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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담(張譚) 의 이야기 세상

암천제

웹소설 > 작가연재 > 무협

장담(張譚)
작품등록일 :
2009.04.15 19:43
최근연재일 :
2009.02.07 20:07
연재수 :
8 회
조회수 :
372,359
추천수 :
83
글자수 :
31,837

작성
09.02.06 20:32
조회
42,090
추천
13
글자
11쪽

암천제 - 내 목숨은 내가 결정한다!

DUMMY

.


“말씀해 보시죠.”

유백하가 속삭이듯이 입을 열었다.

“백운서원에 갈 일이 있거든, 서고 안쪽의 동쪽 벽을 살펴봐라. 아마 새로 회칠이 된 곳이 있을 것이다. 그곳의 회칠을 벗겨보면 얇은 동판이 석 장 나올 것이야. 책을 촛불에 태울 때 표지 속에서 나온 것이지. 내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하고 네가 가져라. 그리고...”

석 장의 동판.

그것이 뭔지는 모르지만, 비옥 십팔호실에 있는 독고무령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독고무령은 유백하의 머리맡에서 걸음을 멈추고, 마저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유백하는 잔잔한 눈으로 독고무령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말을 독고무령의 뇌리에 심으며 눈을 감았다.

“어떤 경우든, 네가 사람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니라.”

독고무령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침이 들린 손은 조금도 떨리지 않고 유백하의 백회혈로 다가갔다.

‘잊지 않겠습니다.’



그날 밤이 깊어질 무렵.

독고무령은 열 장의 양피지를 먹물통에 집어넣었다. 먹물통에 집어넣은 지 반각 정도 되자 양피지가 퉁퉁 불었다.

그는 퉁퉁 불은 양피지를 꺼내 박박 문질러서 흔적마저 알아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거처의 석실로 들어간 독고무령은, 아버지의 땀냄새가 아직도 가시지 않은 침상을 조심스럽게 들어냈다.

드르륵.

침상이 치워진 바닥에는 가로 세로 석 자 크기의 네모진 자국이 희미하게 나있었다.

독고무령은 들고 있던 횃불을 한쪽에 꼽고 자국이 난 곳에 칼을 꽂고 최대한 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긁었다.

그렇게 십여 번 긁어대자, 칼끝이 석판 틈바구니로 쑥 들어갔다.

독고무령은 동작을 멈춘 채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비옥 십팔호실은 특수하게 지어졌다. 하기에 밖에서는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숨구멍에 바짝 붙어 귀를 기울이지 않는 한.

유백하와 일상적으로 대화를 나눈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다행히 밤부엉이 우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독고무령은 숨을 멈추고 천천히 칼을 비틀어 올렸다.

끼이이....

석판이 위로 살짝 들리는가 싶더니, 찬바람이 좁은 틈바구니로 밀려나온다.

벌어진 틈은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 굵기의 봉이 들어가기에는 충분했다.

봉 하나를 벌어진 틈에 끼워 넣은 독고무령은 칼을 놓고 두 손으로 석판을 잡았다.

석판이 쑥 위로 들렸다.

순간 바람이 더욱 거세지며 시커먼 동혈이 모습을 드러냈다.

독고무령은 깊게 침잠된 눈으로 동혈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가 우연히 발견했다는 동혈이었다.

‘침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들었는데, 놓치는 바람에 바닥이 깨졌다고 했지.’

아버지는 발견한 동혈을 숨기기 위해 다른 곳의 석판을 빼내어 그곳에 얹었다고 했다. 다행히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고 한다.

하긴 방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거늘, 석판이 뜯어진 것을 이상하게 여길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 후, 아버지는 시간만 나면 횃불을 들고 동혈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줄기 희망을 발견하고는, 수 년 동안 뭔가를 준비하셨다고 했다.

그게 벌써 십육 년 전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준비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모든 계획을 완성했을 때, 자신이 태어난 것이다.

한데... 이제 그 길을 자신이 가려 한다.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버지조차 모른다.

어쩌면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지 않을 수가 없다.

내일이 되면 남조경이 찾아올 것이다.

천자무서만 가져가고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안다.

아버지도 같은 이유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까. 아들이라도 살리기 위해서 말이다.

‘너희들은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해. 천자무서의 해독서도, 그리고 내 목숨도. 내 죽음은... 나만이 결정할 수 있어!’

이를 지그시 악문 독고무령은 동혈을 내려다보았다.

동혈의 직경은 두 자가 조금 넘었는데, 대여섯 자 아래쪽으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완벽한 어둠이었다.

아버지 말로는, 통로는 빛이 없어도 통과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끝에 가면 빛이 있어야만 한다고 했다.

그는 한쪽에 꽂아 놓은 횃불을 들어 동혈 속에 던져 넣었다.

횃불이 끝없이 아래로 떨어지더니,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졌다.

희미한 빛이 보이는 걸로 봐서 꺼지지는 않은 듯했다.

“후우우우...”

숨을 길게 내쉰 독고무령은 작은 가죽주머니를 집어 들고 목에 걸었다. 그가, 아버지가 아끼던 것이 들어있는 주머니였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동혈 속으로 들어갔다.

한 발, 한 발...

가슴까지 동혈 속에 집어넣은 그는 침상의 다리를 천천히 끌어당겼다.

그리고 침상이 완벽히 제자리에 자리 잡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밑으로 더욱 깊숙이 몸을 집어넣었다.

그렇게 팔과 머리만 남겨지자, 손을 뻗어 석판을 위로 끌어 올렸다.

곧 석판이 제자리를 찾아 놓여졌다.

텅.

그 소리를 마지막으로 고요함이 비옥 십팔호실을 지배했다.



키만큼 아래로 내려가자 통로가 조금 넓어졌다. 양쪽을 손으로 짚으며 내려가는데도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독고무령은 손발을 이용해 몸을 지탱하며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꼬불꼬불하게 아래쪽으로 뻗은 통로는 십오륙 장쯤 되는 듯했다. 그곳을 통과하는데 일각가량 걸렸다.

긴장 때문인지 온몸이 땀으로 젖어 후줄근해졌다.

통로가 넓어질수록 힘도 더 들었다.

그나마 아래쪽에서 비치는 희미한 빛에 벽을 살펴볼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간간이 튀어나온 곳을 손으로 잡을 수 있었으니까.

그렇게 이삼 장을 더 내려가자, 바람이 좁은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쉬이이이....

‘거의 다 왔군.’

독고무령은 조심조심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벽을 밟으려던 발에 아무 것도 걸리지 않자, 갑자기 중심이 흔들렸다.

독고무령은 다급히 벽을 짚은 손에 힘을 주고, 내려진 발을 다시 들어 올렸다.

아버지가 말했던 통로의 끝에 당도한 듯하다.

‘높이가 이 장 정도 된다고 했지’

그는 고개를 숙이고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한쪽에 떨어져 있는 횃불 덕분에 주위는 제법 밝았는데, 발 아래쪽은 상당히 넓은 공동이었다.

독고무령은 손에서 힘을 빼고 아래쪽으로 뛰어내렸다.

순간 바닥에 내려선 그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그곳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칠팔 장 넓이의 천연동굴이었는데, 반대편 벽 아래로 지하수로가 흐르고 있었다.

부드럽게 출렁이는 지하수로의 넓이는 여섯 자 정도. 횃불 빛에 반사된 물결이 마치 살아서 출렁이는 것만 같았다.

한참 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독고무령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고개를 돌렸다.

구석에서 바람이 강하게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수로의 끝에 있는 구멍으로 물이 빠져나가며 나는 소리였다.

그는 그곳을 잠시 바라보고는 몸을 돌렸다.

제법 넓고 평평한 바위가 보였다. 그 위에 아버지가 준비해 놓은 것이 있었다.

아들을 위해서.

가슴이 먹먹하고 두 눈이 찡하니 울렸다.

‘아버지....’


“아비는 양가죽으로 된 커다란 물통에 바람을 넣고, 오년 동안 만든 기다란 줄에 매달아서 그곳에 떠내려 보냈다. 줄의 길이가 무려 수백 장이나 되었지. 한데 그것이 다 풀리도록 걸리는 게 없이 흘러가더구나. 한 마디로 수로가 사람이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좁지는 않다는 말이 아니겠느냐?

그 후 염마귀에게 넌지시 말했다. 근처 호수나 강에서 핏물이 솟구치는 날은 살기가 너무 센 날이니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고 방에 처박혀 있으라고 말이다. 크크크, 그러고는 많은 양의 피를 모아 몇 번에 걸쳐 흘려보냈지. 그랬더니 어느 날 염마귀가 찾아와서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더구나.

동쪽으로 이십 리가량 떨어진 곳에 분하(汾河)로 흘러들어가는 호수가 있는데, 그곳에서 핏물이 솟구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말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숨을 오래 참을 수 있는 무공을 가르쳤다. 아버지가 고문했던 사람 중에는 황하를 무대로 활동했던 황하삼귀가 있었는데, 그 중 수귀(水鬼) 호상이라는 자에게서 얻은 무공이라 했다.

사실 수귀의 수어잠혼공은 아버지가 알려준 다른 무공에 비해 그리 뛰어나다고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무공을 익히면 한 시진은 숨을 참을 수 있다고 했으니, 오히려 다른 무공보다 훨씬 유용했다.

자신은 그 무공을 익히며 죽을 뻔 한 위기를 몇 번이나 넘겼다. 다른 무공을 익힐 때처럼, 아버지의 말이 있기 전까지는 무조건 버텼으니까.

그 덕에 수귀 못지않게 숨을 오래 참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수로를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수로가 갑자기 좁아져서 몸이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고, 중간에 숨을 쉴 곳이 없어서, 죽은 채로 강이나 호수 위에 떠오를 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살아날 확률이 단 일 푼뿐이라 해도 해야만 했다.

가만히 앉아서 저들의 손에 죽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나는 아버지의 판단을 믿는다. 분명히 살 수 있을 거야!’

독고무령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고, 아버지가 준비해 놓은 가죽옷을 걸쳤다.

머리까지 뒤집어 쓸 수 있는 통짜 가죽옷이었다. 행여나 수로를 빠져나가며 몸을 상할까봐 준비한 것이었다.

가죽 옷을 다 입은 그는 옷 속에 두 가지 물건을 넣었다.

하나는 양가죽에 기름을 발라 만든 세 개의 공기주머니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가 먼저 던져 넣은 가죽주머니였다.

그렇게 모든 준비가 마친 독고무령은 지하수로의 끝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한쪽 끝이 바위에 묶인 채 둥글게 말아놓은 엄청난 양의 밧줄이 있었다.

염마귀에게 수 년 간에 걸쳐 얻은, 세겹으로 꼬인 밧줄을 풀은 후, 죄인들의 옷과 머리카락을 섞어 만든 것이었다.

아버지말로는 일천 장쯤 된다고 했으니, 밧줄을 잡고 가면 절반 정도는 급류에 휘말리지 않고 갈 수 있을 듯했다.

독고무령은 밧줄의 끝에 마지막 남은 공기주머니를 매달았다. 그리고 물 속에 흘려보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밧줄이 반쯤 풀렸다. 다행히 엉킨 곳은 없는 듯했다.

그제야 독고무령은 천천히 숨을 깊게 들이쉬며 수어잠혼공을 운기 했다. 그러고는 밧줄이 다 풀린 것을 확인한 후, 밧줄을 잡고 지하수로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이제 믿을 것은, 아버지가 만든 밧줄과 자신 밖에 없었다.

하늘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편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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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암천제- 때가 된 건가? +47 09.02.02 43,640 7 11쪽
2 암천제- 세상에 지지 않을 거야! +51 09.02.02 50,045 8 10쪽
1 암천제- 서(序) +62 09.02.01 58,756 8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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