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천기누설이라니깐?
제27화 (천기누설이라니깐?)
“헉, 헉!”
두 명의 사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산자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머리는 풀어 헤쳐져 산발이 되었다. 옷은 나무에 쓸려 너덜거렸고 짐도 없었다. 히멀건한 얼굴에 땀이 가득했다. 하지만 손에 쥔 짧은 단도를 놓지 않았다. 보통 행인은 아니란 뜻이다.
“헉, 헉, 빌어먹을. 일반인이 절대 알 수 없는 길인데... 어찌 이런 일이.”
앞의 사내가 뒤에서 헐떡이며 조금씩 뒤처지며 푸념하는 사내를 향해 으르릉거렸다.
“입 닥쳐라! 밀위(密位)가 그정도를 못 견디면 어떡하나?”
“조장, 저는 틀린 것 같습···니다.”
“먹었나?”
“네. 등짝에 한 칼 당했습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정신이 혼미합니다.”
조장이라 불린 앞의 사내가 그제서야 사내의 발밑에 고인 피를 보았다.
“우리는 잡히면 안 된다. 알지?”
“네. 조장. 부디 임무를 완수하시길 빌겠습니다. 그럼.”
뒤의 사내는 손을 입에 넣어 어금니를 뽑아냈다. 그러자 기름 종이에 똘똘 말린 좁쌀만한 환약이 나왔다.
사내는 종이를 벗겨낸 뒤 환약을 털어 넣었다. 한치도 망설이는 기색이 없었다.
“큭, 황제폐하 만세만세만만···세!”
독이다. 정말 지독한 독.
숨 한 번 몰아 쉴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사내의 얼굴이 검게 변하더니 입과 코에서 시커먼 피가 뿜어져 상반신을 적셨다.
사내는 나무토막처럼 풀썩 엎어졌다. 잠시 푸르륵 떨리던 몸이 잠잠해 졌다. 즉사다.
“잘 가라. 네 가족은 태감부 밀전처에서 돌볼 것이다.”
앞에서 이를 지켜보던 사내는 다시 몸을 돌렸다. 죽은 사내는 어쩔 수 없고, 자신에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지금 자신을 쫒는 무리는 적어도 수십이다. 일대 일이라면 못 당할 이유가 없지만, 쪽수에는 장사 없는 법이다.
거기다 무리를 이끄는 덥석부리의 칼은 제법 매서웠다. 십 년 이상 특수훈련을 받아 온 자신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결국 도주를 택했고, 그 과정에서 다섯 명의 수하 모두를 잃었다. 남은 건 자신 뿐이다.
“이 깔딱 고개만 넘으면 동굴이 있지. 곰이 살던 곳이라 노린내가 가득하지만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면 누구도 찾지 못할 은신처가 있다. 다 왔어.”
잠시 중얼거리던 사내는 다시 몸을 날렸다. 일반인 키 높이의 암석을 훌쩍 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허벅지에서 피가 베어나왔지만, 사내는 아랑곳없이 종적을 감추었다.
그리고 한 참 후.
“두목.”
“아, 이 새끼. 아직도 두목이냐?”
“그럼 뭐라 불러요?”
“일 호 소정(小正, 분대장)님 이라고 하라니까!”
“일 호는 뭡니까요?”
“뭐긴 뭐야. 여포의 환생 곽 장군님께서 붙여준 본관의 명예로운 칭호지. 새끼야.”
“그건 그냥 이름 기억하기 귀찮아서 대충 붙인 거 아니고요? 나한테도 이 호라고 하셨잖습니까?”
“너, 관상을 보건데, 명이 짧겠다. 사회생활 그딴 식으로 하면 빨리 뒤져. 등신아.”
“헤헤헤, 그런데 이 자식, 날쎈데요?”
“뛰어봤자 벼룩이다. 이 산자락은 우리가 늘상 놀던 곳이야. 어디에 구멍이 있고, 어디에 개울이 흐르고, 어디에 은신처가 있는지 훤한 앞마당이다 이 말이야.”
“하긴, 장안에서 쭉 오다보면 이 산이 분기점이죠. 여기서 갈라져 위로 가면 성덕번진, 밑으로 가면 위박번진이니까요.”
“그래, 우리가 곽 장군과 소신선을 만난 곳이기도 하지.”
말을 하는 졸개나 두목이나 낯이 익다.
이사도와 곽치우가 평장사 여태곤과 함께 사신단으로 갔다가 귀가할 때 따로 떨어져 나와 가던 길. 바로 그 산에 진을 치고 있던 산적패의 두목 덥석부리 장한.
곽치우가 일 호라고 이름을 붙인 그 사내였다. 손을 비비고 있는 사내도 마찬가지, 이 호였다.
그런데 이들은 성덕번진까지 짐꾼처럼 부리다가 결국 평로치청 군에 들어가지 않았나?
왜 다시 이 산에 출현한 것인지.
“참, 귀신같지 않냐?”
“뭐가 말입니까요?”
“소신선 말이다.”
“아! 이 공자님 말씀이구나.”
.
“그래, 이번에도 마치 쪽집개처럼 맞추셨어. 저 새끼들이 이 길로 올 것이라고, 절대 놓치지 말고 주살하라고, 그리 명하실 때만 해도 설마 했는데, 진짜 오네?”
“우리 애들 열 명이나 죽었어요. 일 호 소정 두목.”
“까마귀 고기를 처 먹었냐? 하나만 해라. 일 호라고 하던가. 소정이라 부르든가. 두목은 빼고 새끼야.”
“이놈 말입니다. 끝내 우리 포위망을 뚫고 도주했어요. 이놈에게 다들 썰렸어요. 존나 쎄단 말입니다.”
“흐흐흐, 살쾡이 발톱은 넓은 곳에 있을 때 무서운 거다. 하지만, 구석에 몰리면 고양이와 다를 바 없어.”
“거기 있을까요?”
“당연하지. 놈도 나에게 한 칼 먹었어. 비록 허벅지에 얕게 들어갔지만,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할 거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누구나 치료하고 쉴 곳이 필요하기 마련이야. 거기 짱박혀 있을 게 틀림없어.”
“놈이 거길 알까요?”
“아까 안 봤어? 한두 번 이 산을 타본 놈이 아냐. 정확히 산세를 읽고 튀었어. 그런 놈이 그 곳을 모를 리 없지.”
일 호 소정은 자신의 박도를 당겨 거기 묻은 피를 맛보며 씨익 웃었다.
***
저벅저벅-
“······!”
투두두둑-
처음에는 한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 들리더니 곧 이어 상당한 무리들이 합류한 듯 발에 자갈 밟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
그래도 밀위 조장은 미동도 없이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숨소리가 새어나갈까봐 호흡을 조절했다.
그때.
“어이, 힘들텐데 그만 나오지?”
“······.”
“그래. 그 안쪽에 작은 굴이 또 있다는 거 잘 알고 있어. 나도 한때 거기에 비싼 물건을 짱박아 두곤 했거든. 오래 전에 다 뺏기고 없지만. 씨발, 생각하니 조금 아깝네.”
“······.”
“야, 분위기 파악 좀 하고 살자. 너 들켰어. 거긴 막힌 곳이야. 더 갈데가 없다고, 병신아.”
틀렸다. 좁은 입구를 막아 둔 돌 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횃불을 밝힌 것이다.
밀위 조장은 암담한 심경이었다. 자신이 죽는 건 아무렇지 않다. 그렇게 훈련 받아왔다. 그러나 임무를 달성하지 못하면 개죽음이다. 그게 두려웠다.
“아, 그 새끼. 진짜 분위기 파악 못하네. 너 고자지?”
“헙!”
“그래, 새끼야. 고추 없고 수염 안 나는 환관이란 것도 다 알고 왔어. 그러니 그만 고생하고 나와.”
표적이다. 그냥 산적 나부랭이가 아니라 정확히 자신의 정체를 알고 기다렸다는 말이다.
밀위 조장은 화급히 소매 안쪽에 꿰메어둔 주머니를 쥐어 뜯었다. 또 최근 구입한 석류황을 꺼내 불을 붙이려고 시도했다.
소각해야 한다.
주머니에는 황제가 위박번진의 전승사에게 보내는 밀서가 들어있다. 이 걸 뺏기면··· 모든 게 끝이란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한번만 당겨도 불이 붙는 석류황이지만 손끝이 떨려 제대로 당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끝내 밀서를 소각하지 못한 채 자신의 배를 내려다 보았다.
푹!
자신의 복부를 뚫고 들어온 싸구려 박도가 보였다. 온몸으로 개미가 기어가는 것같은 통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와르륵-
그리고 좁은 입구를 막고 있던 돌 무더기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찿았다. 이 고자 새끼.”
덥석부리 사내의 험상굳은 얼굴과 배를 관통한 박도를 쥐고 있는 손도 보였다.
“에고. 너 죽으면 안 되는데. 야, 이 호야! 이 새끼 들어내라. 빨리 약초 발라. 참, 이새끼들 어금니에 독단 숨기고 다닌다더라. 고것도 빼라. 뒤지면 안 돼. 알지?”
밀위 조장은 이 순간이 믿기지 않았다. 꼭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허허 웃움이 나왔다.
퍼억-
“미친 새끼. 왜 실실 쪼개고 지랄이야. 너랑 밀서를 확보하지 못하면 이 공자님이 곽 장군에게 이를 거고, 그럼 우리 애들 다 지옥을 맛본단 말이다.”
“두목, 이 놈, 칼을 너무 깊이 먹어서 뒤질 거 같은데요?”
이 호의 말에 화들짝 놀란 일 호가 밀위 조장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야! 안 돼! 숨 쉬어. 내가 미안하다. 너무 깊이 찔렀지? 숨 쉬라고, 새끼야!”
절박한 일 호의 목소리가 동굴 천장에 부딪쳐 웅웅거렸다.
***
구 만 대군이 움직이는 건 쉬이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다.
장장 이십 리 관도를 가득 채운 병사들. 그들이 들고 있는 병장기가 햇볕에 반짝거렸다.
그 병사들의 뒤를 따르는 무리도 만 명에 육박했다.
보급대다.
구 만 대군이 먹을 군량과 고기, 전투 중 보충해 줄 화살과 창검, 하다못해 토시와 각반에 갑옷까지, 모든 보급품이 수많은 수레에 실려 이동하고 있었다.
“보급을 상단에게 맡긴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어. 참으로 기막힌 발상 아니오?”
“네. 병마사 장군. 소장 역시 이제껏 꿈도 꾸지 못했습네다.”
“군사들이 보급품을 지고 행군하는 것에서 해방된 것만 해도 큰 짐을 덜었소. 거기다 매끼 식사까지 다 저들이 제공해주니 널럴하외다.”
“돈이디요. 쩐이 남아 도니까네 그럴 수 있지비. 덕분에 재무총실이 만세를 불렀다는 소문이 있습메다.”
“설마···?”
“고 돈쟁이 종간나 새깽이들, 눈이 퀭해가지고 못 볼 지경이었슴둥. 기존 열 명이 못 쳐낼 지경이라 오십 명으로 늘렸어도 달 포에 한 번 퇴청을 시킨다고 함메.”
“으윽, 그 곰팡네 나는 서책을 밤낮없이 끼고 살라면 나는 도망갈 거요.”
“넵, 소장이라믄 재무총감 모가지를 쥐어 틀던가, 재무총실에 불을 질렀을 겝네다.”
“하여튼 사기가 드높소. 이 모든 계획이 한 사람 머리에서 나왔다는 게 놀랍소이다.”
“어라? 이제 병마사 장군도 그짝으로 붙었습네까?”
“험, 험, 뭐 붙었다기 보다. 거기서 항상 꿀이 흐르니까 살짝 관심을 가지는 것 뿐이외다.”
“그건 그렇고, 꾀주머니에게 받은 서책 내용, 정녕 안 깔 겁네까?”
“어허, 천기누설을 하라고? 안 될 말이오.”
“에고. 내래 모르갔습메다. 친위군과 중앙군은 주군의 등만 보고 돌진할 거이니 나머지 부대는 병마사가 알아서 하기오.”
“허허허, 믿으시오. 곽 장군. 내 살아 생전 이토록 정밀하고 대담한 병술을 본 적이 없어요.”
“일 없습네다. 지금 누가 무신 말을 한들 병마사 귀에 들어오디 않을 거인데··· 승리만 보장된다믄 내래 고만이디요.”
“승리는 당연한 거고, 최대한 병력 손실 없이 이기는 것, 이게 더 중요한 겁니다.”
“고 책에 그런 방법도 있다 이 말임둥?”
“어허! 천기누설이오. 더 알면 다칩니다.”
척후 부대의 보고에 의하면, 아직 전방의 적들은 쥐죽은 것처럼 조용하다.
이미 위박번진 영역으로 들어섰다. 조금 더 전진하면 위박 절도사부가 있는 덕주 외곽에 세워진 절리성이 나올 것이다. 그럼에도 위박번진 병졸 한 명 보지 못했다.
“야들 군기가 엉망 아님네까? 절리성이 넘어가믄 바로 덕주 본진인데 이토록 외곽 경계가 허술한 거이 이상함메다.”
“허허허, 그럴 것이오. 이것도 이 공자가 안배한 것이니 편히 갑시다.”
“엥? 고거이 무신 말입네까?”
“천기누설이외다.”
“끄응. 그놈의 천기누설.”
그 시간.
절리성에서는 만금상단 왕 행수가 보낸 사람과 절리성주가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정말이오?”
“거짓을 고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구, 구 만 대군? 언제 그만큼 커졌지?”
“그게 문제가 아니죠. 반 나절이면 성문 앞에 당도할 겁니다. 여기 절리성 삼천 명으로는··· 에잉, 안 된 말이지만, 시신이 가득할 거예요. 성주도 그 시신 속에 누워있을 터이고.”
“허어, 왜 그리 외곽 경비 초소들을 철수시키라고 요구 했는지 겨우 이해가 되오. 처음 밀염 상단이 지나간다고 했던 건 핑계였어. 염상은 평로치청과 손을 잡은 것이구려.”
“그건 나중에 따지시고, 시간이 없어요. 성주. 내 그동안 우리를 도와 준 성주가 걱정되어서 달려온 겁니다.”
“어쩌란 말이오. 빨리 파발마를 뛰워 덕주성에 이 사실을 알려야 겠소.”
“오만 냥을 준비했습니다. 마차로 하나 가득이지요.”
“왜···?”
“다 버리고 그냥 튀십시오. 그 돈이면 자손 대대로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습니다. 괜히 힘빼다가 창대에 머리 달리는 것보다 그게 낫지 않습니까?”
“오만 냥이라··· 엄청난 돈이오.”
“네. 왕 행수께서 그러셨습니다. 위박 절도사 전승사의 운명은 여기까지라고. 너무 백성을 돌보지 않으셨어요. 황실의 일원이 되었다고 주변 번진을 무시했고요. 생각해 보십시오. 이 상황에서 누가 도우러 오겠습니까?”
“흐음. 평로치청 이정기 절도사라면, 인망이 높지요. 거기다 구만 대군, 도저히 헤어날 방법이 없겠구려.”
“성주, 튀십시오. 내 수문장에게는 알아서 따로 약을 듬뿍 칠 터이니 성주는 냅다 마차를 몰고 가면 됩니다. 이제 절리성 쪽으로는 오줌도 누지 말고 돈 펑펑 쓰면서 노후를 보내십시오.”
절리 성주는 남문을 열고 도망쳤다. 그리고 수문장은 성주가 나간 남문을 활짝 열어 젖힌 채, 이정기를 맞이했다.
그때까지도 덕주의 절도사부에서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곧 턱밑으로 칼이 들어온다는 사실도.
썩은 조직은 항상 내부에서 붕괴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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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한국인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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