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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미달 님의 서재입니다.

라이칸슬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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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다미달
작품등록일 :
2022.08.01 22:22
최근연재일 :
2023.03.28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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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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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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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24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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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삼 개월 후 (1)

DUMMY

과거의 기억은 하늘에 떠 있는 무지개와 같다.

잡으려 손을 뻗어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고, 닿으려 열심히 치달려도 절대 가까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그 일을 떠올리려고 할 때면 항상 단편적인 장면과 소음밖에 떠올리지 못한다.

기사의 품에 안겨 있는 나.

겨드랑이 사이로 얼핏 보이는 풍경 속에, 주변 사람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치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눈동자에 얼비친다.

혹시 전쟁이라도 난 걸까.

괜스레 무서워진 나는 형이 곁에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형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당황했다. 혹시 아버지의 곁에 서 있는 것일까. 귀족의 장남이기에 그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형은 활동적인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형은 화지 위에서 춤추며 노니는 붓질의 자유로움을 좋아했다.

짙푸른 들판이 펼쳐진 배경 삼아 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형.

그런 형의 옆에는 언제나 붓과 물감, 그리고 아까시나무 꽃이 놓여 있었다.

왜 그런가 물어보면 그냥, 이라는 답만 돌아왔다. 싱거운 대답이었지만 나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런 형이, 섬세하고 풍부한 감정을 지닌 형이 중무장한 아버지의 뒤를 따라 무자비한 전쟁을 간다는 건 상상으로도 하기 힘든 일이었다.


..크아아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울음소리. 뒷목이 쭈뼛 솟을 정도로 소름끼치는 그 소리는, 아버지가 있는 곳에서 들려왔다.

나는 아버지에게 돌아오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이 꽉 막힌 듯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걱정 마십시오, 도련님. 제가 안전하게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긴장감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말한 기사는 수풀에 얼굴이 긁혀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 상처를 닦아주었다. 기사는 짧게 웃었다.

날 진정시키려고 한 건지, 아니면 단지 고맙다는 의사를 표시하려고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기사는 자신이 뱉은 말을 지켰다. 나를 성에 데려다 준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되돌아갔다. 아마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가려는 모양이다.

나는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방에 돌아왔다. 진작 깊은 잠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

그럼에도 나는 한 잠도 자지 못했다.

악몽과도 같은 밤이 지나고. 아버지는 해가 떠올라서야 돌아오셨다.

아버지 뒤에는 병사들이 흉측하고 거대한 괴물을 짊어지고 있었다.

수군대는 사람들. 그러나 나는 괴물보다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금방이라도 깨져 산산조각이 날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아버지에게서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지만, 나는 막대한 슬픔을 느꼈다.

그래서 홀로 정원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아버지를 보았을 때도 당황하지 않았다.

피 묻은 다미달을 손에 쥔 채, 그리고 그걸 닦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망연자실한 얼굴을 짓고 있는 아버지.


-아빠. 형은요?


마냥 기다릴 수 없어 어렵사리 뱉은 질문. 대답이 없길래 한 번 더 물어봤지만 아버지는 묵묵부답이었다.

마치 나를 없는 사람처럼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긴 침묵을 뚫고 말했다.


-형은 오지 않는다.

-왜요?

-형은 떠났다.

-어디로요?

-말해줄 수 없어. 비밀이니까.

-그럼 언제 오나요?

-게티아르.


아버지가 다미달을 떨궜다. 뗑그렁, 하며 바닥을 두드린 다미달의 칼날에는 검붉은 무늬가 어지러이 새겨져 있었다.


-네 형은 이제 없다. 잊어라.


그 이후로 아버지는 절대 형과 관련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실수로라도 내뱉지 않으려고 했고 만약 내가 형 얘기를 꺼내려고 하면 크게 야단쳤다.

그렇게 나는 형을 점점 잊어갔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떠올릴 시간이 없었다.

아버지가 틈만 나면 검술 연마를 시켰기에. 몸에 땀이 흐르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힘들고 가혹한 시간이었다.


-언젠가 너도 이 검을 쓸 때가 올 거다. 그 날이 올 때까지, 그리고 그 날이 온다 해도 절대 훈련을 게을리 해선 안 된다.


다미달. 아버지가 남기신 검.

아버지의 말씀처럼 이 검에 걸맞는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하루도 허투루 보낼 수 없었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아침 일찍 일어나 검을 휘두룬다.

언젠가 이 검을 사용할 날을 기대하며, 아버지를 낙담케 만든 괴물을 영원히 추방하는 날이 오길 고대하며.



*



아간은 꿈의 잔재를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현실이 현실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은 탓에 잠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천장 나뭇결에는 층층이 쌓인 먼지가 때처럼 박혀 있었다. 그 무늬를 눈으로 좇아가던 아간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문틈 사이로 비치는 빛이 바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빛은 눈을 깜빡이는 것처럼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옆으로 눈길을 돌린 아간은, 잠자리가 비어있음을 발견했다.

또 일하러 나간 건가. 몸을 혹사시키는 짓은 하지 말라고 그리 말했는데.

역시 무두질 만큼은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사내였다.


"활기찬 하루야, 아간."


밖으로 나오니 상쾌한 목소리가 말을 걸었다.

땀이 뻘뻘 흐르는 몸을 하고 있으면서 얼굴은 해맑기 그지없었다.

쨍쨍한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도 저런 표정은 지을 수 없을 것이다.

아간은 라이트가 가죽을 짊어지고 있는 걸 보았다.


"또 가죽 나르고 있습니까?"


밖에 설치되어 있는 틀에 널따란 가죽이 여러 개 널려 있었다.

멀쩡한 사람 혼자 나르기도 힘든 판에, 다리를 절뚝거리는 사람이 잘도 옮기고 있었다. 무엇보다 라이트는 외팔이었다.

단순히 정신력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별로 무겁지도 않았어. 나 힘 센 거 알잖아."


아간은 나오려는 한숨을 꾹 참아내고 말했다.


"예. 잘 아니까 문제지요. 굳이 들 필요도 없는 가죽을 드니까 말입니다."

"들 필요가 없다니. 저 송아지 가죽은 벌써 사흘이나 담궈져 있었어. 그러니 오늘 아침에 꺼냈어야 했지."

"조금 늦게 꺼낸다고 품질이 안 좋아지진 않는걸요."

"어라. 이제 좀 일이 손에 익었다는 거야? 많이 컸네."


라이트가 개구쟁이 같은 얼굴을 지었다. 아간은 웃음을 흘리더니 손을 내밀었다.


"제가 들죠. 가서 쉬어요."

"오늘은 주말이야. 일하는 날이 아니라고."


아간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자 라이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난 일하는 게 아냐. 노는 거야."


무두질을 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아간은 억지로 가죽을 뺏고는 틀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항의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유달리 깨끗이 보이는 푸른 하늘. 희게 피어오른 구름은 짐승이 털갈이를 한 것처럼 보드라워보였다.

가을이라 그런지 사방에는 고소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누렇게 익은 밀이 바람에 한 번 스칠 때마다 향기로운 내음이 더해졌다.

덕분에 도시 안팎은 같은 향기가 나고 있었다. 무두질 작업장만은 예외였지만.


요란과 소란으로 얼룩진 축제가 끝난지도 벌써 삼 개월이나 흘렀다.

크고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벌써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어젯밤에 꾼 꿈처럼 희미한 기억만 떠올렸다.

강이 피로 물든 일처럼 강렬한 사건만이 술자리에서 회자될 뿐이었다.


"아간. 가죽은 됐으니 이제 가봐. 디아프 기다리겠어."


라이트가 의자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다리가 욱신거려서 잠시 쉬어야 했다.

허리 전체를 검게 물들었던 멍은 많이 옅어졌지만 통증은 여전했다. 어쩌면 평생 안고 가야 할 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이트는 기뻐했다. 이제 진통제를 먹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진통제는 진통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것 말고는 도저히 장점이 없었다. 불면증이 생기는 건 물론이고 돌던 입맛도 뚝 떨어뜨렸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아픔을 감수하는 게 훨씬 나았다.


집에 들어갔다 나온 아간. 그의 손에는 주머니가 들려 있었는데 안에 뭐가 들었는지 빵빵하게 부풀어올라 있었다.


"이 정도면 되겠죠?"

"어디 가게 차렸어?"


라이트는 입을 보이며 웃었다. 아간도 같이 웃으며 주머니 안을 확인했다.

모두 상태가 좋았다. 그동안 틈이 날 때마다 마른 천으로 닦길 잘했다.

고개를 주억거린 아간은 주머니를 품안에 안았다.


"갔다 올게요. 저 없다고 작업장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럴게. 아, 맞다. 아간."


라이트가 아간을 불러세웠다.


"로미어가 돌아왔는지 확인해보고 와줘. 만약 있으면 같이 왔으면 해."


즐거웠던 감정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아간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말을 삼켰다.


"알아. 저번에 갔는데 집에 아무도 없다고 했었지. 하지만 잠시 자리를 비웠을 수도 있잖아. 운 안 좋게 길이 엇갈렸다거나. 그러니 이번에는 만날 수도 있을 거야."


아뇨. 그럴 일은 앞으로 없을 겁니다.

혀로 입술을 축인 아간은 가까스로 말했다.


"라이트 씨. 하지만 두 달이나 찾아갔는데 없다는 건 결국 떠났다는 뜻 아닐까요."

"글쎄. 로미어가 어딜 갈 성격은 아니거든. 자기 집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자야. 자기 직업도 나쁘게 생각하지도 않고."

"사람 마음은 오직 신 밖에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그 사람은 누구에게도 밝힐 수 없는 고민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아니야. 그랬다면..나에게 말도 없이 떠났을 리가 없어. 시시콜콜한 얘기라도 꼭 나한테 말을 하는 성격이었으니까."


라이트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간은, 되도록 이러고 싶지 않았지만, 다소 짜증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에요. 정 걱정되면 직접 가서 확인하면 되잖습니까?"


라이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간은 바로 후회했지만 딱히 말을 더 나누고 싶지 않았다.

아간은 주머니를 들고 망설임 없이 자리를 떴다.



*



"선물 아저씨다!"


보육원 아이들이 아간을 보자마자 외친 말이었다.

쪼르르 아간에게로 달려간 아이들은 먹이를 구걸하는 새끼 새처럼 조막만한 손을 뻗어왔다.


"차례로! 밀거나 하면 다치니까!"


하리가 큰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소란을 벌이던 아이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줄지어 섰다.

아간은 큼지막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주었다.

나무로 깎아만든 말, 반질반질한 공깃돌, 동물 소리가 나는 호루라기 등등.

다양한 장난감을 나눠 가진 아이들은 공터를 뛰다니며 놀았다. 마지막으로 디아프와 타샤가 다가왔다.

아간은 미리 숨겨놓았던 장난감을 꺼내 건네주었다.


디아프가 손에 들려 있는 장난감을 들어보이더니 불쑥 말했다.


"이거."


아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이라고 하는 거야. 공."

"공."

"그렇지."


마주 보던 디아프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공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그렇게 갖고 노는 거 아냐. 자, 봐봐."


곁에 있던 타샤가 발로 공을 툭툭 건드리자 디아프도 바로 따라했다. 어느새 두 아이는 서로 주고받으며 놀게 되었다.

이를 발견한 다른 아이들도 끼어들더니 어느새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싸우면 안 돼. 서로 잘 주고 받아야지!"


그러나 하리의 걱정 어린 목소리는 아이들의 함성에 금방 묻혀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을 다루는데 일가견이 있는 그녀도 딱히 손쓸 방법이 없었다.

하리는 아이들이 크게 다치지만 않기를 바랐다.


"정말 기적이네요."

"예? 아, 예."


디아프가 노는 모습을 넋놓고 보고 있던 그는 꿈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하리가 곁에 다가와 있었다.

하리는 작게 웃은 뒤 말했다.


"디아프가 말을 하다니..아니, 말도 하고 저렇게 노는 모습도 보일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그러게 말입니다."

"약을 먹어서 그런 걸까요. 대체 그 약은 어디서 구해온 거죠? 의원은 누군가요?"

"사실 저도 몇 다리 건너서 받은 거라 잘 모릅니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얘기만 들었거든요."

"예. 정말 뛰어난 의원이네요. 설마 마음이 아픈 아이마저 낫게 하다니."


과연 솔직히 말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간은 궁금했지만 참기로 했다.

하리가 그런 성격은 아니지만, 최악의 경우 아간과 디아프를 쫓아낼 수도 있었다.

어쩌면 낙인이 찍혀 영영 도시 밖으로 추방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아간과 디아프는 죽을 때까지 떠돌이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

좀 지나친 생각이었지만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일도 아니었다. 아간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말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예?"


아간은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독심술이라도 배운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하리는 마음을 읽어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성소원 말이에요. 어쩌면 나이가 차도 계속 지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디아프가 이처럼 날이 갈수록 말이 트인다면, 그리고 글 공부도 배운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아..그렇습니까?"

"네. 디아프가 이곳을 진정 좋아하고 신의 길을 따르길 원한다면."


하리가 아간을 바라보았다.


"아빠 입장에서는 어떻게 생각해요? 아들이 여기 계속 있겠다고 하면요."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디아프가 그러고 싶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겠죠."

"같이 살고픈 마음은 없는 건가요?"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겁니다. 그래도 디아프가 안전해야 마음이 놓이니까요."

"안전하다?"


하리가 의문을 표했다. 아간은 낭패감이 깃든 얼굴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렸다.

어떻게 해명해야 할까. 머릿속에 갖가지 말들이 떠오르고 사라졌다.

그러나 그럴 듯한 말을 꾸며내기 전에 하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리는 순순히 수긍했다.


"하긴 그렇겠죠. 강물이 피로 물드는 사건을 보고도 위험하지 않다고 말하는 건 이치에 안 맞을 거예요."

"예..그렇죠. 게다가 제가 사는 곳이 강과 인접해있는 곳이라 여러모로 신경이 쓰이죠."


하리가 자뭇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참. 왜 제가 그걸 이제야 알았을까요. 지금 물어 미안해요. 아무 일 없었죠?"

"예. 다행히 이상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 뒤로 계속 깨끗하고요."

"다행이네요. 그렇지만 아간 씨는 강하니까 디아프를 안전히 지킬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유명한 달빛 손톱이잖아요?"


아간은 나오려는 한숨을 꾹 참고 애써 웃었다.

꼬리별 도시 최고의 유명 인사로 만들어주겠다던 그레로의 계획은 정말 현실로 이루어졌다.

아간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달빛 손톱을 못 들어본 사람은 드물었다.

그만큼 싸움판에서 벌어졌던 일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만약 축제가 마지막 날까지 무사히 이루어졌다면 달빛 손톱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을 거라는 게 중론이다.

물론 끝까지 싸웠다면 검은 갈퀴가 이겼을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만만찮게 많았지만.


"그래도 싸움판에는 되도록 나가지 않았으면 해요. 디아프도 원하지 않을 거예요."

"이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저도 원하지 않는 일이니."


함성이 들렸다. 아이들 중 절반이 서로 얼싸안아 웃고 있었다. 나머지 아이들은 아쉬움과 실망감을 여실히 내비치고 있었다.

무슨 놀이를 한 건지 모르지만 어쨌든 승부를 겨루고 있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디아프는 이긴 쪽에 속해 있었다. 덤덤한 얼굴을 짓고 있는 걸 보니 왜 이겼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아간은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어보이고는 물었다.


"수녀님. 괜찮다면 디아프와 타샤를 데리고 길거리에 잠시 나갔다와도 될까요?

"상관은 없지만 일찍 와야 해요. 오늘은 특별히 마시에 사제님이 오셔서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시기로 했거든요."


그리고 하리는 '재밌다는 건 철저히 사제님 표현이에요.' 라고 말을 낮춰 덧붙였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아이들이 일찍 꿈나라로 갈 것 같았다.

아간은 옅게 웃었다.


"그럼 갔다 오죠."

"좋은 시간 보내요."


하리가 작게 손을 흔들었다.

아간이 성소원 입구에 서 있자, 곧 두 아이가 밖으로 나왔다. 어찌나 신나게 놀고 왔던지 온몸에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 쓰고 있었다.

타샤는 여자 아이임에도 활동적인 걸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남자 아이들 사이에 둘러쌓여도 기 죽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성격을 생각하면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아간은 흐뭇한 얼굴로 두 아이를 번갈아보았다. 그리고 손을 맞잡고서 다양한 볼거리가 있는 길거리를 거닐었다.



*



밤의 목적이 사람들을 재우는 것이라면 부분적으로는 실패한 듯하다.

잠에 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이 어느 한 건물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은 술집이었다. 어두운 밤에 대항하듯, 술집으로부터 주홍색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간은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종소리가 울리긴 했지만 쳐다보는 이는 거의 없었다. 종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소음이 컸다.

아간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싸움판에 올라선 이후로 얼굴도 모르는 자가 대뜸 친한 척 다가와 말을 거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다른 도시에서 싸움판이 벌어졌다 하면 참여할 생각이 있느냐, 돈 많이 걸 테니 꼭 참여해달라는 말을 꼭 하곤 했다.

그 때문에 아간은 한동안 술집은커녕 도시에 들어가는 것도 어려워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긴 흘렀는지 예전보다는 부담스럽게 구는 경우가 많이 사라졌다.

조심히 주변들 둘러보던 아간은 곧 어떤 사람이 손을 흔들고 있는 걸 발견했다.

둥근 식탁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라이트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어요?"


그레로가 피부가 탄 얼굴을 자랑하듯 내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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