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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근태 님의 서재입니다.

다시 즐기는 인생 N회차

웹소설 > 작가연재 > 현대판타지

송근태
작품등록일 :
2020.12.11 16:01
최근연재일 :
2021.01.10 17:27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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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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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31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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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임채리 < 3 >

DUMMY

23화


3박 4일의 합숙 프로그램은 정해진 일정 말고는 모조리 자유 시간이었다.

김태민은 서민초를 데리고 600주년 기념관 지하 1층 은행골로 향했다.

성균관 대학교는 패컬티 식당, 은행골, 법고을 식당, 옥류천 식당, 금잔디 식당 등 다섯 개의 학생 식당이 있는데 김태민이 먹고 싶은 메뉴는 주로 은행골에서 팔고 있었다.


“허허······.”


점심 메뉴로 선택한 일식 돈가스를 입 안 가득 담은 김태민이 감탄했다.

돈가스가 꽤 두툼한데 식감은 마시멜로처럼 부드럽다.

샐러드는 자연의 싱싱함을 자랑하고 미소 된장국은 담백한 맛을 자랑하면서 돈가스로 느끼해진 입을 깔끔하게 정리해줬다.

소스 역시 살짝 매콤한 맛이 가미된 게 한국인 입맛에 딱이었다.


“이게 고작 3,000원 밖에 안 한다니······.”


돈가스가 최소 7,000원부터 시작하던 시대를 살았던 회귀자로서는 꽤 충격적인 값과 퀄리티였다.

만일 대학에 갔다면 값싸고 맛있는 음식을 더 많이 먹었을 텐데······.

작은 후회와 함께 대학 진학의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와 씨! 대학생 놈들 싸고 맛있는 걸 지들끼리 먹고 있었네!”


서민초 역시 라볶이의 값과 맛에 두 번 놀란 상태였다.

불어터진 고등학교 급식 라볶이가 아닌 제대로 된 라볶이를 먹는 게 엄청난 호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배식 아주머니가 국자로 라볶이를 풀 때마다 제발 담기기를 기도했던 삶은 계란도 무려 두 개나 있다는 점이 특히나 감동스러웠다.


“나 정했어! 하늘이 무너져도 무조건 학식이 맛있는 대학으로 진학할래!”

“이의 없음. 그런 의미로 라볶이 한 젓가락 먹는다.”

“동작 그만! 라볶이를 원하면 돈가스 먼저 내놔라! 그 전까지는 협상 따위 하지 않겠다!”

“치사하게 라볶이를 인질로 삼네.”


돈가스 쪽이 손해인 거래가 성사됐다.

힘들게 얻은 라볶이를 진지하게 음미하고 있자니 은행골로 들어오는 서울 예술 고등학교 학생들이 보였다.


맛있게 먹어.

그리 말하듯 김태민과 눈이 마주친 임채리가 손을 흔들었다.

김태민도 똑같이 행동하자 서민초가 슬쩍 뒤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쟤가 네 룸메이트지? 저기 저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애.”

“알지도 못하는 애한테 말이 조금 심하시네.”

“그러면서 너도 부정은 안하네?”

“때로는 심한 사실이란 게 존재하는 법이지. 네 룸메이트는 쟤지?”


미세하게 거리를 벌린 다른 학생들과 달리 임채리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여학생이 있었다.

패션 디자이너가 장래 희망이란 걸 밝히면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들을 정도로 외모나 분위기가 남달랐다.

임채리가 남자라는 걸 알기 전 쟤가 임채리면 친해지는 재미가 쏠쏠하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확실히 서울이 유행의 시작지라서 그런가. 애가 이쁘게 잘 꾸몄네.”

“뭐래. 저런 스타일은 신부동만 가도 널렸건만.”

“왜 또 이리 날카로우실까. 아까 문자로 욕 보낸 이유가 쟤 때문이야?”

“아니 글쎄! 쟤가 뭐랬는지 알아? 기껏 사람이 용기내서 다가갔건만 뭐? 어차피 우리 합숙 끝나면 남이니까 피곤하게 굴지 말고 서로 무시하고 살자고? 미친 누가 지 좋아서 잘 지내자고 한 줄 아나!”

“당돌한 친구네.”

“근데! 제일 열 받는 게 뭔줄 알아?”

“상대가 서울 출신이라서 아무 말도 못했다는 코메디는 아니겠지.”

“죽을래. 누가 개 열받게 정답 말하래.”


서민초가 젓가락을 검처럼 휘둘렀다.

도대체 얘한테 서울은 어떤 개념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쟤 말대로 서로 무시하고 지내게?”

“그럼 뭐 어쩌라고. 난 이미 꼬리 말고 튄 개인데.”

“뭘 어째. 쟤 말 반대로 하면 되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개입하고 쟤가 성질 부리면 웃으면서 바보인 척 해봐. 상대가 널 이유도 없이 싫어하니까 싫어하는 이유를 만들어주는 거지.”


최근 일로 거리감이 몰라 보게 가까워진 걸 떠나서 서민초는 이래저래 의미가 큰 고등학교 친구다.

내 사람을 함부로 대해지는 걸 두고만 볼 생각은 없었다.


“어······ 그건 내가 하다가 열 받아서 못할 거 같은데.”

“그럼 쟤 말대로 서로 무시하고 살던가. 쟤 말대로 합숙 기간 동안만 볼 사람인데 그런 사람 때문에 굳이 스트레스까지 받을 필요는 없잖아.”

“나도 알거든. 알면서도 짜증나니까 그렇지. 며칠 짜리 합숙도 이런데 나중에 회사 생활할 거 생각하면 우웁······.”


서민초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서민초 말에 담긴 뉘앙스처럼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참으로 다양한 인간군상과 마주하게 된다.

제일 골치아픈 건 급여도 복지도 팀 분위기도 마음에 드는데 딱 한 명이 심각한 문제일 때다.

머리로는 적당히 무시하고 업무적인 얘기만 나누자.

나 싫다는 놈 비위까지 맞추면서 살기에는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다.

그리 생각하더라도 실제로 행하기는 힘든 게 현실이었다.


‘사람들이 괜히 회사 이름이나 급여보다 중요한 게 회사 사람이라 하는 게 아니지.’


김태민 역시 중소 패션 기업에서 일할 때 동료 직원이나 상사가 문제라서 여러 차례 퇴사를 고민하다가 실제 행동으로 옮긴 적이 있었다.


‘어디를 가도 똑같아서 나중에는 포기했지만. 만일 그때 회사 내에서 진실된 내 편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잘 모르겠지만 그때의 경험 덕분에 한 가지 확실해진 게 있다.

모든 사람에게 잘해줄 필요는 없다.

내 사람이나 내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한테만 잘 해주는 걸로 충분하다.

그 과정을 통해서 차곡차곡 쌓인 인맥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일방적으로 주거나 받는 관계가 되거나 혹은 상부상조 관계가 되가나.


김태민은 상부상조 관계를 만들고 싶었다.


* * *


식사가 끝나고 김태민은 아직 식사 중인 임채리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혹시 밥 먹고서 따로 일정 있어?”

“얘들이랑 캠퍼스 구경할 건데 왜?”

“너랑 놀고 싶어서. 미안한데 채리 좀 빌려도 될까?”


김태민의 질문에 서울 예술 고등학교 학생들이 당황했다.

불만의 시선이 느껴지는 걸 봐서는 임채리가 이 무리에서 이래저래 중요한 위치에 있는 듯했다.


“내가 가는 건데 뭘 얘들한테 허락을 구해? 좋아! 밥 빨리 먹을 테니까 10분만 기다려줘. 안 그래도 너랑 같이 밥 못 먹어서 아쉬운 참이었거든!”


그래서 임채리는 다른 학생의 시선도 무시하고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밝힐 수 있었다.

김태민이 알겠다 말하고 얌전히 자리를 뜨자 서민초의 룸메이트인 김마리가 쀼루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채리야 그러지 말고 우리랑 놀자. 뭘 오늘 만나서 친하지도 않은 애랑 놀려고 해.”

“쟤 대상 탔잖아.”

“그게 뭐?”

“넌 잘하는 애랑 친해지고 싶지 않아? 난 친해지고 싶은데.”


임채리가 무언가 속내가 감춘 미소를 보였다.

이후 빠르게 식사를 끝낸 임채리는 은행골 밖에 서 있는 김태민과 합류했다.

두 사람은 학식 얘기를 하면서 캠퍼스 내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역시나 오늘 처음 만난 사이라서 한 번 대화가 끊기면 조금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김태민의 경험에 의하면 이럴 때 제일 효과적인 대화 수단은 칭찬과 공감이었다.

김태민은 조미료도 살짝 섞으면서 임채리의 수상작을 칭찬했고 임채리의 얘기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공감대를 형성해줬다.

철저하게 계산된 행동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임채리는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김태민과 거리가 허물어진 걸 체감했다.

그리고 디자인 얘기로 시작했던 둘의 화제는 어느덧 살았던 인생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디자인 감성이 특이해서 얼추 짐작은 했는데 설마 이탈리아에서 7년이나 살았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네.”

“아버지 사업을 좋게 봐준 사람이 이탈리아에 있었거든. 즐거웠지. 서울은 고층 건물만 가득한데 이탈리아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넘치거든.”

“그런 나라에서 살다가 갑작스러운 한국 생활이라······ 적응하기 힘들었겠네.”

“진짜로!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다 내가 경험했던 감성이랑 천지차이인 게! 한국 사람이 한국에서 향수병까지 걸렸다니깐?”

“그런데 어쩌다가 귀국하게 된 거래?”

“자세히는 모르는데 아버지 사업 문제 때문일 걸? 귀국하기 얼마 전부터 부모님이 사업 문제로 갈등이 조금 심했거든.”

“그래도 결과적으로 나쁜 일로 귀국한 건 아닌 듯하네.”

“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빴다면 옷의 무게가 달랐을 테니까.”


김태민이 임채리의 롤렉스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명품 좋아하나 봐?”

“엄청 좋아해! 내 가치를 드러내는 효과적인 방법이잖아!”


자신감 넘치게 웃는 임채리는 내 사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게 현명한 방법인지는 애매했다.

공감대 형성은 이쯤이면 충분하다 판단한 김태민은 다음 스텝을 밟기로 했다.


“그런데 전공 서적 들고 다니는 대학생 보면 뭔가 멋있지 않아?”

“오! 어떤 느낌인지 알 거 같아! 완전 지적이고 세련된 느낌이지 그거!”

“걸어 다니는 도서관 느낌이지. 그래서 말인데 우리 대학 강의 몰래 들어볼래?”


김태민의 대학 로망은 크게 세 가지가 있었는데 바로 학식과 강의, 그리고 캠퍼스 커플이었다.

회귀 전에는 기회가 있어도 귀찮고 두려워서 걷어차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기회가 있을 때 망설임 없이 손을 뻗을 거다.


‘내 사리사욕도 채우고 임채리에게 특별한 경험도 쌓게 해준다. 이게 일석이조겠지.’


시계 바늘처럼 똑같이 흘러가는 하루는 아무리 쌓여도 무의미한 기억이 될 뿐이고 추억은 되지 못한다.

우리가 괜히 출근 전 챙긴 준비물을 지하철에 오르고서야 떠올리는 게 아니다.

출근 전까지 일련의 행동이 매일 반복되면서 언제 소거되도 괜찮은 기억이 됐을 뿐이다.


그러나 특별한 경험은 다르다.

매일 똑같은 일상에서 일어난 이벤트는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기억의 한곳에 오래 자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벤트를 혼자 경험한 게 아니라면?

그 당시 겪은 이벤트나 연관점을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함께 있던 사람이 떠오른다.

김태민은 임채리의 첫 경험을 차지할 생각이었다.


“딱히 강요할 생각은 없으니까 거절해도 돼. 솔직히 합숙까지 와서 수업 듣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아냐 아냐! 사실 우리 애들한테 강의 얘기 꺼냈다가 반대만 처먹어서 엄청 아쉬운 참이었거든. 너도 싫어할 줄 알았는데 먼저 얘기해줘서 고마워!”

“······ 얘 진짜 사회 생활 잘하겠네.”

“응?”

“아무것도 아니야.”


근처 건물로 들어간 두 사람은 대학생들이 떼거지로 들어가는 강의실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의실 규모도 넓고 대학생도 서른 명 넘게 있는 강의실을 발견했다.

당당하게 강의실로 들어간 두 사람은 언제든 도망칠 수 있도록 출입문 근처에 앉았고 의심을 사지 않도록 오는 길에 준비한 안내 책자를 전공 서적처럼 펼쳐놨다.

담당 교수가 오기 전까지 자리를 지키는 시간은 영겁과 같았다.

10분 뒤쯤 백발이 성한 교수가 들어왔는데 출석 따위 쿨하게 무시하는 스타일인지 곧바로 강의를 시작하고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강의는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의 철학관을 중점으로 다루고 있었다.


‘철학과 강의인가. 예전 생각이 나네.’


한때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을 이기지 못한 김태민은 종교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다.

개인의 신념과 성향의 방향이 너무나도 달랐던 교회는 금세 관뒀지만 철학과 불교는 진지한 태도로 접근하면서 내면을 갈고 닦는데 힘쓰고는 했다.


‘해탈한 듯한 냉소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었지. 뭐······ 술이 훨씬 빠르고 효과적이라서 자연스럽게 관두고 말았지만.’


김태민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피었다.

세상은 혼자라고 생각하고 살던 자신의 긍정적 변화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철학이란 거. 의외로 재밌네.”


임채리가 조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응. 처음에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만 들렸는데 계속 듣다 보니까 뭐랄까? 사고가 확장되는 느낌? 시야가 넓어진다고 할까? 저 할아버지 말솜씨도 좋아서 나도 모르게 빠져 들게 되네.”

“다행이다. 지루하면 어쩌나 했거든.”

“크큭······ 언제 들킬지 모르는 스릴 넘치는 상황이 재미 없을 리가.”

“거기 학생들.”


속삭이듯 떠들던 두 사람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철학과 교수가 두 사람을 지목하자 학생들의 시선이 몰리기 시작했다.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진 임채리가 할 수 있는 생각은 도망 뿐.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철학과 교수의 선공이 먼저였다.


“식품이 발전할수록 동물의 희생이 늘어나고 있는 요즘이죠. 인간의 욕구로 동물이 희생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나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리 말하듯 어색하게 웃은 임채리가 도망 가자는 듯 김태민의 팔뚝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나 김태민은 도망갈 생각이 없었다.


갑작스러운 이벤트 역시 의미 있는 일이니까.

시선 속에서 잠깐 고민한 김태민은 의미 있는 경험을 임채리에게 넘기기로 했다.


“내 말 똑같이 말해봐.”


김태민이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임채리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팀플레이라고 생각한 철학과 교수는 충분한 시간을 줬고 이내 임채리가 말했다.


“인간의 욕구 때문에 동물의 탄생과 죽음이 결정되는 게 옳다는 생각은 안 듭니다!”

“그게 끝인가요?”

“아닙니다! 뭐랄까? 생각해보면 인간도 일단은 동물이잖아요? 동시에 명실상부한 생태계 최강자고요. 그리고 과거부터 지금까지 생태계 최강자가 다른 생물의 생사여탈권을 결정한 게 자연의 섭리였고요. 새가 벌레를 잡아 먹는 것처럼요.”

“계속 말하세요.”

“그런데 새를 두고 악이라 칭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식품이란 건 생태계 최강자인 인간의 권리고 선택! 우리가 가져야 할 건 죄책감이 아니라 희생된 생물에 대한 감사를 가지고 즐거운 식사라고 생각합니다!”

“호오······ 그건 누구의 지분이 더 큰 의견이죠?”

“이 친구입니다.”


김태민이 재빠르게 임채리를 가리켰다.

철학과 교수의 흥미 가득한 시선과 존경 섞인 학생들의 시선이 임채리에게 쏠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임채리는 조금 당황했지만 금세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 됐다.

임채리는 타인의 관심을 즐기는 타입이었다.


“그럼 학생의 최종 결론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죄책감이 지니는 가치는 감사의 가치보다 덜하다는 건가요?”

“네? 어 그건······ 잘 모르겠는데······ 그냥 감사하는 마음으로 식사를 즐기자는 생각만 했습니다.”

“제법 흥미로운 표현이네요. 생각할 거리가 많습니다. 이름을 기억해두고 싶은데 이름이 어떻게 되죠?”

“제 이름이······.”


이제 어떡해?

임채리가 도움의 시선을 보냈다.

김태민의 재빠르게 출입문을 여는 걸로 대신 대답했다.


* * *


케이프 코트 차림의 단발 머리 여대생이 호빵을 먹으면서 걷다가 당황했다.


“실례합니다. 잠깐 시간 되세요?”


딱 봐도 대학생이 아닌 듯한데 차림새는 어른스러운 남자가 스마트 폰을 들고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김태민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지금 겨울철 간식거리 선호도 조사를 하고 있거든요. 괜찮다면 5분만 시간 좀 내주실래요?”

“선호도 조사요?”

“네. 정말 5분이면 돼요. 호빵 먹으면서 걷는 게 겨울철 간식거리를 정말 사랑하는 분 같아서요.”

“어······ 알겠어요. 강의 때문에 빨리 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첫 번째 질문인데요. 겨울철 간식거리로 주로 선택하는 게 뭔가요?”

“호빵이랑 고구마? 가끔 군밤도 먹어요.”

“기본기에 충실하시네요. 그럼 노점상에서 파는 어묵은 어때요?”

“완전 좋죠! 맛도 맛인데 추운 게 확 사라지잖아요.”

“역시 한국인은 국물이죠? 저는 개인적으로 겨울이 되면 보온병에 어묵 국물 담아서 마시고 다니는데 이걸 상품화 한다면 어떨까요? 녹차티백처럼 어묵티백으로 국물을 내는 거죠.”

“어?! 그 아이디어 대박인데요? 따뜻한 음료는 먹고 싶은데 녹차나 커피는 부담스러운 사람들의 또 다른 선택지? 생산 단가가 조금 난관이 될 거 같기는 한데······.”

“대답이 상당히 구체적이네요. 경영학과 학생이라 그런가?”

“4년 동안 그거만 공부하니······ 어라? 내가 언제 학과 얘기 했나요?”

“글쎄요.”


김태민이 여대생의 가방에 담긴 전공 서적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경영학 전공 서적이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여대생이 놀라자 김태민이 핫팩 한 개를 건네면서 말했다.


“바쁘신데 시간 내줘서 감사합니다. 호빵 다 먹으면 이걸로 손 녹이시고요. 방금 말했던 어묵티백 관련으로 나중에 또 얘기가 나누고 싶은데 혹시 괜찮을까요?”


김태민이 스마트 폰을 건네자 여대생이 깨달았다.

지금까지 모든 게 내 번호를 따기 위한 빌드업이었다는 걸.

만일 처음부터 번호를 물었다면 거절했겠지만 서로 얼추 공감대도 형성됐고 소소한 재미가 있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여기 학생 아니죠? 얼굴이 앳된 게 고등학생처럼 보이는데.”

“사랑에 나이가 무슨 상관일까요?”

“미성년자는 건드리면 큰일나니까? 나 범죄자 되기 싫으니까 연락은 졸업하고 해요.”


김태민의 볼을 살짝 꼬집고 흔든 여대생이 제 갈길을 떠났다.

그대로 서서 볼을 만지작거리던 김태민이 근처 나무를 보고는 말했다.


“봤지?”

“푸하하하!”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임채리가 박장대소하면서 김태민에게 다가왔다.


“아 진짜 웃겨 죽겠네!”

“어때? 괜찮았어?”

“너 선수인 줄 알았어! 아까 강의 때도 느꼈는데 말빨 죽인다! 그런 걸 따로 알려주는 학원이라도 있어?”

“인생이 학원이지 뭐.”

“푸하하하! 인생이 학원이래 크큭······.”


박장대소하는 임채리를 보면서 김태민도 기쁜 마음으로 웃었다.

한 번쯤 해보고 싶던 헌팅을 시도하고 성공까지 한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좋았어! 방법 얼추 알았으니까 나도 한 번 해봐야겠다.”


이번에는 임채리의 번호 따기가 시작됐다.

워낙 곱상하게 생긴 외모와 대학생 쯤 되면 누구나 알법한 명품 덕분일까.

상대방과 공감대부터 형성하는 김태민과 달리 임채리는 대뜸 번호를 달라 말해도 번번히 성공했다.


“누나들 번호 따는 거 쉽네 크큭······.”

“그러게.”

“음? 표정이 왜 그래?”

“조금 꼴 받는 일이 있어서.”


두 사람의 번호 따기 놀이는 슬슬 돌아오라는 임채리 친구들의 연락이 있을 때까지 계속 됐다.

그리고 서울 예술 고등학교 친구들의 품으로 복귀한 임채리가 평소처럼 떠들고 장난치던 와중 늘어지게 하품했다.


‘뭔가 루즈하네.’


해외 여행을 마치고 지루한 일상으로 복귀한 듯한 복잡한 현실 감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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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채리 < 3 > +4 20.12.31 862 33 19쪽
23 임채리 < 2 > +4 20.12.30 932 33 12쪽
22 임채리 < 1 > +4 20.12.29 1,019 32 13쪽
21 서민초 < 6 > +4 20.12.28 1,032 34 19쪽
20 서민초 < 5 > +6 20.12.27 1,058 34 12쪽
19 서민초 < 4 > +3 20.12.26 1,110 38 16쪽
18 서민초 < 3 > +3 20.12.25 1,173 32 14쪽
17 서민초 < 2 > +2 20.12.24 1,220 35 15쪽
16 서민초 < 1 > +3 20.12.23 1,277 36 10쪽
15 홍민호 < 8 > +6 20.12.22 1,296 36 17쪽
14 홍민호 < 7 > +3 20.12.21 1,280 38 13쪽
13 홍민호 < 6 > +2 20.12.20 1,360 38 12쪽
12 홍민호 < 5 > +3 20.12.19 1,379 40 11쪽
11 홍민호 < 4 > +4 20.12.18 1,453 37 13쪽
10 홍민호 < 3 > +1 20.12.17 1,511 39 11쪽
9 홍민호 < 2 > +3 20.12.16 1,598 37 13쪽
8 홍민호 < 1 > +3 20.12.15 1,657 47 11쪽
7 한예슬 < 4 > +4 20.12.14 1,794 46 13쪽
6 한예슬 < 3 > +4 20.12.13 1,791 47 9쪽
5 한예슬 < 2 > +2 20.12.13 1,768 37 8쪽
4 한예슬 < 1 > +3 20.12.12 1,945 43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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