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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박스 님의 서재입니다.

용사는 독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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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박스
작품등록일 :
2020.02.08 15:46
최근연재일 :
2020.02.26 09:00
연재수 :
2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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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20.02.2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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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8장 : 소녀와 데이트와 스토커(3)

DUMMY

&




용사는 우선 모두 이거 마시고 진정하라고 텔이 한 잔씩 돌린 홍차를 홀짝이며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간단히 설명해줬다.

그러자 제나는 이렇게 말했다.


“뭐라고요? 공생관계요? 처음 듣는데요?”


말해달라고 해서 말해줬더니 이러고 있다.


“근거가 있는 건가요? 관련 보고서라든지.”

“물론. 내 경험.”

“······.”


뭐. 불신이라기보다는, 지식을 탐구하는 한 명의 마법사로서 난생 처음 듣는 괴수의 생태에 대한 호기심에 더 가까웠지만.

쉽게 말해서 이 상황은 숲 곳곳에 흩어져 매복하고 있던 유격대들의 보급선을 끊은 것과도 같았다. 포식의 핵심인 주요 미약 성분을 얻을 수 없게 된 거짓 여인은 결국 라플라이스의 자생지가 있는 새로운 지역을 찾아야 하는데, 그 자체로 생존의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듣고보니 일리가 있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군.”


알렉이라는 1급 용병은 그동안의 경험이 있어서인지 그럭저럭 납득하는 기색이었다. 물론 일말의 의심을 남겨두긴 했다. 남의 경험은 절반만 믿으라는 업계의 철칙과도 같이.


“과연. 그래서 저 망할 것들이 대낮부터 숲을 활보하고 있었던 것이구만. 이거 미안하게 되었소. 본의 아니게 남의 작업장에 숟가락 하나를 얹어 버렸구만. 원한다면 전과는 모두 양보해드리지.”


알렉은 겉모습으로 보이는 나이와 사회적 격차가 상당함에도 순순히 신사다운 모습으로 유감을 표했다.

어차피 칼같이 정산받는다고 해도 고작 십여 플로라인데... 1급인 그의 입장에서 슬슬 체면도 신경써야 하는 단계였으니까.


“괜찮습니다. 도와주신 것도 사실이니까요.”

“뭐, 그렇다면.”


알렉은 두 번 권유하지 않았다.

푼돈이지만 하룻밤 즐길 술값은 나오는 돈이었으니까.

제나가 말했다.


“그건 그렇고. 아까는 대체.”

“그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

“······.”


제나는 단호한 용사의 말에 잠시 침묵하다가.


“당신. 근데 아까부터 왜 저한테만 반말이시죠?”

“네가 먼저 그럴만한 행동을 했으니까.”

“······.”


결국 그녀는 한차례 용사를 노려본 뒤 입을 닫고 말았다.

화륵.

식어가던 홍차에 불꽃이 일며 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와. 저도 해주세요.”


그리고 벌써 화가 거의 풀린 텔이 눈을 빛내며 제나에게 컵을 내밀었다. 잠시 당황하던 제나가 손가락을 까딱하자 마찬가지로 텔의 컵에서도 따듯한 불길이 일며 김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제나 씨.”

“아, 아니에요. 뭐 이런 걸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딱딱했던 분위기가 한층 풀어지고 있었다. 여전히 조용하고 서먹하긴 했지만 아까보다는 덜 어색하게.

그러나.

슬슬 헤어질 때가 되긴 했다.


“그럼 우리는 이만 돌아가보리다.”


홍차를 다 마신 알렉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마찬가지로 힐끗거리며 용사를 관찰하던 제나도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몽블랑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그렇소. 오늘은 가볍게 몸만 풀려고 나온 거니.”


용사는 그 말에서 대충 상황을 이해했다.


“그렇군요.”


용사도 곧 손수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후까지 남은 잔당을 소탕하려면 슬슬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용사 혼자라면 몰라도 텔과 함께 움직이려면 시간이 그리 여유롭지 않았다. 그렇다고 업고 뛰어다닐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제나 일행과 갈라진 이후 충분한 시간이 지났을 때 용사는 느긋하게 숲을 걸어가다가 텔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나저나 1급 용병에 수준급 마법사 파티라니. 최근 몽블랑에 그럴만한 큰 의뢰가 있었던가요? 제 기억으로는 없었던 것 같은데.”

“아. 그게요.”


그에 텔은 직업 의무에 위배되지 않을 정도로만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해줬다. 비로소 용사도 관련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그 철부지가 쟤... 아하.”

“네.”


너무 사소해서 금방 잊어버렸던 기억이었지만 비로소 막혀있던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과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했더니 의뢰주가 저 정도의 대마법사였다면 이야기가 또 달랐으니까.


“참 나. 어디서 갑자기 저런 게 튀어나온 건지.”

“네?”

“실력이 생각보다 상당하더라고요.”


늘 말하지만 상당하다는 말은 용사 기준이라서 실로 엄청난 칭찬이었다. 실제 나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 수준만 놓고 보더라도 부정 불가능한 천재의 영역. 물론 그걸 알 길이 없는 텔은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는 기색이었지만.


“금방 다녀올테니 천천히 오고 계세요.”


얼마나 걸었을까.

용사는 산책을 하듯 텔과 함께 이런 저런 잡담을 하며 걷다가 중간 중간 잠시 튀어나가서 깔끔하게 몇몇 괴수들과 거짓 여인을 처리하고 순식간에 텔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런 식이었다.

굳이 일반인인 텔에게 괴수를 처리하는 잔혹한 장면을 보여줄 이유도 없었고, 용사의 실력에 그럴 필요도 없었다.

고기를 매일 먹고 사는 평범한 사람이라도 가축을 도축하는 장면을 대놓고 보여주면 며칠 동안 식욕이 떨어지는 것과도 같았다.

이런 일이 일상인 용병과는 경우가 달랐다. 볼 이유가 없다면 가장 좋은 것은 안 보는 것이고, 용사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으······. 징그러워요.”


아니나 다를까. 텔은 중간에 용사가 슬쩍 보여준 괴수의 분비샘이나 페로몬낭을 보더니 그렇게 말하며 팔뚝을 쓸었다.


“텔. 혹시 이거 하나에 얼마인지 아세요?”

“어... 거짓 여인의 부산물은 특수 개체를 제외하고 괴수 중에서도 단위중량당 가격이 가장 비싼 축에 속하고... 서류상으로는 그램당 10에서 30제니 정도의 시세가 형성되어 있으니까...”


또 그걸 착실하게 계산해보는 텔.


“우와. 설마 하나에 5플로라 10제니 이상인가요?”

“네. 비쌀 때는 7플로라도 받아요. 쌀 때는 3플로라도 못 받지만.”

“와... 엄청나게 비싸네요.”


고작 칼질 한 번 슥삭 하고 돌아왔는데 거의 하급 공무원 보름치 임금이 뚝 떨어진다니.

텔은 새삼 눈앞의 익숙한 용병이 다시 보였다. 왜 용병들이 평소에는 백수처럼 돌아다니는지 새삼 체감이 되었다고 할까.

물론 한편으로 쉬운 의뢰든 어려운 의뢰든 늘 나오는 사상자들이 얼마나 존재하는지, 의뢰를 하고 싶어도 비수기에는 적당한 의뢰가 없어서 일하지 못하는 용병들이 얼마나 존재하는지, 그런 것을 잘 알고있었기에 마냥 시샘하듯 노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몇 개 챙겨드릴까요?”

“아녜요. 제가 뭐 한 게 있다고요.”


텔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물론 절대 징그러워서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지 말고 있다가 좀 챙겨드릴게요. 이게 이래 보여도 가끔 지치고 피곤할 때 끓는물에 푹 삶아서 차를 달여먹으면 밤새 천국에 다녀올 수 있거든요. 겸사겸사 꿀잠을 잔 듯 피로도 싹 풀리고.”

“······.”


??


“네? 네에?”

“뭐가요?”


텔은 순간 고개를 갸웃 했다.

지금 뭔가 많이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착각인가.


“그리고 텔이 한 게 뭐가 없어요. 텔은 그럴 자격이 충분해요. 오늘 의뢰도 파티원의 자격으로 오신 거고.”

“네? 파견이 아니고요?”


이번에야말로 텔은 깜짝 놀라며 용사에게 되물었다.

여태까지 파견인줄 알았는데 파티라니.


“예? 알고 계시는 거 아니었어요?”


그럴 리가.

그러니까 알고 보니 이게 데이트는커녕 파견도 아닌 자신의 인생 첫 용병 데뷔였다니. 갑자기 확 부끄러워지는 그녀였다.

물론 능력이 안 되는 동료를 파티원으로 등록해서 출발하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생각보다 흔했다. 쉽게 말해서 능력 있는 용병들이 친구나 애인 등에게 견학을 시켜주는 경우.

텔의 얼굴이 결국 확 붉어졌다.


‘뭐야... 데이트 맞잖아.’


심지어 이 의뢰를 받아온 곳이 그녀가 근무하는 몽블랑 북부 의뢰소였으니... 벌써부터 동료들의 호기심 섞인 목소리가 귀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애인이냐. 누구냐. 그런 사이였냐. 부럽다. 등등.


‘······.’


“흐흐흐.”

“텔?”


갑자기 얼굴이 빨개지더니 음흉하게 웃는 텔에 용사가 당황하며 물었다. 어디 아픈가 하면서. 물론 전혀 그런 것이 아니었지만.


“아니에요.”

“저기. 얼굴이 빨개지셨는데요?”

“네. 정상이에요.”


텔 모리아. 20년 인생의 난생 첫 데이트였으니까.

물론 그런 것치고 낭만적인 일은 없었던 것 같았지만.

하지만 그러면 어떨까. 사람마다 성격이 다 다른 걸.


“슬슬 돌아가죠.”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갈 무렵. 용사가 잔뜩 화가 나서 기어나온 마지막 거짓 여인을 처리하고 도시를 향해 발길을 돌렸다.

도시로 돌아가는 길. 완만한 구릉지를 지날 때, 멀리 등 뒤로 기울어가는 붉은 석양이 오늘따라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텔이었다.

입체감 있는 적란운이 예쁜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다리가 아팠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좋은 꿈을 꿀 것 같은 저녁이었다.




<4>

용사는 의뢰소에 복귀 보고를 하고 텔과 헤어져 숙소로 돌아왔다. 이번 보고서는 텔이 보지 않은 장면들이 많아서 용사가 쓰기로 했다.

텔도 마지못해 수긍하는 눈치였다.

일단은 오늘 들러리였으니까.


“오늘 고생하셨어요. 류 씨.”

“네. 텔도 고생했어요.”


용사는 묘하게 다정해진 텔의 인사에 착각인가 생각하면서도 지친 텔을 배려해서 집 앞까지 잘 바래다준 참이었다.

시간이 아직 애매하게 저녁이라 지금이라도 내려가서 가볍게 한잔 하고 돌아올까 생각해봤지만 그냥 말기로 했다. 가끔은 술을 마시지 않고 쉬는 날도 있어야겠지. 그럴 상황도 아니었고.

용사는 곧 여관방에 딸린 세면대에서 간단한 세수를 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잠시 방 구석을 힐끗 바라본다.

곧 관심이 식은 듯 신발을 벗고 삐걱거리는 나무침대 위를 뒤척이며 기어올라 이불을 덮고 누웠다.

멀리 다른 방에서 새어들어오는 주기적으로 삐걱거리는 여관의 일상적인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용사는 무심히 잠을 청하는 듯 보였지만, 곧 혼잣말을 하듯 말했다.


“나와.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보면 난 잠 못자.”

“······.”


텅 빈 허공에서 예고도 없이 사람이 녹아나왔다.

여인은 망토의 후드를 끌어내리며 말했다.

그녀는 낮에 만났던 마법사. 제나였다.


“역시. 그건 요행이 아니었어. 그렇죠?”

“너. 원하는 게 뭐야?”

“당신. 이런 미인이 방으로 찾아왔는데, 적어도 얼굴이라도 쳐다보면서 대화하는 게 맞지 않나요? 최소한 눈이라도 뜨고.”


용사는 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딴 소리 할 거면 꺼져. 피곤하다.”

“아, 알았어요. 저도 그냥 농담이었다구요.”

“······.”

“잠시 의자에 앉아도 될까요?”

“그러든지.”


제나는 행여나 용사의 심기를 거스를까 싸구려 나무 의자를 조심스럽게 들어올려 방향만 돌려 살포시 엉덩이를 붙였다.

긴 다리를 가볍게 꼬면서.


“그럼 용건만 간단히 말할게요.”

“그래.”

“당신. 실력을 숨기고 있죠? 혹시 1급 용병인가요?”

“아니.”


용사는 즉답했다.

그러나 제나는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이미 스스로가 확신을 갖고 있었으니까.


“거짓말.”

“의심스러우면 책상 위를 봐.”


제나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실내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손가락을 튕긴다.

굳이 그럴 이유는 없었지만 눈앞의 사내가 놀라지 않도록 간단한 마법의 사용을 예고하기 위해서였다.

꾸덕하게 굳어가던 양초의 심지에 새로운 불꽃이 태어났다. 작은 먹보는 곧 배합된 밀랍과 파라핀을 빨아들이며 가까운 책상 위를 자신의 색깔로 붉게 물들여가기 시작했다.

제나는 곧 책상 위를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3급 용병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남자가 지금 뭘 하자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아. 지금 이걸 묻는 것이 아니잖아요? 용병장이라면 낮에도 봤어요. 설마 진심으로 본인이 3급 수준이라고 주장하겠다는 건 아닐 거고요. 그렇죠?”

“내가 왜? 나는 3급 용병이 맞아.”

“좋아요. 3급이라는 건 믿을게요. 하지만 최소한 당신이 1급 용병에 준하는 실력자라는 것까지는 부정하지 못하겠죠. 아닌가요?”


확신 어린 물음이었지만 용사는 즉답했다.


“응. 아냐.”


대륙의 지붕인 아스가르드. 만약 그 산맥의 초입에서 누군가 저 산의 높이가 여기 있는 1층 2층 3층짜리 건물 중 어느 것과 비슷하냐고 묻는다면 용사는 어떤 대답을 해야만 할까.

결국 도토리 키재기의 잣대인 것을.

용사의 무심한 반응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차원 폐공간 속에 숨긴 고위마법을 감지해낼 정도의 실력자가 곧 죽어도 3급 용병이라고 우기는 건 너무했잖아요. 지금도 그렇고요. 대체 어떻게 한 건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뒤를 좀 밟았어요. 그것도 사과드릴게요.”

“그게 목적이었냐?”

“네. 이상하잖아요. 다차원 공간 조작은 가문에서도 구사하는 사람이 손에 꼽히는 고급분야거든요. 이런 말 하면 죄송하지만 당신 같은 배경도 불분명한 어중이 떠중이가 간파할 만한 마법이 아니라서요.”

“······.”


잠시 침묵하던 용사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래. 화를 내봤자 나만 바보되는 거지.

딱 봐도 상대는 바보가 아닌가.


“경쟁의 시대잖아. 요즘은 3급도 먹고살기 힘들어. 이것저것 배우지 않으면 금방 도태되어버리니까.”

“그, 그런······.”


비틀대는 제나에게 용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거. 엄청 실례되는 말이라는 건 아냐?”

“죄송해요. 비하의 의도는 없었어요. 어중이 떠중이라는 말은 취소할게요. 진심으로요. 가문에서 받들여 모셔지다가 세상으로 나온지가 얼마 안 돼서 제가 아직 사회생활이 서툴러서요.”


저런 말을 자기 입으로 하다니.


“그런 것 같았어.”

“······.”

“알았으면 그만 가는 게 어때?”


이어지는 미묘한 침묵. 결국 한숨을 푹 내쉰 제나가 말했다.


“좋아요.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요?”

“응. 묻지 마. 뭘 자꾸 물으려고 해?”

“혹시 당신을 고용할 수 있을까요?”


묻지 말라니까 하여간 사람 말을 더럽게 안 듣네 이게.


“의뢰금은 넉넉히 챙겨드릴 게요. 1급에 준하는 금액으로.”

“말을 좀 들어. 관심 없다니까.”

“1급 대우로 드리겠다고요. 실질적인 기간은 길어봤자 한 달이에요. 한 달에 수천 플로라면 당신이라도 해볼 만한 거 아닌가요? 이런 싸구려 여관에서 사는 거 슬슬 질리지 않나요? 정 못 믿겠으면 의뢰소를 통해서 보증을 걸어도 되고요. 네?”


결국 한숨을 푹 내쉰 용사가 몸을 일으켰다.

흉흉한 눈빛에 순간 제나가 몸을 흠칫 떨었다.

역시 착각이 아니다.

계속 긁어본 보람이 있었달까.

무엇 하나 외적으로는 바뀐 것이 없지만 이 남자에게는 가문 당대 최고의 천재인 자신조차 떨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차마 때릴 수는 없어서 머리를 긁적이던 용사가 말했다. 딱 보니 있는 집안의 아이인데 괜히 귀찮아지기만 하지.


“너 참 귀찮은 성격이구나.”

“······.”

“마지막으로 말해 줄게. 나는 지금 피곤하고. 둘째, 네 소꿉놀이에 어울려줄 생각이 없다. 셋째, 나는 정말로 3급 용병에 불과하고, 설령 네 생각대로 실력을 숨겼다고 해도 수상한 의뢰에는 관심 없어.”

“소꿉놀이 아닌데요.”

“그리고 1급 용병이라면 이미 있잖아 임마.”


아무리 그래도 이 평화로운 시기에 1급 용병이 둘이나 필요한 의뢰를 용사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철저한 것은 좋지만 이쯤되면 욕심이 아닐까. 물론 용사가 보기에 그 1급 용병조차 돈보다는 사심이 있어서 찾아온 운 좋게 걸린 사람에 불과했지만. 신분 상승을 노리는 기회주의자라고 할까.


“기분 나빠 할걸.”

“왜요? 의뢰금은 둘 모두 충분히 드릴 건데요.”

“그런 문제가 아냐. 모르겠냐?”

“모를 리가 없잖아요. 저는 천재거든요.”

“응 아냐. 모르고 있어.”


딱 봐도 순진한 귀족 아가씨 어떻게 잘 꼬셔서 있는 집안에 들어가볼까 하는 30대 후반의 실력파 용병 앞에 갑자기 어디서 굴러먹던 것인지도 모를 3급 용병이 끼어들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될까.

불의의 사고로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업계에서 암암리에 매장당할 수도 있고.

괜히 마음에도 없는 남의 치정에 끼어드는 것은 질색이었다.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경험이 있는 용사라서 더욱 그랬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요. 이 제가 부탁하잖아요.”


자의식 과잉도 이쯤되면 병인데 이거.


“술 한잔 어떠세요? 아직 잠들기에는 이르지 않나요?”

“······.”

“제가 근사한 곳에서 살게요.”


결국 막무가내로 나오는 제나의 부탁에 질려버린 용사가 그녀의 찰랑거리는 흑발을 바라보다가 문뜩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근데 너 혹시 염색한 거냐?”

“네?”

“머리카락. 사실 적발이라거나. 맞냐?”

“아뇨. 전 태어날 때부터 흑발이었는데요?”

“그렇구만. 그럼 됐어. 잘 가라.”


그것을 끝으로 일말의 관심조차 식어버린 용사가 다시 드러누워 싸구려 이불을 목까지 덮어쓰며 등을 돌렸다.

적막이 내려앉았다.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동시에 초인의 영역에 걸쳐있는 그들이라면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는 불필요한 여관의 일상적인 소음까지도.

그래서 실력자들의 경우에는 돈이 좀 들더라도 싸구려 여관에는 잘 묵는 편이 아니었는데... 생각할수록 참 특이한 사람이었다.

결국 제나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일주일 정도 몽블랑에 더 머물 예정이니까 혹시라도 생각이 바뀌면 연락 주세요. 의뢰소에 제가 지내는 곳을 알려두었으니까요.”


대답은 없었다.

향긋한 샴푸의 잔향이 용사의 코끝을 간질였다.


[용사지만 독재합니다]

21. 소녀와 데이트와 스토커(3) - 끝


작가의말

주말동안 유의미하게 쌓인 데이터를 가공해서 약간의 분석을 해봤는데, 천국과 지옥이 모두 공존하는 데이터였습니다... 할렐루야.

현재 데이터를 기반으로 초반부에 대해 전방위적으로 수정을 했고 또 하고 있는데, 장면을 살리면서 불호 요소를 걷어내는 작업인 만큼 기존 독자분들께 유의미한 변경점은 없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관련해서 그동안 미뤄두었던 오탈자도 한 번 검수를 할 겸 일단은 이번 챕터까지는 연재를 하고, 아마 이번주 목요일부터 최대 3일정도 휴재를 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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