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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담(張譚) 의 이야기 세상

암천제

웹소설 > 작가연재 > 무협

장담(張譚)
작품등록일 :
2009.04.15 19:43
최근연재일 :
2009.02.07 20:07
연재수 :
8 회
조회수 :
372,374
추천수 :
83
글자수 :
31,837

작성
09.02.05 20:16
조회
42,110
추천
14
글자
10쪽

암천제- 백일 후...

DUMMY

.


궤 안에는 한 권의 책이 들어 있었다.

실망과 호기심이 동시에 느껴졌다.

남의 것에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도 서원을 고칠 욕심에 내심 돈이 될 만한 것이 들어있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평범해 보이는 책 한 권이라니.

한편으로는, 무슨 책이기에 시신으로 변한 자가 천장에서 죽어가면서도 악착같이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등을 비춰 안을 살펴보다가, 천장에서 그가 쓴 몇 글자를 발견하기는 했다.


-빌어먹을! 원주라는 놈을 잡아 글자를 해독하려고 이천 리 길을 달려왔거늘, 천하의 초부생이 공력을 잃고 냄새나는 천장 속에서 쥐새끼처럼 죽어야 하다니...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책의 내용을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책을 노려보다 천천히 겉장을 펼쳐보았다. 그러나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은 전자체로 쓰여 있었다. 묘한 신기가 느껴지긴 하는데, 결코 달필이라 할 수는 없었다.

글자의 수는 모두 일천 자. 책의 장수라고 해 봐야 겨우 열 장에 불과했다. 게다가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한데 이상했다. 시신으로 변한 자가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 아닌가.

은근히 오기가 생겼다. 하남에서 다섯 손가락에 들어간다는 자신이 기껏해야 일천 자에 불과한 내용조차 파악을 못하다니!

그때부터 그는 서고를 정리하는 것도 미루고 책자의 내용을 알아내기 위해 모든 심력을 쏟았다.

하루 이틀.... 한 달...

그는 잠자는 것조차 줄이고 책만 바라보았다.

그렇게 석 달, 볼이 홀쭉해지자 사람들이 그의 건강을 염려하기 시작했다.

한데 백일이 넘어간 어느 날이었다.

멍하니 책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코피가 쏟아졌다.

그는 다급한 마음에 소맷자락으로 피를 닦아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떨어진 피가 종이 깊숙이 스며든 후였다.

스며든 피로 인해 반대쪽의 글씨가 보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

일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반 사람이라면, 아니 어느 정도 글을 공부했다는 자도 자신이 본 것을 허투루 넘겼을지 몰랐다. 반대쪽의 글자는 거꾸로 보였고, 그나마도 서너 글자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매일 책자를 뚫어지게 바라본 그의 눈에는 앞뒷면의 글자가 하나로 연결 되어 보였다.

그는 ‘설마?’ 하면서도 앞면의 글자 사이에 뒷면의 글자를 하나하나 끼워서 읽어보았다.

당장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하나 만큼은 분명했다. 앞뒷면의 글자가 사이사이에 끼워져야 제대로 된 문장이 된다는 것.

희열에 찬 그는 그날부터 이어진 문장을 해독했다.

하나 문장이 이어졌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대충 내용을 살펴보니 의학에 대한 것 같기도 했고, 선도의 비법에 대한 것 같기도 했다.

글은 열 자 정도가 하나의 문장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익힌 순수한 학문과는 너무 동떨어진 내용이어서 한 줄을 해석하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더구나 그 뜻 자체가 고승들의 선문답처럼 너무 난해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포기하기에는 지난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그는 마음을 다잡고 좀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 글을 해석하기 위해서 의서도 찾아보고, 도가의 학문에 대한 것도 새롭게 공부하고 불경에 대한 것도 독파했다.

한데도 때로는 그 내용이 너무 허무맹랑해서 자신이 제대로 해석한 것인가 의문이 일 정도였다.

그렇게 삼 년, 그가 무제의 책에 대한 해독을 반쯤 마쳤을 때, 산서에 사는 친구가 지나가는 길이라며 들렀다.

그는 그 친구에게 자신이 발견한 책에 대한 것을 넌지시 이야기했다.

어쩌면 술기운에 자랑을 하려 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 백운서원을 일으켜 세우겠다고 해놓고도, 손을 놓고 지낸 지난 세월에 대한 변명을 하려 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아주 괴상한 책이었지. 글자는 일천 자 밖에 안 되는데, 해독하려고 삼 년이나 고생했다네, 허허허.”

단 어떻게 비밀을 알아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알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비밀이 아닌가. 그걸 가지고 석 달 이상 고생한 것이 친구 눈에는 멍청하게 보일지 몰라 망설여졌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 친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자신에게 책을 한 번 보여달라고 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의 실수를 자각했다.

단순한 책이 아니라 사람의 죽음과 연관된 책이다. 자칫하면 피를 부를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말이다.

그는 고민 끝에 책을 보여주었다. 어떻게 내용을 알아냈는지만 말해주지 않으면 상관없을 거라 생각하고서.

친구는 한참 동안 그 책을 읽어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내려놓았다.

친구가 돌아간 그날 저녁, 그는 많은 망설임 끝에 그 책을 태워버렸다.

그리고 이 년 후, 모두가 잠든 시각, 강호의 고수들이 백운서원을 찾아왔다.


“그 친구는 태원에 살았지. 집에 돌아가서 자기가 외운 것과 내가 말해준 몇 마디를 옮겨 적은 모양인데, 그 친구는 이 년이 지나도록 글의 내용을 해독할 수 없자 제왕성의 사촌동생을 찾아갔나 보더구나. 그리고 열흘 후... 죽었지. 내가 끌려오기 사흘 전에 말이다.”

말을 맺은 유백하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자신으로 인해 친구까지 죽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런데 어떻게 성에서 그게 천자무서인 줄 안 것이지?”

“내가 말해준 몇 마디 때문이었다. 선도의 비법 정도로 생각했던 그것이 알고 보니 무공구결이라 하더구나.”

두 사람이 알면 그것은 이미 비밀이 아니다.

비옥 십팔호실에서 살아온 독고무령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 동안 이곳에서 죽어간 사람들 대부분이 입을 함부로 놀렸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의 판단으로는, 유백하가 이곳으로 끌려오고, 유백하의 친구가 죽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진짜 중요한 비밀은 절대 자신 외에는 알아선 안 된다고, 아버지가 그랬지.’




***




어둠이 물러가면 새벽이 오듯,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렀다.

비옥 십팔호실의 공기도 후덥지근해졌다. 유월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그날 오후, 비옥 십팔호실의 공기는 유난히 무겁고 축축했다.

꼭 더위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장마비가 사흘 째 내리고 있어서만도 아니었다.

마지막 글자를 마무리 짓고, 붓을 내려놓은 유백하가 말한다.

“허허허, 벌써 백일이 되었구나.”

그랬다. 유백하가 비옥 십팔호실에 들어온 지 백일이 된 것이다.

유백하는 웃음을 흘리며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표정이나 모습은 백일 전과 별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유백하의 눈에는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그 중 가장 크게 변한 것은 독고무령의 눈이었다.

온기 한 점 없던 눈에 미약하나마 온기가 서려 있었다.

겉으로 봐선 전혀 차이를 느낄 수 없을 만큼의 미미한 변화였지만, 유백하만큼은 그 차이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세월유수라, 잡을 수 없는 것이 세월이라더니 정말 빠르구나.”

“미안합니다.”

그리고 말투도 변해 있었다. 음울하게 들릴 정도로 전혀 감정 변화가 없던 목소리였는데, 지금은 희미한 감정이 묻어나온다.

더구나 반말도 존댓말로 바뀌었다.

원한 만큼은 아니지만, 백일 간의 변화치고는 그럭저럭 만족할 만했다.

유백하는 죽음과 삶을 초월한 듯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에 대해선 마음 쓰지 말거라. 네 덕분에 즐겁게 마지막을 보내고 편안히 죽을 수 있으니 오히려 고마울 뿐이니라.”

독고무령은 묵묵히 유백하를 바라보았다.

유백하는 약속 날짜가 다 된 것으로 알고 있다. 백일이 지났으니까.

그러나 결코 그렇지가 않다. 자신과 약속한 날은 다 되었지만, 남조경과 약속한 시한은 아직 하루가 남은 것이다.

유백하가 독고무령과는 당일 약속했지만, 독고무령이 남조경과는 다음 날 하지 않았던가.

단 하루의 차이.

유백하는 미처 모르고 있다. 그 하루의 차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독고무령은 그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유백하가 죽기 전까지 말해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거기에는 자신의 모든 것이 달려 있었으니까.

‘대신 당신의 부탁을 꼭 들어드리겠습니다.’

백일 간 많은 것을 듣고, 배우고, 익혔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지켜야할 도리, 해서는 안 되는 것과 반드시 해야 할 것, 온갖 사람을 상대하는 법 등.

어떻게 보면 비옥 십팔호실에서의 삶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그걸 배우는 동안, 독고무령은 자신이란 존재에 대해 심각하게 되짚어 볼 수가 있었다.

나는 왜 살고 있는가.

사는 동안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 것 말이다.

아버지가 그를 낳아 주었다면, 유백하는 그의 정신을 깨어나게 해준 사람이다.

동토의 얼어붙은 바위에 한줄기 숨결을 불어넣어 준 사람. 그게 유백하인 것이다.

한데... 이제 잠시 후면 자신의 손으로 유백하의 목숨을 끊어야 한다.

뭔가 묵직한 기분이 가슴을 짓누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느낀 감정이다.

하지만 망설여서는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았다.

날이 새면 남조경이 올 것이다. 언제 올지는 누구도 알 수가 없다. 그 전에 모든 일을 끝내야만 하는 것이다.

독고무령은 흔들리는 눈빛을 다잡고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기회가 되면, 따님에게 꼭 말을 전해주겠습니다.”

“그래준다면야 고맙지.”

“더 바라는 것은 없습니까?”

유백하가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돌침상에 눕는다. 유등불에 비친 그의 표정이 고요히 가라앉아 있다.

독고무령은 탁자로 다가가 다섯 치 길이의 침 세 개를 들고 돌아섰다.

그때 유백하가 잔잔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깜박 잊을 뻔 한 게 하나 있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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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암천제- 세상에 지지 않을 거야! +51 09.02.02 50,046 8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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