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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린버터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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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렛
작품등록일 :
2024.07.19 13:39
최근연재일 :
2024.09.10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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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3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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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궁창 왕자 7

DUMMY

태초의 마법사 이후 모든 마법사는 태어날 때부터 고유의 색을 가졌다.


붉은색, 주황색, 초록색, 푸른색.


그리고 흰색.


이 다섯가지 색깔은 마법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색이었다. 절대 변하지 않는 불변의 빛깔. 마나는 각 색마다 고유의 특성이 있었는데, 마나를 정제하고 발현하는 과정에서 체내 영향을 받는 까닭이었다.


붉은색은 상대의 마나를 불사르는 성질을.


노란색은 누구보다 빠른 속도를.


파란색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을.


초록색은 어떤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흐르는 부드러움을.


흰색은 본래의 형상으로 되돌아가는 힘을 가졌다. 워커도 소서러도 마나를 사용해 이적을 일으킨다는 본질은 같았기에 큰 차이가 없었다. 단지 이따금 소수의 마법사들 중에서 극히 드물게 고유의 색을 가진 이들이 나타났다.


태초의 마법사 루에르그와 다섯 가지 색으로 나뉜 그의 다섯 제자들과는 다른.


그 어느 색에도 속하지 않은 이교의 순례자들.


고유의 색을 가진 그들은 신을 믿지 않았다. 모든 마법사들의 시조이자 다섯 가지 색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무색의 마법사인 루에르그의 신앙을 거부했다. 마법이란 학문의 체계를 정립한 그의 다섯 제자와 별자리도, 그를 숭상하던 수많은 후예들도 불신했다.


정해진 길이 없었기에 항상 자신만의 길을 찾았다. 스스로를 마법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구도자로 여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면의 신념을 관철했다.


쓰러지지 않고, 굴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훗날 사람들은 고유의 색을 가진 그들을 이렇게 불렀다.


자신만의 별을 쫓는 자.


스타 시커(Starseeker).


***


일직선으로 날아간 자색의 검기는 또렷한 흔적을 남겼다. 눈과 함께 녹아내린 땅바닥이 선명했다. 어깻죽지가 깊게 베인 늑대가 쓰러져 연거푸 피를 토하고 있었다. 흔들리는 맹수의 푸른 눈동자에 처음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의문이 어렸다.


채 사라지지 않은 보라빛 입자가 허공에 녹아내렸다. 거대한 검이 내려찍은 듯한 공터에는 군데군데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와 숨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이 자리의 누구도 눈앞의 일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빛이 터졌다. 자색의 검기가 쏘아졌다. 늑대가 나가 떨어졌다.


돌아보니 그곳에 소년이 서 있었다. 찬란한 자신만의 광채를 손에 쥐고서.


“죽고싶지 않으면 일어나! 도망치면 결국 죽는다. 살고 싶으면 검을 들어! 여기가 뚫리면 바로 시민들이 사는 도시다!”


소년의 높은 목소리가 차가운 설산 가득 퍼져나갔다. 깊은 적막을 깨트리는 맑은 울림에 분대원들이 저마다 정신을 차렸다.


“검기...? 검기를 날렸다고....”


“마법사다, 2위계 마법사야. 우린 살았다고!”


“스타 시커...!”


혼란스러웠던 일대의 공기가 단박에 변했다.


“빨리빨리 일어나 새끼들아! 언제까지 병신같이 주저앉아 있을 거냐. 못해도 한방은 먹여야 될 거 아니야!”


용병 중 하나가 아직 쓰러져있던 이들을 향해 일갈했다. 도망치려던 용병들과 병사들이 희망을 얻고 일어났다. 오직 하나, 절로 시선을 사로잡는 찬란한 빛 때문이었다. 소년의 보랏빛 광채가 흐르던 기류를 바꾸고 있었다.


“마법사... 왜...?”


차프 대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흐릿한 시야에서도 은빛 칼날을 휘감은 보랏빛만큼은 생생하게 보였다. 다섯 가지의 마나색 그 어느것에도 포함되지 않은 고유의 색. 분대원들이 바뀐 것보다도 그는 단순하게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순수한 마나의 결정체인 검기를 방출할 수 있는 건 2위계 마법사부터다.


있을 수 없는 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법사가 아니라는 소년의 말을 믿었다. 외려 끝까지 의심하며 캐묻는 자신의 상관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당연했다. 소년의 나이는 후드에 가려져 있었지만 얼핏 보기에 십대 초반으로 보였고, 브라알라스에서도 한손에 꼽히는 기사들도 보통 십대 중반에 마나를 각성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니까 마법사가 아니라는 소년의 말에 실망하지 않았다. 마땅한 일이라고 받아들였다. 실전에 들어가 홀로 늑대의 촉수를 베어내며 가장 큰 전공을 올릴때조차도 그랬다. 검을 잘 쓰는구나, 재능이 있구나. 그 이상의 감흥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겉으론 불신을 거두면서 저 망할 늑대를 코앞에 둔 순간까지 소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던 자신의 상관의 말이 맞았다. 소년은 마법사였다. 저 어린 나이에, 순수한 마나의 결정체인 검기를 쏘아내고, 그것도 모자라 고유의 색을 지닌 스타 시커.


손발이 벌벌 떨렸다. 공포와는 다른 무언가가 속에서 올라왔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년은 차프 대위를 대신해서 분대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정신을 잃은 차프 대위를 대신했다.


“촉수에 쓰러진 사람들을 먼저 안전한 곳으로 옮겨! 차프 대위도, 용병 분대장 둘도 피신시켜라.”


분대원들이 아픈 몸을 이끌고 리안의 명령에 따랐다. 쓰러지고 실신한 이들이 질질 끌리다시피 후방으로 옮겨졌다.


“아직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무기를 쥐어라! 방패는 앞으로 나오고 검사와 궁수는 한발짝 뒤로 빠져!”


결의에 찬 얼굴로 용병들과 병사들이 걸어나왔다.


“촉수는 사라졌다. 마법을 쓰긴 하지만 그 뿐이야. 조금이라도 좋으니 최대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시선을 끌어! 저 놈의 목은 내가 벤다.”


남은 전력은 절반 남짓.


처음 47명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했으나 그 차이를 덮을 만큼 리안의 빛은 압도적이었다. 말을 마친 리안이 약간 들뜬 숨을 느릿하게 갈무리했다. 용병들이 절뚝거리며 다시금 전열을 재정비하는 동안 검날을 휘감은 자줏빛의 마나를 내려다보았다.


순수한 마나의 방출과 흡수가 자유로운 2위계 마법사.


제프의 조언이 무색하게 검기를 날렸다. 최초로 마나를 사용한 게 8살이었으니 새삼스러울 일도 없었다. 5년동안 리안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고, 그 사건 사고들은 단순한 검술 실력 뿐만 아니라 마나의 운용 방법도 늘려주었다.


가르침보다는 본능에 가까웠다. 타고난 영감과 재능이라는 이름의 등불이 리안을 앞으로 이끌었다.


마나를 드러내지 않고 도망친다는 선택지도 있었으나 리안은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든 전력을 다해 늑대를 쓰러트리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쯤 잠에 들었을 제프와 잭 때문에.


아니면 또다시 무참하게 죽어갈 무고한 사람들을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자기 합리화에 입술 사이로 절로 자조가 흘러나올 무렵, 쓰러져있던 늑대가 낮게 신음하며 몸을 일으켰다. 검기를 정면에서 맞았음에도 놈은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피를 흘렸으나 그게 다다. 촉수가 전부 베여 다시 돋아나지 않음에도 저 빌어먹을 재생력은 굳건한 모양이었다.


리안이 검을 다잡았다. 늑대가 낮게 그르릉거리면서 이쪽을 노려보았다. 새파란 안광과 함께 쏟아지는 눈빛이 살벌했다. 리안은 저 푸른 눈동자에서 자신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살의를 느꼈다.


놈의 주위로 눈발이 휘몰아쳤다. 요동치는 마나의 흐름이 전해졌다. 아까와 같은 폭풍. 그러나 조금 달랐다.


리안은 겁먹지 않았다. 소스라치지도 않았다. 차프 대위는 실패했지만 그의 말대로 늑대는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무리하고 있는 거 다 알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음에도 사용하지 않았다. 촉수가 전부 베여나가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발악하듯 최후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엘도르 기사단장에게 치명상을 입고서 모종의 이유로 사용할 수 없었다는 방증.


리안은 몸을 낮게 숙였다. 저건 놈이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여 꺼낸 마지막 한 수였다. 그리고 그건 리안도 마찬가지였다.


검기의 출력을 평소보다 더했다. 검의 내구도 때문에서라도 베는 순간 아주 잠깐 마나를 불어넣었던 평소와는 다르다. 노인이 준 이 검이 그간의 롱소드와는 다르다고 한들 자신의 마나를 어디까지 버텨줄 지는 미지수였다.


마나의 총량도 그랬다. 마법사들은 대기의 마나를 받아들여 사용하지만 체내에서 이뤄지는 정제 과정이 무한한 것은 아니다. 한계까지 끌어서 사용하면 아무리 정신력이 뛰어난 마법사라도 마나 고갈로 기절할 수 있었다.


아직 덜 여문 몸뚱아리와 언제 부러질지 모르는 검.


배 부근에 치명상을 입고 촉수가 전부 잘려나간 늑대.


버티는 쪽이 이긴다.


쿠구구구구구.


지축이 흔들렸다. 눈의 폭풍이 시계를 어지럽혔다. 시린 냉기가 사방에 뻗어나갔다. 기습적으로 튀어나온 바람의 칼날은 그래서 더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방패를 든 용병들이 고함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나무 표면을 긁어대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울렸다. 몇몇은 엎드린 채로 검을 머리 위로 세웠다. 접근할 수가 없었다.


리안은 침착하게 무형의 칼날을 쳐냈다. 소년의 그림자가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절반으로 줄어든 분대원들에게 많은 것을 바란 건 아니었다. 그저 놈의 마법이 살짝이라도 분산된다면 그걸로 족했다.


리안을 직격하던 칼날들이 목표를 잃어버리고 애꿎은 나무를 베어냈다. 가면 갈수록 쏟아지는 칼날이 늘었다. 그럼에도 단 하나도 리안에게 닿지 않았다. 보랏빛 검날에 형태를 잃어 스러졌다.


키이이잉—


사방의 소리가 멀어졌다. 동시에 이질적인 소음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급격하게 좁아진 가시거리에서도 리안의 두 눈은 놈의 흐릿한 윤곽을 놓치지 않았다.


고유의 색을 가진 스타 시커들의 마나는 다르다. 공통적인 성질을 가진 다섯 색과 다르게 제각기 선천적인 특징을 자랑했다. 리안에게 있어 자신의 보랏빛 마나는 나아가는 힘이었다.


더 정확히는 절단, 가로막는 것을 베어내는 힘.


카가가가각!


자주색 불꽃이 타오르면 타오를수록 칼날이 갈려나간다. 짓쳐드는 바람의 폭풍도, 무형의 칼날도 마찬가지다. 리안은 바람을 뚫고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지척에서 기다린 그림자가 고속으로 휘둘렸다.


발보다 리안의 움직임이 빨랐다. 검을 틀어쥔 리안의 오른팔이 흐릿해졌다. 한 호흡에 두 번. 부드럽게 이어진 두번의 검격이 피를 쏟아낸다.


마나가 실린 검날은 손쉽게 늑대의 피륙을 갈랐다. 궁수들의 화살도, 병사들의 칼날도 박히지 않는 단단한 가죽은 리안의 검기 앞에서 무력했다. 놈이 몸부림치며 포효했다. 밟고 있던 지면이 뒤틀려 튀어올랐다.


칼자루를 두 손위로 쥔 리안이 땅을 디딘 늑대의 네 다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소년이 스쳐갈 때마다 하얀 눈 위로 새빨간 짐승의 핏물이 치솟았다. 상처가 늘어날수록 울음 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리안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키에에에엑!


한 번.


단 한 번이면 끝난다.


정면으로 들이대 이빨에다 검을 틀어박고 힘싸움을 할 수는 없다. 놈의 반응속도는 어지간한 워커들보다 빠르다. 리안이 가진 이점은 작은 체구였다. 시야각 바깥에서 속도라는 장점을 살린다면 유리하게 싸움을 이끌어 갈 수 있었다.


리안은 한결같이 오래된 피가 말라붙은 배 부근의 검붉은 털을 쫓았다. 다리와 땅 사이의 배 안쪽으로 들어갈까. 검을 찔러넣을수만 있다면 확실하게 승리할 수 있다. 단지 협소한 공간과 혹시 모를 마법을 사용한 자폭을 염두했다.


놈이 이상 행동을 보인 것도 그때였다. 눈보라를 일으키던 바람이 전방위로 대기를 밀어냈다. 닫혀있던 시계가 확 걷혔다. 바람의 칼날을 막아내던 분대원들이 돌풍에 밀려났다.


리안은 땅에 칼을 박아넣고 버텼다. 어느새 놈은 높에 뛰어 공터를 벗어나고 있었다. 도주하는 방향을 따라 붉은 선이 길게 이어졌다. 필사적으로 일어난 용병들이 외쳤다.


“도망친다!”


“저 개같은 새끼!”


“잡아! 아래로 내려가면 도시다!”


“움직이지 마!”


그들을 말린 건 리안이었다. 소년의 일갈이 분대원들을 멈춰세웠다.


“부상자를 먼저 수습해! 천이 있으면 상처를 지혈하고, 몸 상태가 양호한 사람들은 외투를 대신 벗어 증원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기, 기다리라고?”


“증원이라니. 도시에는 누가 내려가는데?”


“케빈 소위!”


얼빠진 표정으로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는 케빈 소위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바보같이 멍 때리지 말고 빨리 움직여! 당신이 차프 대위 다음의 상급자잖아. 할 일을 해!”


“늑대는....”


“나 혼자면 충분해. 나머지는 방해다.”


“방해? 아니, 나도...!”


이를 악문 케빈 소위가 부들거리면서 두 다리를 세웠다. 리안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소년은 벌써 붉은 선을 따라 늑대를 추격하고 있었다.


하늘 높이 날던 조명탄이 빛을 잃어버리고 꺼졌다. 케빈 소위의 허망한 눈길이 어둠 너머를 응시했다. 반대로 리안은 빠르게 산을 내려갔다. 오르는 길보다 내려가는 길이 더 어려웠다.


캄캄해진 주위, 푹푹 빠지는 눈바닥.


눈덮인 산을 내려오면서 리안은 한 노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장난기 많은 성격의 여관 주인을 떠올렸다. 소년은 사람을 믿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준 이들을 내칠 정도로 모질지도 않았다.


노인은 마리가 죽은 이후 처음으로 리안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었다. 여관 주인인 잭도 그랬다. 그러니 잡는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그들을 위해서.


거짓말이다.


쿵!


순간 가공할만한 충격이 옆구리에서 느껴졌다. 폐속의 공기가 확 빠져나왔다. 달빛마저 희미한 설산의 풍경이 마구잡이로 뒤집혔다. 몇번이고 눈바닥을 구른 리안이 숨을 몰아쉬었다.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팠다. 검신의 진동이 팔뚝까지 타고 올라왔다. 반사적으로 검을 치켜들지 않았다면 방금 전 공격으로 즉사했을 것이다. 마나로 강화한 오감에 집중하고 있던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조명탄의 강렬한 빛에 노출돼 암순응이 풀린 눈으로도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무언가가 보였다. 두리뭉실한 윤곽만 봐도 정체를 유추할 만했다.


“일부러 도망쳤구나... 나를 유인하려고....”


리안은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억지로 채찍질했다. 검을 지지대 삼아 가까스로 몸뚱이를 일으켰다. 웃으면 안 되는데, 자꾸만 헛웃음이 나왔다.


“그르르르르....”


“그래... 너도 살고 싶겠지.”


리안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자꾸만 다리가 비틀거렸다.


이제 와 도망칠 수는 없었다. 리안도, 저 늑대도. 등을 내보이는 순간 공격을 허용하고 죽는다. 살기 위해선 눈앞의 적을 쓰러트려야 했다.


그런데 왜일까. 이성과는 다르게 본능은 죽음을 종용했다. 편안한 안식을 원했다.


할 만큼 했잖아.


시선을 내리자 오른손의 빛이 꺼져 있었다. 검의 불꽃은 사그라들었으나 리안은 이를 악물고 의지를 장작삼아 불을 피워냈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보잘것없는 자줏빛 검기가 솟아올랐다.


열 걸음.


리안과 늑대 사이의 거리였다. 둘은 서로의 목숨을 놓고 숨을 갈무리했다. 당장이라도 노릴 수 있는 빈틈을 찾았다. 곧바로 튀어나가 목덜미를 물어뜯을 수 있도록.


“...그래도 마무리는 해야지.”


리안은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중얼거렸다. 리안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직 할 일이 있었다.


리안은 거리를 가늠했다. 머릿속으로 검로를 그렸다.


먼저 달려든 건 늑대였다.


콰앙!


새하얀 늑대는 첫 조우때와 달리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속도는 줄지 않았다. 그건 마치 꺼지기 직전 가장 큰 불꽃을 피워내는 촛불과도 같았다.


마법도 쓰지 않았다. 도망치기 직전 사용한 돌풍이 마지막 마법이었던 듯했다. 그건 리안도 마찬가지였다. 몸도, 정신도, 마나도, 검도 이게 마지막이다.


거대한 아가리가 리안의 앞에서 쩍 벌어졌다. 피로 얼룩진 송곳니가 희끄무레한 달빛에 비쳐 번들거렸다. 리안은 최후의 최후까지 기다렸다가 입 안 깊숙한 곳으로 팔을 뻗었다. 피부가 꿰뚫리는 감촉과 함께 늑대의 거구가 리안을 뒤의 나무까지 밀쳐냈다.


쿵!


흔들리는 나뭇가지 아래로 쌓여있던 눈이 떨어졌다. 차가운 눈송이가 뺨에 닿아 사라졌다. 리안은 그 냉기를 느낄 수 없었다. 아득한 의식과 더불어 오감이 한없이 멀어졌다.


늑대의 푸른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크게 떠져 있었다. 놈은 고통에 신음하지도 않고 리안을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숨통을 조여왔다. 목덜미에 칼이 꽂힌 채로 그랬다.


항거할 수 없는 압박 속에서 리안은 칼자루를 비틀었다.


콰드득!


손 끝에서 무언가 걸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늑대의 눈동자가 한번 흔들렸다. 흔들린 눈동자는 이내 빛을 잃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짓누르던 압력이 사라졌다. 리안이 간신히 칼을 밀어넣는 동안 끝내 버티지 못한 늑대가 쓰러진 것이다.


리안은 피투성이가 된 채로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사지 곳곳에 성한 곳이 없었다. 극한의 긴장이 탁 풀리지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눈꺼풀이 지독할 정도로 무거웠다.


리안은 말을 듣지 않는 목을 움직여 간신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 꼭대기에는 수많은 별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리안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뻗은 손으로, 저 먼 은하수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잡았다는 착각은 찰나일 뿐, 말아쥔 손을 풀자 신기루처럼 흩어져버렸다.


“아....”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은 그저 죽기 위한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라고.


위험을 감수하고 마나를 내보인 건 그 때문이라고.


제프는 마리가 죽은 뒤 처음으로 리안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었다. 잭도 겉으로는 툴툴거리지만 은근히 자신을 걱정하고 챙겨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5년에 가까운 시간은 긴 시간이었다. 적어도 아이가 소년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어느 순간부터 살인에 무덤덤한 자신이 있었다. 아니, 살인에 무덤덤해진게 아니다. 그보다는 망가졌다고 표현하는 게 옳았다. 의식하기 전부터 쌓여왔던 살인은 리안의 정신을 천천히 좀먹고 있었다.


데릭과의 약속도 그랬다. 머리로는 그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하루에도 수십번 생각하지만 리안의 냉철한 이성은 아니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는 우직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가문이 망할 때까지 싸웠을 가능성이 높았다. 자신의 목숨을 불사르면서.


마리는 행복하게 살라고 말했지만 결국 리안은 그렇지 못했다. 평생을 함께할 줄 알았던 그 유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월의 풍파를 맞아 점점 희미해졌다.


리안은 지쳐 있었다. 언젠가 찾아올 막연한 죽음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하아....”


가느다란 날숨이 하얀 입김이 되어 흩어졌다. 여러 상념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 어머니, 가문의 사람들, 친누나와 다름없던 마리.


운명과도 같았던 데릭과의 만남. 그와 함께한 소중한 시간들. 자신을 위해 검을 만들어 준 대장장이 제프. 매번 의뢰를 해결하고 돌아올 때마다 걱정하던 여관주인 잭.


최후의 순간에 죽음을 받아들이자 차디찬 눈바닥이 포근한 이불처럼 느껴졌다. 리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저벅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희미한 달빛 사이로 타오르는 새빨간 머리카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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