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샌드박스 님의 서재입니다.

용사는 독재합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샌드박스
작품등록일 :
2020.02.08 15:46
최근연재일 :
2020.02.26 09:00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21,498
추천수 :
671
글자수 :
151,751

작성
20.02.08 18:50
조회
1,682
추천
44
글자
17쪽

1장 : 광산의 악마(2)

DUMMY

미로같은 갱도를 상념에 잠긴 채 얼마나 내려왔을까. 불현듯 마스크 너머로 뭉개진 목소리가 용사의 상념을 깼다.

앞서가던 늙은 광부가 옅은 김이 서린 유리마스크 안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가운데 용사는 차분히 주위를 살폈다.


“음······.”


용사는 감각을 칠흑 같은 갱도 저편으로 확장해봤지만 딱히 거슬리는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보존된 현장만이 을씨년할 뿐.


“사고 현장을 살펴보고 가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뒤따르던 털보 광부의 물음이었다. 용사는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곧바로 입을 닫았다.

숨이 차서가 아니다. 그 어떠한 마법적 처리도 되어있지 않은 조악한 광부용 유리마스크는 내구성은 어느정도 담보해주지만, 입을 열 때마다 김이 서리는 고약한 물건이었다.

작업용 방진 마스크는 아니었고, 지금과 같이 폐쇄된 지 오래되어 환기 상태가 열악한 갱도를 들어갈 때 쓰는 따로 공기통이 연결된 휴대용 산소마스크였다. 객관적인 품질은 보급형 수준.


‘세상이 많이 좋아졌구나.’


용사는 그럼에도 격세지감을 느겼다. 불과 30년 전까지만 해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물건이었으니까.

그가 기억하는 약 50년 전의 대륙은 이렇지 않았다. 황실과 귀족은 당연하게 누리는 마법에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고, 어중간한 계급은 눈앞의 유토피아에 신분상승만을 갈구했다.

백성들은 늘 부족했지만 그럼에도 신전에 의해 목숨만은 자비롭게 보장받았고, 문명의 기술적 발전을 추구하는 공학의 발전보다는 마법의 이론적 발전을 출세의 길로 삼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마법적 기반 위에서 돌아가던 사회였으니까. 그 수준도 결코 만만하지 않았고.


‘고생했지.’


변화는 평화적으로 이룰 수 없었다.

밑에서든, 위에서든. 어느 쪽이든 당시의 기득권과는 타협이 불가능한 문제였다. 극소수의 별종들을 제외하면 사회의 지배층은 진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집에 마법사가 없다면 말을 보급해줄테니 마차를 타라. 유명한 귀족의 말이었고 그래서 용사에게 목이 날아갔다.

용사의 새로운 그림은 마법이라는 단 하나의 진리 앞에 다른 모든 가능성이 묵살되는 세상이 아니었다.

레아를 이기기 위해서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야 했다. 그렇지 않은 세상의 끝은 이미 질리도록 경험해봐서 잘 알고 있었다. 가장 성공했던 마법문명의 극한조차 레아 앞에 무기력했다.

마왕이야말로 마법의 종주였으니까.

그렇게 죽이고. 또 죽이고.

앞을 막는 사람의 피가 강이 되어 흐르길 7년. 용사는 맨땅에서 시작해 황도에 입성했고, 내성 밖에 내걸린 황제의 머리와 함께 중세 암흑기의 종막을 고했다.

그리고 그날 밤 용사는 꿈에서 여신을 만났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러나 용사를 원망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자신이 꿈꾸던 이상을 더 고집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눈물이었고, 아마 용사가 잘 모르는 건국비화와도 맞닿은 복잡한 눈물이었을 것이다. 용사로서는 감히 짐작만 할 뿐이다.

여기에 관해 악마가 지겹도록 용사에게 비밀을 알고싶지 않냐며 꼬득이는 때가 많았지만... 여신이 스스로 밝히지 않았으므로 용사는 그저 매번 해야할 일을 해왔을 뿐.

이후로 용사는 여신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각오했던 일.

용사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사고 이후 시신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라진 뒤였습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확인차 다시 물어본다.


“정말 모두 사라졌습니까?”

“네. 잘린 소장님의 팔까지 사라졌다고 하더군요.”


바닥에는 실 같은 지하수가 흐르고 있었다.

용사는 들고있던 고성능 랜턴을 비추어 아직도 검은 혈흔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바닥을 가볍게 슥 살폈다.


“보존이 생각보다 잘 되어있네요.”

“치안청에서 보존마법을 단단히 걸어놨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긴. 그렇겠죠.”


몇 차례 조사단이 다녀간 뒤였지만 현장은 비교적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그저 시간의 흐름이 살짝 흐려놓았을 뿐.

암반의 굴곡을 따라 부채형으로 뻗어 나간 실 같은 지하수가 검은 혈흔의 바닥을 나뭇잎의 잎맥같이 씻어내서 꼭 질 나쁜 화가의 그림처럼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용사가 눈썹을 가볍게 찡그렸다.


‘석연찮네. 정말 뭐가 있나?’


혈흔이 퍼진 범위를 보건대 못해도 장정 셋이 즉사했을 수준의 분량이었다. 그것도 몸이 토막난 수준으로 급격히.

아무리 기습을 당했다고 해도 장정 6명이 냉병기로 무장하고 있었던 자체 조사단이 너무 쉽게 당했다. 근접전에서 일반인과 무한대의 교전비가 나오는 3급 용병도 그건 불가능했다.

최소 2급. 아니면 중앙 기사청 소속의 사관급 장교 정도는 되어야 이정도로 폭력적인 참상을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추론해본다. 바닥은 물론 갱도 벽과 천장에까지 튄 방울진 혈흔. 주변 갱도의 구조. 조사대의 진행 방향과 기습자의 동선. 은폐 장소. 사용된 무기의 형태. 그것이 괴수일지 사람일지 정말로 악마일지는 두고봐야겠지만 하나만큼은 분명해지고 있었다.


‘첫 희생자의 복부가 단칼에 잘렸어. 혹은 외갑각 형태의 전투형 앞발을 가진 괴수일 수도 있겠지. 최소 상급. 주변의 지형을 볼 때 기습은 계획된 것이었고, 따라서 지능척도도 최소 0.7 이상.’


생각을 살짝 더 확장해본다.


‘시체가 모두 사라진 건 먹은 건지 옮긴 것인지 모호하지만, 어쨌든 일개 마인의 식사량은 분명히 넘어선다. 확실히 그건 다행이지만···, 역시 좀 이상하지.’


동시에 정교하게 청각계통을 강화해본다.

벽에 물이 흐르고 떨어지는 규칙적인 소음과 광부들의 숨소리가 한데 엮여 갱도를 타고 메아리치며 퍼져나간다.

순간적으로 강화된 용사의 청력은 그것을 모두 최소단위로 낱낱이 분해하여 정교하게 재해석을 시작했다. 그리고 용사의 아득한 실전경험은 순식간에 대부분을 완벽히 이해해냈다.

역시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헉.”


인기척에 기웃거리던 손바닥만한 동굴 거미 몇이 용사가 걷어찬 돌맹이에 맞아 명을 달리했을 뿐.

그러나 저런 건 용사는커녕 평범한 성인 남성들에게도 위협조차 되지 못하는 하찮은 미물에 불과할 뿐이었다.

젊은 광부가 물었다.


“더 들어가실 생각이십니까?”

“예정대로 최심부까지 갑니다.”

“토벌이 목적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만.”

“의뢰를 받은 이상 돈 값은 해야 하니까요.”

“······.”


일행은 다시 대형을 잡았다.

목숨이 걸린 문제인 만큼 불만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그들이 약속받은 금화, 100플로라의 무게였다.

광부들이 이 난리통에도 일터를 지키고 있는 이유. 계속된 실종으로 늘어난 위험수당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그들이 이 판타지 세계에서도 갈 데까지 간 막장 인생이라는 이유가 컸다.

광산은 기본권을 보장받는 노예가 되느니, 목숨을 걸더라도 휴일에 여자를 끼고 술 한잔의 자유를 원하는 자들이 모이는 최후의 보루와도 같은 곳이다.

그리고 상환불능의 채무를 상환가능으로 만들어주는 그밖의 장소는 전쟁터 정도가 전부였다.

덕분에 오늘 용사는 하루 길잡이를 구하는데 무려 인당 100플로라의 거금을 불러야 했다. 계약금으로만 벌써 수십 플로라를 쥐었을 것이다.

숫자상으로만 보면 단순히 반장급 베테랑 광부의 100일 치 임금에 불과했지만, 하루 벌어 하루를 연명하는 그들의 특성상 그 정도 목돈이면 목숨까지 걸 수 있는 인생들이 이곳에는 정말 많았다.

그래서였을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무섭지도 않나?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조금 고민하던 용사는.


‘하긴. 벌써 10년이나 지났으니.’


이내 납득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머리로는 아니기를 빌고 있지만, 몸은 이미 맡아버리고 만 것이다. 썩을 데까지 썩어버린, 시궁창의 악취를.

예상은 아마도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악마의 냄새였다.




<2>

무심결에 배어나온 땀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찝찝한 기분. 시간을 확인한 용사가 선언하듯 말했다.


“그만 올라갑시다.”


기다렸던 말에 광부들의 안색이 밝아진다.


‘하긴. 이정도로 뭐가 나올 리가 없겠지.’


수색은 가시적인 소득 없이 끝이 났다.

끝내 단서는 찾지 못했다.

용사는 광부들을 독려하여 9번 램프로 통하는 7광구 최심부 곳곳을 부지런히 돌아다녔지만 어느곳에서도 유의미한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했다.

총 연장만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미로처럼 얽힌 7광구 전체를 고작 하루만에 모두 탐사한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기도 있지만, 애초에 사건 현장에서 이어지는 흔적 자체가 전무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꼭 마법이라도 쓴 것처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지.’


일상에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희소하지만 마법사는 제국 어디에나 살고있다. 꼭 인간 뿐만 아니라 일부 상위종들도 진화의 과정에서 마법을 사용하는 방법을 배웠다.

따라서 핵심은 어떻게가 아니다.

왜.

대체 왜 시체가 없어졌는가.

뭐, 그거야 이제 용사의 관할이 아니었지만.

의뢰소에 보고하면 절차에 따라 처리될 것이다. 그것이 용사가 고생 끝에 형성한 제국의 합리적인 행정 시스템이었다.

아니면 수도로 직통 편지 한통만 넣으면 흑막이 누구든 당장 내일 점심이면 몽블랑 광장에 머리가 내걸릴 것이다.


“두 분 다 수고하셨습니다.”


뒤따르던 광부들의 눈동자는 텅 비어있었다.

긴장과 피로로 하얗게 불태워버린 것이다.

그리고 살아서 돌아왔다는 실감이 생생해질수록 그 빈자리를 일확천금의 돈 생각이 채워가기 시작했다.

떠나가는 광부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다음에도 필요하시면 저희를 꼭 불러주십시오.”

“물론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용사는 빈말을 하지 않는다.

물론 그게 이번 생이 된다는 보장이 없어서 그렇지.


“뭐 좀 나온 것이 있습니까?”


사무실에서 맡겨둔 짐을 챙기는데 조사대가 생환했다는 소식을 들은 현장소장이 어느새 찾아와 고개를 들이밀었다.

용사는 가볍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현장소장은 담담히 수긍했다.


“저런. 아무튼 무사하셔서 참 다행입니다.”


시큰둥하게 주억거리던 용사가 말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살펴가십시오.”


라고 말하던 소장은 용병이 사무소 건물을 나서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무실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선선한 바람이 잘 포장된 비탈길을 내려가는 용사의 뺨을 간질였다. 멀리 커튼처럼 드리운 높은 층운이 저녁 햇살을 받아 찬란한 노란색 빛을 밝히고 있었다. 멋진 석양이 기대되는 오후였다.

시원섭섭한 하루의 끝이었다.




&




[친애하는 감찰단장님께...]


공문서 급의 격식을 갖춘 문장들이 할아버지들이나 쓸법한 꼬불꼬불하고 낡은 필기체로 이어진다.

용사는 반쯤 적어가던 편지를 그대로 구겨서 버렸다. 물론 종이는 최고급 펄프지가 아니라 싸구려 파피루스였다.


[바쁘냐? 얼굴 좀 보자.]


이번에는 친한 친구 사이에나 쓸법한 경박한 어체.

물론 이번에도 용사는 몇 자 적다가 말고 편지지를 그대로 구겨서 버렸다. 반대로 이번에는 너무 갔다 싶었다.

아무리 자기가 키운 새끼라지만 머리도 컸고 부하들 보는 눈도 있는데. 그래.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간 게 맞는 것 같았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용사는 보안성, 전달력, 친근함 등 모든 방면에서 만족스러운 몇 줄 되지 않는 짧은 편지를 작성한 뒤 익숙하게 밀랍으로 편지봉투를 밀봉했다.

겉보기에는 소년소녀들의 연애편지같이 조잡해 보이겠지만 밀랍이 딱딱하게 굳기 전에 갖고 있던 인장을 확실히 찍었으니 이변이 없다면 당사자에게 잘 배달이 될 터였다.

용사가 일선에서 손을 뗀 지 벌써 10년 단위가 넘어간 지 오래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애들 교육을 잘해놨다면야.


‘근데, 이 집 맥주는 뭐 이리 싱겁냐. 진짜.’


용사는 혀를 차며 한 모금 마신 맥주잔을 식탁 저편으로 밀어둔 채 이번에는 의뢰소에 제출할 몽블랑 북부 탄광의 7광구 수색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고작 몇 줄의 편지를 쓰려고 한참을 고민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용사의 깃펜에는 막힘이 없었다.

이번 생에서는 고작 3급 용병에 준하는 업계의 경력만 있을 뿐이었지만 전체 생을 통틀면 대 용병에 걸맞은 식견과 실력과 인맥을 두루 갖춘 당대 최고 용병이었던 적도 있었으니까.

여관에 도착한 뒤 불과 1시간이 지나기 전에 일을 모두 마친 용사는 이내 떠들석한 홀로 내려와 요리를 시켰다. 물론 아까 방으로 배달온 맥주가 싱거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어머. 미안해요. 서비스 넉넉하게 드릴게.”


용사는 생각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럼. 오크통 밑바닥에 남은 맥주에 찌꺼기를 거르고 물을 섞어 눈탱이 치다 걸렸는데.

젊은 청년이 대충 망토를 두르고 꾀죄죄한 얼굴로 들어와서 싸구려 방을 잡으니까 애송이인줄 안 거지 뭐.

그나마 요즘 용사가 이지모드라서 이쯤하고 넘어가는 거지 노말모드만 되었어도 절대 그냥은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위든 아래든 한점도 썩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용사가 추구하는 이번 회차의 핵심 철학 중 하나였다. 끝내 여신에게 미움을 받아 버려질 정도로.

모두를 농부로 만들어버린 이 세상에서 소수의 도둑놈들도 큰 이득을 보기 쉬웠다. 사회의 잠재력이 높아진 만큼 사람들은 타인을 더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유능하다는 이유로 묵인해온 도둑놈이 판치던 지금까지의 세상과는 좀 달랐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요리를 기다리는동안 먼저 나온 만족스러운 진한 맥주 한잔을 홀짝이며 용사는 떠들썩한 식당으로 시선을 돌렸다.

제국 최대의 광산도시답게 절반이 퇴근한 주간조 광부들이었고, 나머지는 도시의 3차산업에 종사하는 지역 주민들이었다. 타지역 사람들도 몇몇 보였다.


‘뭐지, 쟤는?’


실내를 가볍게 한바퀴 돌던 용사의 시선이 불현듯 식당 구석에 홀로 앉아있던 가녀린 체구의 여행자에게서 멈췄다.

나름대로 넉넉한 여행용 망토로 체형을 가렸고, 최대한 수수하게 입어 귀찮은 일에 엮이지 않기 위해 신경을 쓴 티가 많이 났지만 용사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딱 봐도 여행 나온 귀족가의 여식이었다. 그런데 호위가 보이지 않는 것이 특이했다. 집이라도 나온 것일까.

용사는 대수롭지 않게 납득했다.


‘종종 있지.’


변화의 시대였다. 개혁의 바람은 위에서부터 몰아치고 있었고, 신세대들은 그 변화를 당연하게 여기며 자라왔다.

답답했을 것이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여전히 과거의 관습에 얽매여 변화에 저항하는 기성세대들이. 사실 그것이 과거의 관성을 이겨내며 변화를 수용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납득하지 못한 채. 호위가 없는 것은 그 가문에의 소심한 반항이었을까.


‘뭐, 내 알 바는 아니지만.’


금이야 옥이야 키워놓은 딸의 느닷없는 가출에 유서깊은 귀족 가문이 뒤집어지던 말던. 오히려 용사로서는 가진 자들이 더욱 세상을 경험하고 변화를 수용하기를 바랐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지금은 잠시 평화롭지만 내일 당장이라도 마왕군이 발호할 수 있는 것이 현 대륙의 정세였다.

그 시기는 용사조차 알 수 없었다.

단지 최대한 유예되었을 뿐.

그 전에 유서 깊은 무가의 장남조차 검 대신 망치를 잡을 수 있는 세상이 되어야 했다. 직업의 귀천 때문에 타고난 재능이 묵살되어서는 안됐다. 그것이 용사가 원하는 사회였다.

용사의 전력을 담은 유예조차 언제까지 지속되지는 못할 테니까. 상념은 달콤한 향기와 함께 끝이 났다.


“주문하신 요리 나왔습니다.”


곧 볼에 주근깨가 점점히 박힌 처녀가 테이블에 요리를 깔기 시작했다. 분위기를 보니 여관 주인의 딸로 보였다.

여신이 용사 몰래 장난을 치던 과거였다면 자연스럽게 인연이 생기고 하룻밤, 혹은 달콤한 관계로 발전했겠지만 요즘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물론 아쉽지는 않았다. 이제야 세상이 당연하게 바로잡혔다는 느낌일까. 그런 인연이 매번 이어진다는 건 이상했으니까.

용사는 홀에서 신경을 끄기로 했다. 요리는 그럭저럭 먹을만했다. 맥주도 신경을 쓴듯 진한 것이 간만에 흥이 났다.

하루의 끝에 또다시 생환을 축하하며 술과 진수성찬을 즐기는 것은 용병업계의 오랜 관행과도 같은 것이었고, 한편으로 용사가 이 생활을 마음에 들어하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얼씨구?’


다 먹고 방으로 올라가려는데 문뜩 아까 보았던 이름 모를 아가씨가 테이블 위로 풀썩 엎어지는 것이 보였다.

취하는줄도 모르고 달콤하다고 독한 과일주를 계속 시켜먹을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뭐 역시 알 바는 아니었다.

치안이 안정된 대도시에서 딱 봐도 귀족가의 사람임이 분명한 여행객을 건드리는 간 큰 놈은 이곳에 없었다. 오늘만 사는 구도심의 뒷골목 건달들도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시대가 바뀌었다고는 해도 귀족은 귀족. 모욕죄만으로도 운이 나쁘면 노역형을 살 수 있었다.

만약 그 이상의 짓을 한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행복한 현세의 지옥이 영겁도록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용사지만 독재합니다]

03. 광산의 악마(2) - 끝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3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용사는 독재합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근황 +6 20.03.28 283 0 -
공지 복귀지연 공지입니다 +5 20.03.02 336 0 -
23 8장 : 소녀와 데이트와 스토커(5) +3 20.02.26 440 25 17쪽
22 8장 : 소녀와 데이트와 스토커(4) +5 20.02.25 483 23 15쪽
21 8장 : 소녀와 데이트와 스토커(3) +6 20.02.24 514 31 18쪽
20 8장 : 소녀와 데이트와 스토커(2) +7 20.02.23 578 33 17쪽
19 8장 : 소녀와 데이트와 스토커(1) +7 20.02.22 671 23 16쪽
18 7장 : 푸른 깃발의 주인(2) +1 20.02.22 594 26 17쪽
17 7장 : 푸른 깃발의 주인(1) 20.02.21 621 22 15쪽
16 6장 : 부족한 재능과 어긋난 미련(3) +1 20.02.20 609 20 13쪽
15 6장 : 부족한 재능과 어긋난 미련(2) +1 20.02.19 612 19 15쪽
14 6장 : 부족한 재능과 어긋난 미련(1) 20.02.18 636 22 12쪽
13 5장 : 애들 장난(2) 20.02.17 650 22 14쪽
12 5장 : 애들 장난(1) +1 20.02.16 661 21 12쪽
11 4장 : 양손의 꽃(3) 20.02.15 690 20 15쪽
10 4장 : 양손의 꽃(2) 20.02.14 736 25 11쪽
9 4장 : 양손의 꽃(1) +1 20.02.13 816 21 14쪽
8 3장 : 3급 용병 류 몽블랑(2) 20.02.12 880 30 13쪽
7 3장 : 3급 용병 류 몽블랑(1) 20.02.11 923 28 16쪽
6 2장 : 소녀와 수상한 팬클럽(3) 20.02.10 1,102 34 19쪽
5 2장 : 소녀와 수상한 팬클럽(2) +1 20.02.09 1,215 39 12쪽
4 2장 : 소녀와 수상한 팬클럽(1) +1 20.02.09 1,371 37 14쪽
» 1장 : 광산의 악마(2) +3 20.02.08 1,683 44 17쪽
2 1장 : 광산의 악마(1) +2 20.02.08 2,308 55 15쪽
1 프롤로그 : 예정된 종막 +3 20.02.08 2,694 51 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