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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여름 님의 서재입니다.

숙원 홍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서여름
작품등록일 :
2020.05.11 11:19
최근연재일 :
2021.04.12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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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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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숙원 홍씨 4. 너무 일찍 떠난 사람들

DUMMY

숙원 홍씨 4. 너무 일찍 떠난 사람들


여름은 볼펜을 손에 든 채 책상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대본이 펼쳐져 있고 그 옆에는 손글씨로 쓴 노트가 있었다. 노트에는 서진호 감독 연출의 장점과 단점이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그 옆에는 서여름이라 써놓고 자신이 연출을 했다면 이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적혀있었다.

여름은 볼펜을 내려놓고 대본을 들고 읽으려다 그대로 덮었다.

‘이십 사년을 제가 아빠 노릇했으면 앞으로는 아버지가 하세요. 양심이 있으시면.’

여름은 봄이 때문에 진호에게 쌓인 게 많았다. 진호는 비가 오면 봄이 우산 챙겨줘라. 눈이 오면 봄이 길에 미끄러지지 않게 해라. 봄이 재채기만 해도 여름이 탓이었고. 여름이 일등을 해도 꼴찌한 봄이에게 공부를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야단을 맞았다. 봄이가 어려서 많이 아팠을 때 진호가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너는 왜 아프지 않느냐고 책망하는 것 같았다.

그 때부터였다. 여름의 가슴 속에 봄에 대한 걱정과 미움, 진호에 대한 서운함과 관심 받고 싶은 애증의 불씨가 생긴 건. 가슴 속의 타오르던 말들을 진호에게 쏟아내고 나니 시원하기는커녕 가슴 속에 납덩이가 들어앉은 것 같았다.

처음이었다. 아버지 진호와 그렇게 길게 대화를 나눈 건. 여름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여름이 진호를 떠올리고 있는 동안 진호는 여름의 방 앞에 서 있었다.

‘아빠, 여름이가 아빠한테 직접 얘기한다고 했는데 못 들었어? 군대 가기 전에 아빠한테 연출 일 배울 거라던데.’

진호는 여름이가 군대에 갈 거란 생각을 해본 적도 없었다. 이런 무심함에 충격을 받은 건 진호 자신이었다.

아내가 출산 중에 죽었다. 아내는 첫사랑이었다. 아내는 사랑이 많은 여자였고 진호에게 봄 햇살처럼 따뜻했다. 아내는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필호에게도 햇살이 돼 주었다. 늘 홀로 외톨이처럼 있는 필호에게 작가가 되도록 응원해주었다.

아내와 뜨겁게 사랑하고 많은 사람의 축복 속에서 결혼을 하고 허니문 베이비까지 생겼다. 완벽했다. 쌍둥이를 임신한 아내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했다. 그 날 아내는 봄과 여름으로 이름을 짓자고 진호에게 졸라댔다.

출산을 앞둔 어느 날 아내는 다니던 병원을 옮기겠다고 했다. 개인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있었는데 종합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싶다고 했다. 진호는 개인 병원이 못미더워 늘 종합병원으로 옮기자고 했었다. 아내는 그럴 때마다 병원이 커야 명의가 있는 건 아니라면서 그를 달랬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꼭 종합병원에서 아이를 낳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진호는 흔쾌히 동의했고 아내는 종합병원에서 가장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세상을 떠났다.

그 의사는 진호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었다. 분명 탯줄을 잘랐는데 그것이 탯줄이 아니었다고. 아내는 과다출혈로 죽었다.

핏덩이 여름이와 봄이를 보면서 아내가 떠올랐다. 꼬물꼬물 낯선 두 핏덩이를 보면서 내 아내를 빼앗아갔다는 원망이 있었다. 이 아이들만 아니었으면 아내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해서는 안 되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 생각에 자책했고 아이들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다. 아내가 떠나고 오랜 시간을 아버지가 아닌, 아내를 잃은 한 남자로 슬픔에 취해 살았었다.

그렇게 7년이 지났다. 잠을 자던 봄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지더니 혼수상태에 빠졌다.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병원마다 같은 소리였다. 원인을 알지 못한다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었다. 그때 처음으로 진호는 자신이 아버지임을 알게 됐다. 봄이를 잃는다면 살 수 없음을 알았고 죽어서도 아내를 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봄이 쓰러진 날이 봄의 7살 생일이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봄의 생명은 하루가 다르게 꺼져가고 있었고 호흡기에 의지해 숨만 쉬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여름이가 봄이를 집에 데려가자고 했다. 봄이는 답답한 걸 싫어한다면서. 봄이의 몸에 주렁주렁 매달린 것들을 다 풀어주고 자유롭게 해주자고. 진호는 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병원에서도 봄이를 집으로 데려가 잘 보내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했다.

봄은 호흡기를 떼어내자 스스로 숨을 쉬기 시작했다. 여름은 봄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진호와 필호가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잠들었을 때도 여름은 봄이를 지켰다.

봄은 집에 온지 5일 째 되던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났다. 마치 긴 잠을 자고 일어난 것처럼.

봄이를 걱정하던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다. 마치 신기한 물건이라도 되는 듯 관찰하고 또래 아이보다 조금 늦된 봄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급기야 어떤 사람은 봄이가 엄마 팔자를 닮았다면서 단명을 할 거라고 했다. 그 때 필호가 그 사람의 집을 야구방망이로 때려 부셨고 경찰서 유치장 신세까지 졌다. 진호는 합의를 하고 필호를 집으로 데리고 왔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필호는 어디서 들었다면서 봄이를 멀리 보내야 살 수 있다는 말만을 계속 해댔다.

진호는 미신을 믿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비뚤어진 시선에서 봄이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마침 지리산 청학동에 촬영 때문에 가게 됐는데 봄과 여름을 데리고 갔었다. 봄은 그곳을 좋아했고 진호는 쌍둥이를 청학동에서 일 년을 살게 했다.

봄은 이후로도 잔병치레가 잦았지만 병원에 가는 걸 싫어했다. 봄은 몸이 아파도 가족이 걱정할까봐 늘 혼자 끙끙 앓았다. 봄은 커갈수록 아내를 꼭 닮아갔다. 그것이 진호를 불안하게 했다.


진호는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았다.

<진호와 필호 교복차림의 고등학생인 봄과 여름>

진호는 아버지로 살기로 결심을 했지만 방법을 알지 못했다. 진호는 아이들에게 원하는 모든 걸 해주는 게 아버지라 여겼다. 진호는 미친 듯이 일을 했고 이 바닥에서 나름 성공한 연출가가 되었다.

필호와 일을 하게 된 건 그의 천재성을 인정해서가 아니었다. 필호에겐 늘 빚진 기분이었다. 자신을 대신해 봄과 여름에게 엄마이자 아빠 노릇을 했었다. 무명이던 필호와 함께 하겠다고 했을 때 방송국의 모든 사람들이 반대를 했지만 밀어붙였다. 그런데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아내의 말이 맞았다. 필호는 천재였다. 이후로 6편을 함께 하면서 드라마는 모두 성공했지만 두 사람은 철천지원수가 돼 있었다.

진호가 여름에게 많은 것을 바라는 이유는 그가 아들에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진호는 여름을 자신보다 더 믿었다. 한 번도 내색한 적은 없었지만.


진호가 여름이 방의 문을 두드리려고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방에서 나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닥쳤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진호가 입을 열었지만 마음과는 다른 말이 무뚝뚝하게 흘러나갔다.

“스키장 갔다 일찍 와, 엄마 제사에 늦지 않게.”

“네.”

여름이 진호를 지나치려는데 진호의 입에서 자동으로 말이 덧붙여졌다.

“봄이 잘 챙기고!”

여름은 진호를 바로 보며 말했다.

“그렇게 걱정되시면 같이 가시던가요!”

여름은 차갑게 돌아섰지만 마음속엔 또 다른 납덩이 하나가 더 얹어졌다.


봄은 침대 위에 머리를 질끈 묶고 책상 다리를 하고 앉아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대왕 문종>의 대본이 놓여 있고 인물들 자료가 놓여 있었다. 봄은 <한명회> 자료를 들고 째려보며 한쪽에 놓고 <신숙주>를 들고 흥!하며 놓고 <수양대군, 이유>을 들고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던지듯이 놓았다. <김종서>와 <단종>의 자료를 양손에 들고는 안타까움에 한숨을 내쉬고는 내려놓았다.

<문종, 이향>의 자료만 다른 쪽에 놓았다.

“이제 돌아가셨으니까 이쪽에...”

봄은 아쉬움에 <문종, 이향>의 자료를 다시 들고 봤다. <이향>의 이름을 쓰다듬었다. 손끝만 닿았는데도 저릿해져오고 슬픔이 밀려왔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수많은 왕들 중에서도 유독 문종을 좋아했다. 어릴 적에 문종의 어진을 벽에 붙여두기도 했었는데 볼 때마다 울어서 떼어냈다.

“삶에서도 너무 일찍 떠나셨는데...드라마에서도 일찍 떠나보내게 되네...이향...”

봄이 문종의 자료를 넘겼다. 문종 이향의 어진이 보였다. 봄의 눈이 따뜻해지고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름처럼 아름답다...”

봄은 문종을 떠나보내는 게 아쉬워 읽어 내려갔다.

“세종대왕의 장자, 조선의 5대왕 문종, 성품이 곧고 학식이 뛰어나고...세종대왕을 대신해 8년간 대리청정을 하고...”


필호는 평소와는 다르게 진지한 얼굴로 책상에 앉아 골동품함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필호의 눈에 깊은 고뇌가 들어있었다.

필호가 조심스레 골동품함을 열었다. 그 안에 오래된 서책이 있었다.


봄이 문종 자료의 마지막 장을 읽고는 덮었다. <이향> 아쉬움이 가득한 듯 내려놓지도 못하고 있었다. 봄의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오래 사셨으면...부친보다 더 훌륭한 임금이 되셨을텐데...오래 사셨으면...”

봄은 <단종>의 이름에 시선이 갔다가 <수양대군>이 눈에 들어오자 자료를 엎어놨다. 다시 <단종>을 보고 <이향>의 이름을 보았다.

“왜 좋은 사람들은 일찍 떠나는 걸까...왜...삶도 나눠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봄은 <문종>의 자료를 옆에 두고 책상으로 걸어갔다. 책상 서랍을 열고 액자를 꺼냈다.

봄은 침대 맡에 걸터앉아 액자 속의 사진을 보았다. 젊은 시절의 진호와 봄이 또래의, 봄이와 꼭 닮은 여자의 사진이 있었다. 봄이의 엄마였다. 활짝 핀 벚꽃나무 아래에 진호와 엄마가 앉아 있었다. 진호는 엄마를 보며 활짝 웃고 있었고 엄마의 손은 볼록한 배에 살포시 올려져 있었다. 유일한 가족사진이었다. 엄마의 뱃속에 봄과 여름이 있었다. 봄은 사진 속의 엄마를 쓰다듬었다.

“엄마! 이틀 지나면, 엄마랑 같은 나이가 돼! 우리 엄마는 내 나이에 한 남자를 사랑하고... 한 남자를 웃게 하고...우리를 낳으셨는데....나는...”

봄은 잠시 있었다.

“내 앞가림도 못하는데...”

봄의 콧등이 시큰해졌다. 봄은 엄마가 속상해 할까봐 밝게 말을 이었다.

“내가 연애를 못해서 그래 엄마, 이 환상적인 미모로 연애 한 번 못하고...너무 예쁘면 남자들이 부담스러운가봐. 내가 엄마 닮아서 예쁘긴 해. 이거 봐 하얀 얼굴에 웃는 눈에 귀여운 코에 딱 적당히 도톰한 입술에...너무 예뻐 너무 예뻐...”

봄이 빙그레 웃었다. 잠시 사진을 물끄러미 보다가 진지하게 말했다.

“엄마, 부탁이 있어. 우리 여름이 곧 군대 가! 이제 다 컸어! 건강하게 잘 다녀오게 지켜 줘! 그리고...우리 아빠.”

봄이 진호의 웃는 얼굴을 보았다.

“다시 웃게 해줘, 이렇게, 엄마, 들어줄 거지?”


늦은 밤 광화문에 외로이 있는 경복궁. 그 곳으로 하늘에서 별똥별이 떨어졌지만 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른 아침 봄이 집 앞에 대형 고급 밴이 정차해 있었다. 그 앞에 커다란 가방과 스키 장비가 놓여 있었다. 여름과 준은 청바지에 점퍼 차림으로 차에 짐을 넣고 있었다. 여름은 사람이 들어가도 될 만큼 커다란 가방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뭐야...”

여름이 치우려 하자 봄이 달려와 가방을 안았다.

“안돼. 가져가야 해.”

여름은 가방을 도로 집에다 가져다 놓으려했지만 봄이 가방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여름이 봄을 보며 눈을 부라리자 준이 여름을 확 밀쳐냈다. 준이 윙크를 날렸다. 봄은 얼굴에 꽃받침을 하고 미소로 화답했다. 준은 봄의 커다란 가방을 차에 실었다. 한껏 멋을 부린 원빈은 차 앞에서 셀카를 찍고 있었다. 봄이 셀카 앵글 안에 들어오자 그녀를 밀치고는 다시 포즈를 취했다. 준이 원빈의 뒤통수를 후려치고는 하던 일을 했다. 원빈은 지랄 지랄하면서도 다시 셀카를 찍고 SNS에 올렸다.

‘이번에 계약하자고 조르는 매니지먼트사에서 이 차를 보냈지 뭡니까, 아직은 혼자 더 고생하고 싶고. 거절할까 합니다. 너무 일찍 스타가 되면 연기의 폭이 좁아질 거 같아요.’

원빈은 자신의 글이 마음에 들었는지 호호호호 웃다가 고개를 들었다. 원빈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봄은 원빈이 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이와 태희가 걸어오고 있었다. 같이 걸어오고 있었지만 서로 앞만 보며 걷고 있었다.

봄은 후다닥 달려가 먼저 소이를 부둥켜안았다.

“태희야, 오랜만이야!”

봄은 팔을 한껏 벌려 태희를 안으려했지만 태희의 말이 빨랐다.

“오버하지 마.”

봄은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태희는 보통 키에 둥근 얼굴 또렷한 이목구비,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에 머리는 늘 짧은 스타일을 고수했다. 쌍꺼풀 없는 긴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준은 태희를 보며 경례를 했다.

“충성!”

태희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살아있냐?”

여름이 다가오자 태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로스쿨 입학시험도 있고. 안 오려 그랬는데. 준이 제대도 했고. 너도 군대 가니까 억지로 시간 낸 거다. 네가 꼭 오라고 문자까지 보내서.”

“잘 왔다.”

여름이 유일하게 이기지 못한 사람이 태희였다. 여름이 인정하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여름이 미소 지으며 태희의 어깨를 손으로 툭 쳤다. 태희는 여름이 손을 힐끗 보고는 못 본 척 했다.

“남자 셋 여자 셋 커플 같네!”

마당에서 나온 필호가 둘러보며 재밌어했다.

원빈이 갑자기 몸을 비틀고 펄쩍 뛰고 오두방정을 떨었다.

“작가님, 커플이라뇨, 여기 어디, 어디 여자가 있어요? 너~무 너무 치욕스러워요, 남자 넷에”

원빈은 태희를 포함시켰다. 원빈은 봄과 소이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사람 둘이죠.”

원빈은 태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원빈은 태희의 짧은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에, 검정 패딩, 낡은 청바지, 오래된 배낭, 유행 지난 운동화까지 순식간에 훑고는 못 볼 걸 봤다는 듯 몸서리를 쳐댔다.

“남자 하나는 짐승에 가까워요! 수컷 냄새가 여기까지 나!”

원빈은 이번엔 봄이를 가리켰다.

“저 생기다 만 쟤는 짐승, 뇌 없는 짐승, 닭이에요, 치킨, 꼬끼오! 꼬꼬꼬꼬”

봄이 원빈을 째려봤다.

“그리 마구 입을 놀리다가 입 터지는 수가 있느니라. 오늘은 내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되겠구나.”

원빈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태희가 주먹을 쥔 채로 손등으로 원빈의 입을 ‘탁’ 쳤다. 아아아아악 원빈은 비명을 질러댔고 윗입술이 터져 피가 나왔다. 원빈은 방방 뛰며 난리를 쳤지만 태희에게 대들 용기는 없었다.

필호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는 차에 올라타려 했다. 태희가 필호의 앞을 막았다.

“작가님, 정정해 주세요.”

준과 여름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기에 말리려했지만 태희가 빨랐다.

“굳이 나누고 싶으시다면 타고난 성 말고, 노력의 결과로 구분해 주세요.”

태희는 자신과 준과 여름을 가리켰다.

“서울대생 대”

태희는 이번에는 봄과 소이 원빈을 가리켰다.

“지방대생으로 나눠주세요.”

봄과 소이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내뱉고는 못 들은 척 했다. 준과 여름은 큰 실수를 했다는 듯이 태희를 바라봤다.


기사가 운전을 하고 필호와 봄 원빈 소이는 각자 넓게 편하게 앉아 있었다.

원빈은 기사 뒤에 앉았고 그 옆에 필호가. 원빈 뒤에 소이가 앉고 필호 뒤에 봄이 앉아 있었다.

밴의 내부는 고급스럽고 넓었지만 여름과 태희 준은 맨 뒤 짐칸에 앉아 짐들을 무릎 위에 놓고 앉아 있었다. 여름과 태희 준의 얼굴만이 간신히 보일 정도였다.

필호는 뒤를 홱 돌아보고는 흥분해서 부들부들 떨었다.

“거기가 서울대 자리다! 나는 고졸이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 줄 알아? 서진호야! 더 싫어하는 게 뭔 줄 알아? 서울대 나온 서진호야!”

여름과 준이 태희를 원망스러운 듯 보았다. 태희는 괜히 헛기침만 해댔다.

이때다 싶었는지 원빈이 찢어진 입술을 만지고 태희를 노려봤다.

“작가님, 저는 지방대에 추가합격했습니다, 쟤 왕태희, 쟤가 전교 일등이었습니다. 이번에 로스쿨 가서 검사될 거랍니다. 작가님, 저 옷이 무거워요!”

“던져!”

원빈은 외투를 벗어 마구 구기더니 있는 힘껏 태희의 얼굴에 던졌다. 원빈은 십 년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았다. 태희가 옷을 떼어내며 원빈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준이 넉살좋게 말했다.

“삼촌, 이러고 있으니까 20키로 메고 행군할 때 생각나요, 그 때의 감정은...우리 같이 군대 다녀온 남자만이 알 수 있는 거죠. 그쵸?”

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필호의 신발 한 짝이 얼굴로 날아들었다.

“나는 면제다!”

소이가 웃으며 봄을 봤지만 봄은 창가에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차는 굽이굽이 강원도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림 같은 설산이 펼쳐져 있었다. 아름다운 절경이었다. 어디선가 까마귀가 울어대기 시작했다.

봄의 얼굴이 식은땀으로 흥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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