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주연 (3)
아니야, 살라. 그 대본을 쓴 놈은 연극을 말아먹었다는 이유로 자기 주군한테 손절당한 놈이라고.
라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평민인 내가 귀족들의 사정에 대해 너무 잘 아는 건 이상할 테니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물었다.
"대본이 아니라 마법책을 구해보는 건 어때?"
"농담이지? 마법책을 내가 어떻게 구해?"
"못 구하나?"
"당연하지! 그런 건 존귀하신 분들이나 가질 수 있는 물건이잖아!"
살라가 도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나는 황궁 도서관에 널려있던 마법책들이 엄청난 특혜였다는 걸 깨달았다.
하긴 그게 구하기 쉬울 것 같았으면 전국민이 다 마법을 쓰고 앉았게. 5급 범용마법은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으니까.
물론 마법을 익히는 난이도는 개인마다 다르게 느낄 수도 있다. 내게 졌던 자히라도 천재라고 소문이 자자하던 유망주였으니.
"어디서 마법책을 싸게 얻을 수 있다는 소문이 있긴 해.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너무 위험한 이야기지만······미안, 너무 내 얘기만 했지? 자, 전부 다 치웠어."
살라가 대본을 가방에 넣으며 싱긋 웃었다.
나는 잠시 갈등했다. 그가 이대로 엉터리 시나리오를 붙들고 씨름하도록 내버려둬야할지. 마법책을 가져다 주진 못하더라도, 대본이 구리다는 정도는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지금 내 신분은 옆 도시에서 흘러 들어온 떠돌이 소년이다. 대본 리딩을 할 줄 안다는 건 심각한 설정붕괴다.
"고마워."
"침대가 좀 낡긴 했는데, 시트는 빨아둔 거야. 짐 풀고 나면 아래층으로 내려 와. 청소하는 법을 가르쳐줄게."
살라가 방을 나서자, 나는 침대에 한 번 걸터앉아 보았다.
역시 딱딱하다.
돌로 만든 침대다. 위에 가죽을 깔아두긴 했지만, 엉덩이가 납작해지는 기분이 들 정도로 촉감이 단단하다. 목조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것도 어마어마한 특권이었다는 걸 알겠다.
방은 비좁았지만, 더럽지는 않았다. 거미줄만 걷어낸다면 꽤 봐줄만해질 것 같았다. 나는 돈주머니를 침대 위에 올려둔 뒤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좀 어땠냐? 지낼만 할 것 같냐?"
털보 아저씨가 물었다.
"제가 살던 곳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그는 껄껄 웃더니 앞치마를 벗어 바 위에 올려놓았다.
"아들! 잠깐 나갔다 올 테니 가게 잘 보고 있어라."
"아빠! 나 공부해야 한다니까?"
"시끄러, 종업원도 한 명 뽑아줬는데 떽떽거리지 마라. 연기인지 뭔지 헛지랄 한다고 손님들 귀찮게 굴지 말고."
손님들이 낄낄거렸다. 이런 상황을 한두 번 본 게 아닌 듯했다. 아저씨가 가게를 나서자, 살라가 입이 튀어나온 채로 내게 말했다.
"도박하러 가는 거야."
"도박을?"
"돈이 생기는 족족 도박장에 꼬라박아. 그럴 여유가 있으면 아들 공부하는 거나 좀 도와주지."
한 가정의 가장이 도박으로 재산을 날려먹고 있으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닐 텐데, 살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긴, 노예 매매업이 합법인 나라에서 도박이 불법일 리가 없다. 아저씨 체격에 양아치들한테 맞고 다닐 것 같지도 않고.
"자."
살라가 걸레를 내밀었다.
"잘 보고 똑같이 하면 돼."
나는 살라를 따라서 테이블을 닦고 여관 바닥을 쓸었다. 대학생 시절, 연기학원 수강료를 벌기 위해 알바를 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카심은 황자인 내가 평민의 삶을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이 황자는 고깃집에서 서빙도 해본 놈이라고. 경력직이었다는 말씀.
청소가 끝난 후에는 주문을 받는 연습도 했다. 나는 적당히 서툰 연기를 해가며 살라의 장단을 맞춰주었다.
낮이라 그런지 할 일이 많지는 않았다. 살라는 내가 얼추 일에 적응한 것 같자, 갑자기 빈 테이블들을 가운데로 모으기 시작했다.
손님들이 환호를 보내며 살라 쪽으로 의자를 돌려서 앉았다. 살라는 모아둔 테이블 위에 올라가더니,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가 만든 건 공연을 할 수 있는 즉석무대였다. 그는 삐그덕거리는 테이블 위에서, 열 명 남짓한 손님들을 내려다보면서, 엄숙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칼라일 카림 코우리."
아, 제발.
"나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면에서 완벽했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이런 나를 알아주지 않았다······."
대본을 찢어버렸어야한다는 후회가 든다. 그 낯뜨거운 시나리오를 실연하는 모습을, 극단도 아니고 여관에서 보게 될 줄이야.
각본의 수준만 문제인 게 아니었다. 살라의 연기력도 도저히 눈 뜨고 못 봐줄 지경이었다. 발성, 시선처리, 감정 표현······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라고나 할까.
반면 여관에 모인 주정뱅이들은 신이 나서 박수를 치고 환호를 보냈는데, 그들은 살라가 용을 쓰는 모습이 그렇게나 웃긴 모양이었다.
한 가지는 인정해줄 수 있겠다. 살라의 열정만큼은 진짜라는 거. 그도 자기 실력이 형편없다는 걸 알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주정뱅이들의 비웃음 앞에서 꿋꿋하게 무대를 가졌다.
연기자가 되는데 가장 큰 장벽은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는 용기다. 그는 용기만큼은 누구에게도 꿇리지 않았다.
살라가 무대를 내려왔다. 그는 소맷자락으로 땀을 훔치며, 기대감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어땠어?"
솔직히 말하자면 그 칼라일이 고소해도 할 말 없을 만큼 형편없는 무대였다.
"괜찮던데."
일단 친구가 되어야하니까.
"그 뭐냐······발성을 좀 더 연습하면 훨씬 나아지겠다."
팁은 주기로 했다. 설정 붕괴를 고민하긴 했지만, 이런 연기를 보고도 입을 닫는다면 그건 배우로서 직무유기라고.
"발성? 발성이 뭔데?"
"소리를 내는 기술이랄까······."
"소리는 제대로 내지 않았어?"
"발음은 좋았지. 하지만 연기하는 느낌이 아니라 발표하는 느낌에 더 가까웠어. 우연찮게 존귀하신 분들의 연극 무대를 훔쳐볼 일이 있었거든. 그분들의 무대는 마치 -"
"연극 무대를 봤다고?!"
살라가 흥분해서 침까지 튀기며 소리쳤다.
"응, 잠깐이었지만."
"어, 어땠는데?"
"마치 사람이 바뀐 것만 같았어."
살라가 충격을 받은 듯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너도 무대에 선 순간만큼은 여관집 아들인 살라가 아니라, 존귀하게 태어난 공자가 되어야 할 것 같아."
"하지만 나도 그러려고 노력했는데······."
"내가 정말로 칼라일 공자라면 발음을 또렷하게 하지 않을 거야.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해야만 하는 건 언제나 낮은 신분의 몫이니까. 내가 정말로 칼라일 공자라면 발음을 빨리 하지도 않을 거야. 아무리 말을 천천히 해도 사람들은 언제나 그에게 귀를 기울여줄 테니까. 말을 천천히 해도 된다는 건 듣는 사람을 자기 앞에 묶어둘 권력이 있다는 의미도 되거든."
살라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큼직해진다.
"그리고 내가 정말로 칼라일 공자라면······말을 하는 중간중간 비웃음을 섞어주겠지. 그 사람은 다른 인간들이 다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할 것 같거든. 또 뭐가 있을까? 그래, 내가 정말로 칼라일 공자라면, 자기 이름을 말할 때마다 톤을 조금 올릴 거야.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이 많이 억울한 사람이잖아."
살라는 이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스승님!"
그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아니, 이건 어디까지나 내 의견일 뿐이라···."
나는 다급하게 그를 일으켰다. 이러면 곤란하다, 우린 친구가 되어야한다고, 사제관계가 아니라.
"됐고 절부터 받으십시오."
"나 열일곱 살이거든."
"저보다 똑똑하신데 나이가 무슨 대숩니까?"
"자꾸 존댓말하면 나 일 그만둔다?"
우리는 한참 동안 옥신각신하며, 손님들에게 요깃거리를 던져주었다. 살라는 간신히 진정이 되자, 머리를 감싸쥐며 탄식하듯이 말했다.
"네 말이 맞아. 내가 한 건 연기가 아니라 발표였구나. 역시 난 재능이 없었던 거였어, 젠장!"
"그렇지 않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으니 헤매는 게 당연하지."
"나 벌써 이 년째 이러는 중이야."
살라는 다리를 쭉 뻗으며 푸념하듯 말했다.
"뭐, 연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연습하면 공자님처럼 나도 마법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니야, 도저히 안 돼. 일 년이나 연습했는데도 진짜 아무것도 모르겠어. 뭐가 마법이고 뭐가 법칙인지."
살라는 마법의 개념조차 모르고 있었다. 법칙이 담겨있지 않은 각본을 아무리 연습해봤자 마법을 배울 수 있을 리가 없다.
"근데 마법은 왜 배우고 싶어하는 거니? 아버지가 이렇게 멋진 여관을 하시는데."
"엄마를 찾고 싶어. 어릴 때 실종되셨거든. 사람을 찾는 종류의 마법이 있다고 들었는데, 내가 원하는 마법을 배우려면 먼저 존귀하신 분들의 눈에 들어야만 해."
"어떻게?"
"큰 돈을 내고 대학에 입학하든가, '무디낫 사기라'에 들어가거나······하지만 나 같은 애가 해볼 수 있는 방법은 아니야. 난 대학에 지원할만한 돈도 없고, '무디낫 사기라'에서 살아 돌아올 자신도 없으니까. 그러니 어떻게든 마법을 익혀서 실력을 인정받는 수밖에."
살라의 눈에 결의가 담겨있었다. 그는 단순히 강해지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마법사가 되려는 게 아니었다.
카심이 나를 이곳에 보낸 이유를 알 것 같다. 살라를 돕는 건 간단할 것이다. 지금 당장 내 정체를 밝히고, 그에게 아무 마법서나 한 권 던져주면 된다. 나는 말 한 마디만으로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나는 '야서'로서, '파히드'로서 해결책을 찾아내야만 한다. 법칙은 그 지점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뭐든지 도울게."
"너 진짜 좋은 사람이구나."
살라가 속없이 웃었다.
"좋아, 잠시만 기다려 봐."
살라는 주방으로 달려가더니, 적갈색 음료가 담긴 병을 하나 가져왔다.
"아빠가 아끼는 술이야. 취직 기념으로 한 잔 하자."
"대낮에?"
"뭐 어때?"
그렇군. 어쩌면 이 나라는 미성년자에게 주류를 팔지 말라는 법조차 없을 수도 있다.
"건배사는 누가 할까?"
살라가 내게 잔을 넘겨주며 물었다.
"위대한 마법사 살라를 위해."
나는 잔을 높이 들어올리며 말했다. 살라가 유쾌하게 웃으며 잔을 부딪혀왔다.
"파하드의 새로운 출발을 위하여!"
나는 잔을 부딪힌 뒤, 단번에 술을 털어 넣는 시범을 보였다. 살라는 조금 놀란 것 같더니, 날 따라 원샷으로 잔을 비워냈다.
"좀 더 줄까?"
"사장님만 괜찮으시면."
"괜찮아. 벌써 몇 병이나 해치웠는데 전혀 모르시더라고."
조금도 괜찮지 않은 거 같은데.
모르겠다, 나는 잔을 연거푸 비워내면서 살라가 술을 더 마시기를 유도했다. 적당한 음주만큼 친해지기 쉬운 방법도 없으니까.
"이야, 너 진짜 술 세다."
살라가 뜨거운 숨결을 토해내며 감탄했다. 그는 이미 목덜미까지 붉게 물든 채였다. 그는 자기와 대작하는 소년의 정체가 샤말 이븐 샤리프 황자라는 걸 짐작조차 못하고 있을 것이다. 마법으로 취기를 이겨내고 있다고도.
- 작가의말
견리님, 추천글 감사합니다. 이번 글에 들어가기 전 제가 편집자에게 한 말이 있었습니다. 슬슬 ‘노블리스트’라는 꼬리표를 떼고 싶다고요. 과거의 글이 아니라 현재의 글로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물론 포부는 그러하였으나, 현실은 녹록지 않네요. 그러나 이렇듯 제 글을 이해해 주시고 아낌없이 사랑해주시는 분들이 계시니, 전처럼 고지전을 혼자 벌이는 느낌은 들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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