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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박스 님의 서재입니다.

용사는 독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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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박스
작품등록일 :
2020.02.08 15:46
최근연재일 :
2020.02.26 09:00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21,508
추천수 :
671
글자수 :
151,751

작성
20.02.08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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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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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글자
8쪽

프롤로그 : 예정된 종막

DUMMY

<1>

한 세상에서 지새우는 마지막 밤. 용사는 늘 이 마지막 밤의 공기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멀리 내성 밖으로, 굶주린 어린아이가 운다. 성벽 위에 올라있는 첨병마저 진탕 술에 취해있다. 그러나 싸우기도 전에 패배해버린 이 도시의 공기는 그것조차 알면서도 외면하게 한다.


“이제 다 끝났어.”


그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검을 닦고 있는 용사에게 몽롱한 눈동자의 여인이 다가와 안긴다. 용사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인은 체념 섞인 눈동자로 그의 등을 쓸어간다.


“그래. 당신은 늘 이런 식이었지.”

“······.”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시작부터... 끝까지. 결국 이렇게 되어버릴 것을.”


여인이 팔만 뻗어서 테이블에 올려놓은 독한 술을 잡아 대충 들이켠다. 일부가 용사의 어깨에 흘렀지만 역시 반응이 없다.


“씨발 새끼. 역시 널 믿은 우리가 잘못이었어.”


돌이켜보면, 여태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용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몇 번의 기적 같은 승리도 거머쥐었다.

그러나 대세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결국 제국은 패배했고 마왕군이 수도를 포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외성 밖 외곽지역에서는 잔존한 결사대가 등을 맞대며 무의미한 항전을 이어가고 있겠지.

그럼에도 용사는 여전히 이 모양 이 꼴이다. 이제 무슨 희망이 더 남아있다고. 결국 처음부터 그냥 고장 난 사람에 불과했던 것을.


“더 빨리 깨달았어야 했는데.”

“희망은 원래 없었어.”


문뜩 용사가 손을 멈추고 중얼거렸다.


“뭐?”

“너희들이 가졌던 희망조차 원래는 없었던 거라고.”


생각을 방해하는 묵직한 취기 때문에 잠시 미간을 좁히던 여인이 곧 깨달았다는 듯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오만하구만.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거야 뭐야.”

“······.”


비아냥거리던 여인이 이내 정신병 환자처럼 버럭 성을 내며 소리쳤다. 물론 이번에도 용사는 무미건조한 반응이었지만.


“그럼 대체 우린 무엇 때문에 싸워온 건데! 어차피 질 싸움이었다고? 그럼 대체 우리가 했던 고생들은 다 뭐였던 거냐고!”

“그럼 그냥 포기했어야 하나?”

“뭐?”

“때로는 알아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는 거야.”

“닥쳐!”


결국 여인이 타오르는 홍염과 함께 테이블을 내리쳤다.

두꺼운 원탁이 산산조각이 나서 흩날린다.


“그 입 닥쳐. 제발.”

“······.”

“야. 너한테 우리는 대체 뭐였냐?”


끝내 울분 섞인 눈물이 여인의 눈가를 적신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적어도 우리한테는 알려줬어야지. 벌써 30년이야. 니 새끼랑 알고 지낸 지가 벌써 30년이라고. 그런데 뭐? 결국 이 지경 이 꼴로 몰락해놓고 원래부터 불가능한 싸움이었다고? 그걸 말이라고 해? 뚫린 입이라고 막말하지 마!”

“······.”

“증오스럽다. 끝까지 한결같은 니 새끼도. 한때나마 그런 널 사랑했던 내 자신조차도. 다 지긋지긋해. 정말.”


여인이 새로운 술병을 집어 들어 벌컥벌컥 들이켜기 시작했다. 동시에 한쪽에서 그냥 술이나 마시던 중년의 기사가 몸을 일으켰다. 모든 소란을 다 들었음에도 애증이 고갈되어버린 표정으로.


“나는 먼저 일어나지. 내일 보세.”


제 발로, 혹은 죽어서 하나둘 주인을 잃어버린 휑한 연회장에서 용사는 다시 기름진 헝겊을 집어 들었다.

텅 빈 연회장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본다. 과연 말해주었다고 한들 지금과 무엇이 달라졌을까 하고.

다음 생에서는 답을 알아낼 수 있으려나.



&



종막의 아침이 찾아왔다.

기적은 없었다.

오전 동안 외성을 지키던 제국의 마지막 정예들이 악마의 군세 앞에 하나둘 무너져 내렸고, 내성이 무너지기까지는 채 그것의 절반의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가 빛을 잃었고, 두 번째로 뛰어난 검사가 여신의 품으로 돌아갔다.

이제 남은 것은 용사뿐이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적이었고, 아무리 팔을 뻗어봐도 의지할 동료는 남아 있지 않았다.


“재롱은 이제 끝난 것이냐.”

“그래.”


피투성이의 용사는 담담히 패배를 수긍했다.


“시시하구나.”


새까만 눈동자의 여인은 곧 실망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무심하게 오른손을 내리그었다. 꼭 싫증 나고 낡은 장난감을 부숴버리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악의와도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만큼은 절대 하찮지 않았다. 단면이 눈으로 보일 만큼 예리한 충격파가 몰아치며 모든 것을 찢어발긴다.

그것으로 지금도 주변에서 산발적으로 저항하던 제국의 마지막 정예들이 사람이었던 핏빛 조각들로 찢어져 무너져 내렸으며, 근처에 있던 대부분의 악마들 또한 같은 신세가 되었다.

유일하게 그 한 수를 버틸 수 있는 실력이 되었던 군세의 최정예들만이 잔혹한 한 수에서 살아남았지만, 인간과 한없이 닮은 외형의 그들은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조각조각 찢어진 사체들을 가리키며 저들끼리 낄낄대기 바쁠 뿐이었다.


“흐음.”


그나마 보통의 인간들은 믿기 힘들 정도로 강화된 용사의 육신만큼은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더는 삶을 기대할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의식이 꺼져가는 것을 느낀다. 용사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마지막 순간임을 느꼈고, 그것이 생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긴 싸움과 시시한 결말 끝에 용사의 숨이 멎었다. 이윽고 여인은 흥미가 급격히 식은 듯 발밑의 따듯한 고깃덩이를 앞길에서 걷어차 치웠다.

용사의 시신이 인형처럼 붕 날아간다.

처박힌다.

세상이 일시 정지를 하듯 멈췄다.




<2>

언제부터 이 기약 없는 싸움이 시작되었는지는 기억조차 희미하다. 첫 번째 죽음을 경험했을 때 아직 소년이었던 용사는 처절한 전생을 반복하는 동안 비로소 정신적 성숙을 이루었다.

용사가 어른이 되었을 때는 이미 세계의 명운을 건 무한히 반복되는 흐름 속에 내던져진 채였다.

그래서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청소년기의 기억은 낡은 사진 만큼이나 빛바랜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으음.”


용사는 마른세수를 하며 싸구려 여관의 딱딱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굳게 닫힌 창문 밖의 도시는 아직도 깊은 새벽에 잠겨있다. 망설임 없이 열어젖힌다. 차가운 공기.

가볍게 기지개를 켠다.


‘벌써 새벽인가.’


기계적으로 떠날 준비를 하며 간밤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이제는 정확히 언제였는지도 모호한 멸망한 세계의 편린들.

그 안에는 절실하게 사랑했던 연인도 있었고, 한평생 등을 맞대며 싸워온 소중한 동료들도 있었지만, 용사는 감정이 고갈된 메마른 웃음 한 번으로 모두 털어 보낼 뿐이었다.

그래.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새로운 세상이 열린 지도 어느덧 반세기가 지나가고 있는 것을.


‘축제가 오늘이던가?’


허리띠에 평범해 보이는 철검을 걸고 얇은 코트를 두른다. 가슴께에 용병장을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둥근 방패 모양 메달 안에 양각된 구릿빛 검 하나. 3급 용병의 상징이었다.

물론 이것이 지금의 용사가 정말 3급 용병에 불과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어느 쪽이냐면, 작은 변덕에 가까울까.


“······.”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씁쓸한 침묵으로 마저 털어낸 용사는 곧 활짝 열어두었던 창문을 닫고 돌아섰다.

일어날 시간이었다.

용사의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용사지만 독재합니다]

01. 프롤로그 : 예정된 종막 - 끝


작가의말

가끔 이런 글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는 글을 준비해보았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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