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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달 님의 서재입니다.

라이칸슬로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완결

다미달
작품등록일 :
2022.08.01 22:22
최근연재일 :
2023.03.28 22:20
연재수 :
1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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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19
추천수 :
514
글자수 :
1,060,207

작성
22.10.07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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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합류 (5)

DUMMY

쿰쿰한 냄새.

창을 대신할 덧문도 없는 낡고 오래된 집이라면 어쩔 수 없이 풍기는 냄새다.

특별할 것도 없었기에, 굳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도 될 곳.

그런 곳에 한 사람이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는 집주인이라고 여겨도 전혀 이상할 점이 없는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만약 다 찢어져가는 옷을 입고서 연초를 입에 물고 있다면 더욱 완벽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깔끔한 옷을 입고 있었다.

손에 들려 있는 것 또한 술병도, 연초도 아니었다.

그저 잔뜩 녹슨 단검이었다.

단검 날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고서 앞뒤로 흔들던 이방인은 갑자기 손을 휘둘렀다.

어지러운 잔광을 흩뿌리며 날아간 단검.

벽에 팍 꽂힐 것 같았으나 대신 힘 빠지는 소리와 함께 튕겨나갔다.

단검은 몇 번 바닥을 구르다가 멈췄다.

칼날 끝이 가리킨 곳. 거기에는 메마른 피가 묻어 있었다.

사실 피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시간이 오래 흘러서 그런지 짙은 갈색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방인은 그게 피라고 확신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이 자리에 있을 필요도 없었기에.


'오물꾼, 로미어. 23년 전, 이 도시에 정착하고 나서 죽 이곳에 생활해왔다. 부모는 생사불명, 가족도 없고 결혼도 하지 않았기에 자식도 없다..'


이방인, 로이벤은 과거 이 집에서 살았던 전 주인에 대해 생각한다.

알고 있는 정보 속에서 혹시 새로운 사실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다시금 검토해 봤지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건진 건 없었다.

로미어의 일생은 단조로웠다.

가끔 도시 밖으로 나가서 오물을 팔 때 빼고는 딱히 가는 곳도 없다.

주말이 되었다고 성소원에 가는 것도 아니고.

술이 고파서 술집에 자주 가지도 않았다.

연고도 없고 친구도 없는 단조롭고 외로운 인생.

이런 사람이 같은 도시에 살고 있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연을 맺은 사람이 딱히 없다면 원한을 받을 일도 없었을 터.'


이상한 일이다.

골목길에서 살아간다 한들 사람과 관계를 맺는 법을 잊어버린 건 아니니까.

세상이 그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 해도 자신들끼리는 서로 위로하며 지내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로미어는 사교성이 별로 좋지 않은 건지 친한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옆집에 사는 사람조차 얼굴 말고는 아는 게 없을 정도니 말 다 했다.

어쩌면 그들 사이에서 배척 당한 것일 수도 있었다.


'오물이 묻은 사람은 사람도 아니라는 걸까.'


로이벤은 고개를 숙였다.

천장에 쥐가 사는지 우당탕하며 울렸다.

벽에는 집벌레가 수많은 다리를 자랑하며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었다.

바닥에는 갈라진 벽 틈 사이로 분 바람에 커다란 먼지가 회전초처럼 굴러다녔다.

진정한 집의 주인이 누구인지 일깨워주려는 것일까.

그들은 쉬지도 않고 부지런히 움직여댔다.

요란스러우면서도 우울한 광경이다.

이 이상 있어 봤자 얻을 게 없었기에 그는 자리에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단지 30분 정도 집 안에 있었을 뿐인데 벌써 화창한 햇살이 그리웠던 모양이다.

로이벤은 기지개를 한껏 켜고는 이내 걸음을 옮겼다.

삼 개월 동안 몇 번이고 들락날락해서 그런지 길을 잃기 쉬운 골목길임에도 그의 걸음걸이에는 막힘이 없었다.

이윽고 걸음을 멈춘 로이벤.

오르막길을 여러 번 오른 끝에 어느새 성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가을의 시원한 바람이 불지 않았더라면 땀으로 범벅이 되었을 것이다.

숨을 고른 로이벤은 경비병들의 가벼운 인사, 그리고 주변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의 환영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



"평소보다 좀 늦게 왔네요?"


아가씨 소리를 듣기엔 조금 나이가 있는 여자가 로이벤을 보고 아는 체했다.

로이벤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사서는 밝은 얼굴로 다가와 입구를 막고 있는 사슬을 풀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로이벤은 아직도 들어갈 때마다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도서관에 사슬이 웬 말인가. 왠지 범죄 소굴에 들어가는 것 같았다.

물론 처음부터 사슬이 있던 건 아니었다.

이전에 어느 신앙심 깊은 사제가 성서와 관련된 자료를 본답시고 무단으로 책을 훔친 적이 있었다.

이와 같은 일이 또 일어날까 싶었지만, 같은 사람이 같은 수법으로 같은 책을 연달아 저지른 뒤로 이와 같은 문지기가 생기고 말았다.

그 신앙심 깊은 사제가 바로 현재의 성소원장이 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날씨가 좋아 산책을 좀 하고 왔습니다."

"하늘이 유독 푸르죠? 오늘 같은 날은 나가서 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사서는 창문을 보며 말했다.

도서관 내부는 낮인 걸 감안해도 굉장히 밝았다.

직사각형 모양을 한 거대한 창문 여러 개가 벽을 장식하고 있는 덕분일까.

달빛만 충분하다면 밤에도 무리 없이 책을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덕분에 청량한 바람이 내부로 솔솔 불어와 가을 향취의 일부분을 맡을 수 있었다.


"그래도 맡은 일은 해야겠죠. 청소할 시간인데 괜찮을까요?"

"아, 잠시 나가 있죠."

"어머. 그게 아닌데. 청소해도 책 읽는 데에 방해 안 되죠?"


로이벤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서는 빙긋 웃고는 먼지떨이를 들어 책장을 탈탈 털었다.

내부가 먼지로 가득 찰 것 같지만 끊임없이 잔잔한 바람이 불고 있어 그런 일은 없었다.

탈탈탈.

먼지 터는 소리가 아즈라이 들려오는 오후.

일정한 박자로 이어지니 로이벤은 도리어 마음이 편안해진 듯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익숙한 책장에서 책 여러 권을 뽑은 그는 평소 앉았던 자리로 갔다.

하나같이 전설과 설화, 혹은 우화와 관련된 책이다.

어린아이에게 읽어주어도 전혀 무리가 없을 법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로이벤은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처럼 진지한 얼굴로 글자를 읽어내려갔다.

한참을 읽고 있던 그는 책상에 내려앉은 햇살이 옆으로 조금 이동한 걸 발견했다.

그리 많은 시간이 흘러가진 않은 듯했다.

책에서 눈을 뗀 그는 눈두덩을 비볐다.

얼마 읽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집중력이 흐트러진 건가.

내용이 재미가 있고 없고는 문제가 아니었다. 재미를 위해서 읽는 게 아니라 정보를 얻으려고 한 거였으니까.

하지만 로이벤은 아무리 책을 읽어보아도 라이칸스로프에 관한 정보는 딱 두 가지 밖에 알아낼 수 없었다.

보름달이 되면 나타난다는 것과 그 어떤 맹수보다도 잔혹하다는 것.

심지어 이것도 저자마다 생각이 다른지 조금씩 내용이 변형되어 있었다.

이로써 동화나 우화에도 때론 무시할 수 없는 진실을 품고 있다는 주장이 힘을 잃게 되었다.

마치 과육 안에 숨어 있는 씨앗처럼 언젠가는 찾아낼 거라 생각했건만.

이래서야 씨앗을 찾기도 전에 배가 불러서 과일을 던져버릴지도 몰랐다.

로이벤은 탈력감에 젖은 얼굴로 창가를 바라보았다.

축제 때 벌어졌던 기이한 일은, 그 이후로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피가 강물로 젖어들어 사람들을 불안에 빠지게 만드는 일도 없었고 흉측한 모습으로 죽어 흘러가는 사체도 없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올바른 일이겠지.

그러나 로이벤 개인으로서는 맥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가나마가 그랬던가. 엉뚱한 일에 힘 빼지 말라고. 그 녀석도 드물게 맞는 말을 하는군.'


손깍지를 끼고서 뒤통수에 갖다 댄다.

높다랗게 자라난 창문을 통해 바깥 풍경을 보니 한 폭의 초상화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창문은 투명한 빛깔만을 띠고 있지 않았다.

투명한 유리에는 각양각색의 꽃잎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왠지 무한한 창공을 꿈꾸며 날아오르다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주저앉은 모양새 같았다.

결과적으로 창문은 알록달록한 색에 물들어 아름다운 모습이 되었지만.

꽃잎들은 또 다른 바람이 불지 않고선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혼자 힘으로 날아오를 수 있는 놈은 없나 본데.'


그런 시시한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

달그락. 상념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

옆을 보니 사서가 책상에 반쯤 걸터앉아 차를 호록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로이벤 곁에도 차를 내려놓았다. 홍차의 진한 향이 나고 있었다.


"혹시 괴물 학자라도 되시나요?"

"예?"


뜬금없는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로이벤.

사서는 눈짓으로 책을 가리켰다.


"[대륙의 괴물들], [역사 속에 숨겨진 전설], [그림자를 삼키는 괴물], [유령과 늑대 인간, 그리고 반인반마]. 책 제목만 봐도 몸이 으스스 떨리는데요. 괴물을 좋아하시나 봐요."


로이벤은 고개를 흔들었다.


"궁금한 게 있어서 잠시 보는 것뿐입니다."

"괴물 사냥꾼이 되려는 건 아니죠?"


아니라고 부정하려던 그는 딱히 틀렸다고 보기에도 힘들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하자니 어감이 이상했다.

로이벤은 대신 상대를 단념케하면서도, 그렇다고 기분 나쁘게 하지 않을 적절한 말을 내뱉었다.


"비밀입니다."

"어머."


손으로 입을 가린 그녀는 이내 눈웃음을 보였다.


"조금만이라도 알려주면 안 되나요?"

"그러면 비밀이란 놈이 토라질 겁니다. 비밀이 아니게 된다면서."

"성격이 까칠한가 보죠?"

"달래기 힘든 녀석이라 고생을 좀 합니다."


두 사람은 잠시 눈을 맞췄다.

맑고 투명한 눈과 깊고 잔잔한 눈이 교차되었다.

사서가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환한 햇살도 질투할 만큼 해맑게 웃던 그녀는 찻잔을 로이벤 쪽으로 슬쩍 밀었다.

로이벤은 목례를 하고는 차를 마셨다.

설탕을 넣었는지 쓴맛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로이벤이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맛이었다.


"아쉽긴 한데. 어쩔 수 없죠."


그리고 사서는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로이벤은 적절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상대방이 원하는 대답을 적재적소에 뿌려주기만 하면 흐름이 끊기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안면을 튼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가깝다고도 멀다고도 볼 수 없는 애매한 사이였기에 대화는 금방 끝이 나고 말았다.

어색한 공기.

로이벤은 저 영양가 없는 책을 다시 읽고 싶어졌다.

하지만 사서가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딱히 시선을 둘 곳이 없자 두 사람은 동시에 바깥을 바라보았다.


"삼층 끝방 있죠."


로이벤이 고개를 돌렸다. 사서는 다 마신 잔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있었다.


"그, 왜. 늑대 괴물 가죽이 걸린 방 있잖아요."

"예."

"직접 본 적이 있나요?"

"비밀로 해주겠습니까?"

"비밀인가요? 전해 듣기로는 다들 몰래 한 번씩은 봤다고 하던데."

"그중에 저도 포함되겠군요. 예, 봤습니다."

"그렇군요. 사실 저는 안 봤어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못 보겠더라고요."

"영주의 명령을 어기지 않는, 양심 있는 분이로군요. 달레린 같은 분이 조사대원이 되어야 할 텐데 말이죠."

"들어가면 로이벤 씨 직속 부하가 될 수 있는 건가요?"

"조사대원끼리는 상하 관계가 없습니다. 임시로 장이 생기기는 합니다만. 뭐, 어쨌든 전 좋은 선배는 아니라서요."

"괜찮아요. 전 배우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좋은 후배거든요.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 있죠."

"이상적인 관계군요."


다시 흘러가는 웃음.

로이벤은 홀짝 홍차를 마시더니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라이칸스로프가 어떻게 생겼는지 딱히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군요. 지금까지 안 본 걸 보면."

"아뇨. 궁금해요. 많이 궁금한데.."


달레린은 말을 흐렸다.

머릿속에 맴도는 말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감이 잘 안 잡히는 듯 입을 몇 번 오물거렸다.


"이상하게도 말이죠,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생뚱맞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어디서 많이 맡아본 냄새 때문에 들어가기가 겁이 나더라고요."

"냄새?"

"꽃 냄새요. 정확히 어떤 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어요."


그리고 달레린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누가 그 꽃을 참 좋아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달레린?"


로이벤은 문득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달레린은 어디 홀린 사람처럼 넋을 잃고 있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는 일이 없는 로이벤도 지금은 조금 놀랐다.

가끔 생각이 지나친 나머지, 혼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취하곤 하는 게 그녀의 습관이었다.

친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습관이었지만 로이벤이 이를 알리는 만무했다.

저러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 찰나.

갑자기 달레린이 몸을 일으키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손님이 왔나 보네요. 뭔가 좀 시끌시끌한데요?"


따라서 일어난 로이벤은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평상시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성으로 들어오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




에리티는 온몸이 쑤시고 비틀리는 아픔에도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요 며칠간 땅 위에 있는 시간보다 말에 탄 시간이 훨씬 많아 몸은 한계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칭얼거리기도 싫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뒤에 있는 기사는 자신보다 훨씬 피곤하고 아플 게 분명하므로.


"애드슈네. 무리할 필요 없어.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먼저 여인숙에 가서 쉬고 있어."

"전 괜찮습니다, 도련님."


말만 그렇게 했을 뿐 기사는 눈에 띄게 지쳐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부상을 온전히 회복하기도 전이다.

그런 상태에서 말을 타고 다녔으니 고통과 피로감은 에리티의 그것보다 훨씬 심했다.

미안했다.

자신이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꼬리별 지방에까지 오게 되었으니.

어쩌면 백작이 보낸 병사들만으로도 해결될 일일지도 몰랐다.

경비대장의 말에 의하면 실력 좋은 사람들로 구성했다고 하니 그 말은 틀림없는 진실일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돌아간다면-.


'여기까지 왔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에리티. 어차피 이제 여기 말고는 갈 데도 없어. 이제 돌아갈 일만 남았다고.'


에리티는 고개를 저었다.

지원을 받든 받지 않든 어차피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시도라도 해보는 게 좋지 않겠는가.

에리티는 저도 모르게 턱을 쓸었다.

까끌까끌한 털이 아닌 솜처럼 보드라운 털이었다.

아직 어른이 되기엔 모자라다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더 이상 순수한 아이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일종의 징표와 같기도 했다.

왠지 성장했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감이 느껴졌다.

복잡한 심회에 젖어 있던 에리티.

그때 소년의 작은 어깨에 애드슈네가 손을 올렸다.


"꼬리별의 영주가 들어오려는 모양입니다."


에리티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순히 상대보다 작위가 낮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설령 에리티의 작위가 공작이라 해도 성의 주인이 들어오는 이상 일단 기본적인 예는 취해야 하는 것이 관례였다.

멋들어진 무늬가 새겨진 문이 좌우로 열렸다. 공손한 자세로 문을 연 두 명의 하인을 뒤로하고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부드러운 발자국 소리를 내며 들어온 이는 꼬리별 도시의 영주, 게티아르 가딩 남작이었다.

소년은 잠시 찾아온 목적을 까먹었다.

게티아르 가딩 남작은 걸음걸이며 표정이며 손짓이며 하나같이 기품이 느껴지는 몸짓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놀라운 건 입고 있는 옷이었다.

게티아르 남작은 거추장스러운 장신구는 거의 배제하고 꼭 필요한 옷만 입고 있었다.

지금까지 만난 귀족들은 진열품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정도로 몸에 온갖 장신구를 치렁치렁 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게티아르가 지척까지 다가와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에리티.

만약 애드슈네가 정신을 일깨워주지 않았다면 언제까지고 바라만 봤을 것이다.


"도련님."


에리티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게티아르는 깊이 있는 눈동자로 그런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침착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금 떠올린 에리티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전 맨듀던 세오르 준남작의 차남, 에리티 세오르라 합니다. 이쪽은 저를 수호하기 위해 따라온 애드슈네 기지 경입니다."


기사, 애드슈네는 가슴에 주먹을 올리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처음 자기소개를 했을 때와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이었다.

적어도 말을 더듬지도, 이름을 바꿔 부르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직 말하지 않은 내용이 있었다. 어쩌면 자기소개보다도 그게 제일 중요했다.

게티아르는 애드슈네를 눈빛으로 인사를 건넨 뒤 다시 에리티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찾아온 정적. 에리티는 순간 당황하여 혼란에 빠졌다.


'이제 바로 앉으면 되나? 아니, 성 주인이 먼저 앉으라고 권해야 앉을 수 있는 거잖아. 혹시 내가 말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나? 그게 뭐지? 빨리 생각해!'


"실례가 아니라면 어느 곳에서 왔는지도 알려줄 수 있겠소?"


그때 게티아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제야 에리티는 뭘 말하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에리티는 새빨간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푸실 지방의 아라가 마을에서 왔습니다. "


게티아르는 아라가 마을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아마 변방에 위치한 작은 마을 일 듯싶었다.

그러나 푸실 지방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도래솔 숲을 중심으로 했을 때 서쪽에 위치해 있는 곳이었다.

사실상 꼬리별 지방 바로 옆이라 해도 무방한 곳이었다.

그러나 지도상에서만 그렇지, 실제 거리는 멀었다.

푸실 지방만 하더라도 여기서 말을 타고 쉼 없이 이동해도 최소 사흘은 걸리는 거리였다.

그런데 아라가 마을이라니.

게티아르는 어째서 이들이 그런 먼 거리를 감수하면서까지 이곳에 왔는지 궁금했다.

어쨌든 손님들을 언제까지고 세워둘 수는 없었다.


"편히 앉으시오. 먼 거리를 여행하느라 피곤할 텐데."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자리에 앉은 에리티는 벌써부터 진이 빠졌다.

마음 같아서는 할 말 후딱 하고 아무 여인숙이나 골라잡아 몸을 뉘고 싶었다.

하지만 본론으로 들어가려면 시시콜콜한 잡담이 선행되어야 했다.

허례허식을 좋아하는 자들의 말을 인용하면, 자고로 진실한 얘기를 하려면 마음을 먼저 나누어야 하는 법이었다.


"원한다면 곧바로 방으로 안내해 쉬게 해주겠소. 그러나 내 느끼기에, 무언가 다급한 일을 갖고 있어 보이는구려. 그렇기에 그 먼 거리까지 달려온 거 아니겠소?"

"예?"


에리티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곧바로 본론으로 간 것도 모자라 방까지 내준다고?


'이 분은 뭔가 다르다.'


생각해 보니 상대는 에리티에게 존중을 표하고 있었다.

이름도 듣지 못한 변방의 작은 마을을 다스리는 귀족의 아들임에도 성심성의껏 대해주고 있는 것이다.

에리티의 마음속에 묘한 기대감이 샘솟기 시작했다.

단지 대화를 얼마 나누지 않은 낯선 사람인데도 깊은 신뢰감을 느꼈다.

에리티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품고서 뒤에 서 있는 애드슈네를 쳐다보았다.

소년의 충직한 기사는 반짝이는 눈빛을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에리티는 무릎에 주먹을 올린 뒤 말했다.


"그렇다면 실례를 무릅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게티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를 타온 호는 두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조용히 잔을 내려놓고 물러났다.

에리티는 말하려다 일단 목을 축이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그동안 물도 거의 안 마시고 이동했었다.

뜨거운 차를 벌컥벌컥 마신 에리티는 타들어가는 속을 달래는 대신 얼른 입을 열었다.


"약 삼 주 전에 보름달이 뜨던 날, 저희 마을에 라이칸스로프가 쳐들어왔었습니다."


게티아르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상체를 살짝 앞으로 굽혔다.


"자세히 얘기해 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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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삼 개월 후 (3) 22.09.26 64 4 19쪽
48 삼 개월 후 (2) 22.09.25 66 4 24쪽
47 삼 개월 후 (1) 22.09.24 53 3 18쪽
46 변화 (3) 22.09.17 57 4 17쪽
45 변화 (2) 22.09.16 61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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