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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세하루 님의 서재입니다.

내 일상


[내 일상] 22. (수필) : 셋째 누나

 

 

셋째 누나

 

                                                              맘세하루

 

구름이 구름이 하늘에다 그림을, 그림을 그립니다. 노루도 그려 놓고 토끼도 그려 놓고. 동생하고 나하고 풀밭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봅니다. ~~ 봅니다.”

내가 경남 하동군 악양 국민학교 2학년이던 겨울방학에 셋째 누나가 내게 가르쳐주면서 함께 불렀던 동요다.

 

나보다 7살 많고 중학교 3학년이던 누나는 시외버스로 두 시간 거리인 진주 시내에서 하숙하며 학교에 다녔다.

그때 누나가 내게 준 크리스마스 카드에, 커다랗고 빨간 포인세티아 꽃잎이 그려져 있었고, 눈 덮인 외국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사슴이 끌고 산타할아버지가 탄 썰매가 달리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동화 속 세상에나 있을 법한, 신기한 풍경이라 지금까지도 그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다음 해 누나가 교육대학교 전신인 진주 사범학교에 입학하자, 국민학교 교장이던 아버지는 진양군으로 전근하였고, 우리 집도 진주 시내 사범학교 근처로 이사했다.

내가 5학년일 때 사범학교 3학년생 세 명이 교생실습을 나왔는데, 친구 한 명이 내 누나도 교생이라고 말하자 누나 이름을 물었다.

이름을 들은 교생들은 공부도 잘하는 누나를 잘 알고 있었고, 누구의 애인이라며 소곤거렸는데 그 남학생이 잘난 것 같아서 나는 누나가 무척 자랑스러웠다.

 

누나가 선생님이 되어 하동군 북천 국민학교에 첫 발령이 났고, 나는 6학년 여름방학 때 누나를 따라가 자취하는 학교 관사에서 하룻밤 자고 놀다 왔다.

그때 나는 진주 시내에서 제일 크고 전교생이 3천여 명이던 중안 국민학교의 전교 어린이회장이어서 누나가 나를 선생님들한테 자랑하려고 데려간 줄 알았다.

누나는 내게 학교 신문에 실릴 거라며 동시를 하나 짓게 했고, 다음날 그 동네 어느 부잣집에 가서 어른들과 가족에게 나를 인사시키고 다과 대접을 받고 왔다.

그런데 그때 만난 나랑 동갑인 그 집 남학생이 북천 국민학교에서 공부를 제일 잘한다고 했는데, 다음 해 진주 중학교에 입학해서 친구가 되었다.

그때는 중학교도 시험을 치르고 들어가서 시골 학교 출신은 입학이 쉽지 않았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무렵 누나는 교회에 나가는 눈치였다. 엄마가 절에 다니며 불공을 드리는데, 딸이 교회에 나가면서 하느님을 믿어도 되는가 싶어 누나가 아주 못마땅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나가 결혼하게 되었는데, 이럴 수가?

사돈어른이 장로교회 목사이고 자형 될 사람은 신학대학을 나온 고등학교 영어 교사였다. 철저한 예수교인 집안에 시집을 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뿐이랴? 6학년 때 북천면에서 만났던 그 친구가 바로 내 자형의 사촌 동생이었다.

자형 집안에서 그때부터 누나를 며느릿감으로 일찌감치 점찍었더란 얘기다.

 

결혼식을 올린 누나는 하필 무슨 사정이 있어 우리 집에서 두어 달 신혼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시집갈 집안에 포섭되어 종교까지 바꾼(?) 누나가 괜히 불경스럽게 여겨져 밉기까지 한 나는 자형에게 말도 별로 안 하고 지냈다.

어느 일요일에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마당 가 화단의 꽃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학교가.. 여기서 멀지?”

자형이 다가와 옆에 앉으며 조심스레 한마디 건넸다.

다정스러운 얘기라도 나누며 처남 매부 간의 어색한 관계를 개선하려는 것 같았다.

.”

나는 퉁명스럽게 한마디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거리가 3km나 돼서 무거운 책가방 들고 걸어가는 데 한 시간 걸려 힘들어 죽겠으니, 자형이 아버지한테 자전거 좀 사주라고 말해주세요라는 말은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누나 부부가 없을 때 몰래 빈방에 들어가 전축을 틀고, 레코드판을 뒤적거려 외국 가수들의 노래 몇 곡을 골라 들으며 영어 가사를 읊조리곤 했다.

그때 배운 미국 포크송 그룹 브라더스 포의 노래인 그린필즈 greenfields’가 대학교 때 데이트하던 지금의 아내 마음을 결정적으로 사로잡는 계기가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철저한 교인이면서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교사로 성실하게 근무한 누나 부부는 두 아들을 낳아 잘 키웠다.

큰놈은 경남 고성 읍내의 시골 고등학교를 나와서 서울대 상대에 합격하여 고성읍과 집안의 자랑거리가 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에 대기업 경제연구소에 근무했고, 티브이에 몇 번 나와서 외삼촌인 나까지 흐뭇함을 느꼈다.

그런데 교회에서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던지 누나는 결국 무릎 관절염으로 오랫동안 고생했고, 지금도 발목이 성치 않아 절뚝거리며 걷는다.

 

거기에다 몇 달 전에 자형이 기도하다 갑자기 쓰러져 혼수상태로 식물인간처럼 되었다.

간병인을 두기는 하지만 누나도 거의 매일 병원에 들르는데, 어떻게 달리 손을 써볼 도리가 없으니 보기에 그저 답답할 뿐이다.

누나의 그 곱던 얼굴이 칠순 중반의 노인이 되어 비쩍 마른 손으로 내 손을 잡을 때면, 지난날 추억이 스치면서 가슴이 메어 속으로 눈물을 삼키게 된다.

 

누님의 장남이 병원비를 마련해보지만, 하루에 10만 원이나 드는 간병비를 감당할 재간이 없어 누님은 결국 고성 집을 급매물로 내놓았고, 거의 반값에 팔고 말았다.

그리고 장남 집이 있는 성남으로 올라와, 함께 살 수는 없고, 근처의 요양원에 들어가서 혼자 기거하고 있다.

깨어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자형도 요양원 근처의 작은 병원으로 옮겼고, 빠른 회복만을 기도하며 기약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자형에 대한 추억은 별로 없는데, 언젠가 내가 대기업 연구소 부장으로 잘 나가고 있을 때 단둘이 잠깐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지금 자네가 몇 살이지?”

, 서른아홉 됐습니다.”

벌써 그리됐나? 내년에 불혹이네.”

그러고는 별말 없이 몇 가지 집안 안부만 묻고 넘어갔다.

그러나 그날 이후 나는 내 나이와 인생에 대해 새삼스레 많이 고민하게 되었고, 결국 마흔 살인 다음 해에 직장을 나와 개인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어쩌면 별로 말수가 없던 자형의 한마디가 내 인생의 진로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누나가 시집갈 무렵 내가 원하는 기타를 안 사준다고 크게 푸념했었다.

근데, 하필 이런 때 그 기억이 되살아나 마냥 창피한 마음에 열없이 얼굴이 붉어진다.

 

구름이 구름이 하늘에다 그림을, 그림을 그립니다. 노루도 그려 놓고...”

 

뭉게구름 떠가는 하늘 저 위에 진정 하느님이 계신다면,

제발 자형이 거짓말처럼 눈을 뜨고 벌떡 일어나 누나의 주름이 활짝 펴지게 해주시길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 문예지 [문학의 봄] 2020년 가을호 등재 >

 

 

 

 

 



댓글 2

  • 001. Personacon 이웃별

    20.09.09 23:44

    마음 아픈 이야기를 따뜻하고 담담하게 풀어 쓰셨네요.
    강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이란 존재가 묘하게 가슴에 와 닿습니다.
    하나의 점 같은 우리들이 시간 위에서 만나 인연을 만들고... 모아졌다가 흩어지고...
    그 인연 하나하나 모두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형께서 정말 깨어나는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셋째 누나가 7살 많다면 세하루님은 귀여움 독차지하며 자라셨을 것 같아요.
    저는 딸부자집 장녀인데. ^^

  • 002. Lv.55 맘세하루

    20.09.10 08:53

    네, 이웃별님 감사합니다.
    그렇네요.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친인척, 지인의 만남과 헤어짐이 한 편의 파노라마로 끝나는 것 같습니다.

    예, 저는 금지옥엽으로 자랐습니다. 큰누님은 88세고, 둘째 누님은 82세인데, 아직도 저를 귀한 동생 취급합니다.
    별님은 딸부자집 장녀로 동생들이 맞을 야단까지 다 받으며 성장했겠군요.
    그 대신 지금은 가족 모임에서 대장 노릇 하시는 거 아닙니까? ㅎ

    (자형은 안타깝게도 이글을 쓰고 한 달쯤 뒤에 돌아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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