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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세하루 님의 서재입니다.

내 일상


[내 일상] 52. (수필) : 잔명 시계

 

[ 계간 문예감성 2022년 가을호에 실린 글입니다 ]

 

 

 

잔명(殘命) 시계

 

 

우연히 티브이에서 어떤 공상과학영화를 흥미롭게 본 적이 있다.

모든 사람의 팔뚝 안쪽에 남은 수명이 년, , , 초 단위로 디지털시계처럼 디스플레이된다. 한마디로 잔명 시계를 차고 다니는 것이다.

이 잔명 시간은 물건을 사는 대금, 교통편을 이용하는 요금, 병원 치료비 등등으로 마치 신용카드처럼 사용된다. 남은 수명이 줄어드는 걸 눈으로 빤히 보니까 흥청망청 과소비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팔뚝을 맞대고, 일정 시간을 말한 후 비밀코드를 부르고 전송하면, 그만큼의 시간이 돈처럼 상대편에게 전달된다. 자기 수명은 줄어들고 상대방 수명은 늘어나는 것이다. 귀한 생명의 기간을 주고받는 거니까, 단순히 돈만 오가는 신용카드와는 확연히 다르다.

그러니 당연히 강도가 설친다. 목에 총이나 칼을 들이대는데, 제 명에는 못 살지라도 상당한 잔명을 과감히 구두 결제로 나눠줄 수밖에 없다. 위험이 따르지만, 강도질 잘만하면 천년만년 살 수도 있는 꿈같은 세상이다.

 

또 다른 SF 영화에는 빅데이터에 저장된 국민의 예상 사망일이 운용자의 실수로 본인 핸드폰에 문자로 전송되는 사고가 발생한다.

점차 모든 사람에게 자기 사망 일자가 알려지자, 온 세상은 혼란의 도가니로 빠져든다.

잔명이 몇 년밖에 안 되는 사람은 대부분 이성을 잃고, 정상적인 삶을 포기한 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하여 난폭한 생활을 하게 된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공포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려고 정해진 사회 규범을 따르는데, 자기 목숨이 언제 끊어질지 알고 나면 막가파로 변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도 선하고 신앙심이 돈독한 극히 소수의 사람은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 계획을 세우고 지인과도 자주 만나며 남은 시간을 후회 없이 보내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어릴 때 시간은 돈이다.”라는 격언을 듣고 자랐지만, 그 뜻이 정확히 뭔지는 어른이 되고야 알았다.

대학에 들어가서 당구장 출입할 때, 노래방에서 추가로 요금 낼 때, 시간이 분명 돈임을 실감했다.

그런데 엄청난 돈 가치가 분명히 있는 이 시간이라는 존재는 의외로 누구에게나 공정하고 공평하게 나눠진다.

백인이든 흑인이든, 무슨 종족이며 어느 나라에 살든, 부잣집에서 태어난 금수저든 가난한 집 흙수저 출신이든, 하루에 24시간씩 똑같이 주어지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시간에 관한 저명인사의 숱한 명언이 있는데, 그중에서 나는 발명왕으로 불리는 토머스 에디슨의 말, “가장 어리석고 못난 변명은 시간이 없어서라는 변명이다.”를 으뜸으로 꼽는다.

그리고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인생을 사랑하는가? 그렇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왜냐하면, 시간은 인생을 구성한 재료니까. 똑같이 출발하였는데, 세월이 지난 뒤에 보면 어떤 사람은 뛰어나고, 어떤 사람은 낙오자가 되어있다. 이 두 사람의 거리는 좀처럼 접근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이것은 하루하루 주어진 시간을 잘 이용했느냐, 이용하지 않고 허송세월하였느냐에 달렸다.”라고.

누군가 이렇게 긴 글을 읽느라고 귀한 시간을 아깝게 보내거나 말거나.

 

어느 날 손목시계를 차려니까 초침이 멈춰있다. 리튬전지의 수명이 다한 것이다.

시계방에 가서 전지를 갈아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시침과 분침이 11 50분을 가리키는 게 눈에 띄었다.

문득 햇수로 11 10개월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일이 1월 하순인데, 지금 3월 하순이니 내 잔여 수명 12년에서 그새 2개월이 빠져나간 셈이다.

내가 일곱 살 때 50대 초반이 되신 부모님이 외아들인 나를 데리고 용하다는 사주 관상쟁이 집에 내 평생 사주를 보러 갔다.

지금도 기억나지만, 내가 82세까지 산다고 하니까, 1959년 당시로는 상당히 장수하는 운세라, 부모님이 무척 흡족해하셨다.

그 길게 느꼈던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흘러가고, 올해 칠순이 된 내 인생은 이제 겨우 12년밖에 안 남았다.

해서, 올해부터 여생을 알뜰히 보내기로 하고, 우선 3년간의 노후 계획을 세웠다.

1 3개년 계획은 건강을 위한 걷기 운동과 수필집 발간, 담채화 시화(詩畵)집 작성이다.

지금은 가끔 다니는, 집에서 왕복 4km 거리의 공원에, 이틀에 한 번은 갈 생각이다. 해발 95m의 바위산, 수련이 피고 송사리 떼가 노는 연못, 온갖 화초가 계절을 달리해 피고 조각 작품과 작은 정원이 꾸며진 동산이 있다.

수필은 지금껏 40여 편을 썼는데, 앞으로 매달 한 편씩은 꾸준히 쓸 작정이며, 절반쯤 고르고 정성껏 퇴고하여 올해 연말에 첫 수필집을 내볼까 생각 중이다.

그리고 중학교 이후 손을 뗐던 시()도 다시 써볼까 하는데, 시에 어울릴 담채화를 그려서 나만의 시화를 만들고 싶다.

원래 담채화는 연필로 스케치하고 묽은 수채화로 그리지만, 나는 연필 스케치 위에 형광펜으로 간편하게 그리려고 한다.

잘 진행되어 제2 3개년 계획도 세울 수 있게 된다면, 아마 아내와 함께 천 리나 먼 고향으로 내려가서 옛 추억을 반추하며 단둘이 오붓이 보내는 여생이 되지 싶다.

나는 요즘 손목시계의 배터리를 갈지 않고 초침이 멈춘 채 그냥 차고 다닌다. 내 남은 수명을 수시로 들여다보며 하루하루 알차게 살아가고자 함이다.

한 달에 5분씩 거꾸로 돌려서 잔명 시간을 맞추는데, 거의 매번, 서글프지도 않고 오히려 뿌듯함을 느낀다.

 

 

 

 

 

 잔명 시계 - 10시 50분.jpeg

 

제가 차고 다니는 초침 멈춘 ‘잔명 시계’입니다. 

맨 처음 멈춘 시각인 11시 50분을 가리키고 있네요. 

그로부터 7개월이 지난 지금은 35분 줄어든 11시 15분 (‘잔명 11년 3개월’)입니다.


댓글 2

  • 001. Personacon 이웃별

    22.10.27 19:34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글이네요.
    저도 가슴에 새겨두고 잠깐이라도 치열하게 살아보고 싶어요. ㅠㅠ

  • 002. Lv.55 맘세하루

    22.10.29 21:45

    네, 이웃별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망팔 나이라 저렇지만, 별님은 아직 젊으시니 지금은 당연히 치열한 생존 게임에 몰두하셔야죠.
    암튼 무르익는 올 가을 보람차게 잘 보내시고, 뭔가 알찬 수확 거두시길 바랍니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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