이 나라의 여자들은 복장이 참 조신하지 못하다, 눈을 둘 곳이 마땅치 않을 정도로. 그건 귀족 여성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어서, 그녀가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시하는 게 내게는 당혹스러움으로 다가온다.
더 난감한 건 그녀와 내가 무슨 사이인지 모르겠다는 거. 샤말은 피 끓는 청춘이잖아. 약혼녀가 있었다지만, 이런 깨발랄한 아가씨와 어떤 역사를 쌓았을지 어떻게 알겠냐.
"전하를 여기서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어쩌죠? 이럴 줄 알았더라면 더 예쁘게 꾸미고 올 걸···."
소녀가 수줍게 웃었다. 이 거리감은 여사친 정도가 아니다, 썸이 분명하다. 샤말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존재했다. 그녀는 두 손을 다소곳이 모은 채 내 대답만을 기다렸다. 반달처럼 휘어진 눈에 무구함, 수줍은 희망, 그런 반짝이는 감정들이 가득 담겨있다.
"···전하."
그때, 느베타가 내게 바짝 몸을 붙이고 속삭였다.
"결정하시면 됩니다. 진심으로 대해주실지, 상황극에 응하실지."
나는 그제야 소녀가 연기를 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린 아무것도 아니었다. 방금 처음 본 사이에 불과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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